금사향 - Keum Sa-Hyang / Geum Sahyang


You can find a track at:

도미도 베스트 컬렉션 100 VOL.1 / 50-60 Domido

9 홍콩 아가씨 / Hong Kong babes (liberation/war song)

This is a mixed style track with trot, a lighthearted pop song. Keum's voice sound very young and mature at the same time.


Another reissue:


한정무/금사향 - 꿈에 본 내고향/홍콩아가씨 (MRC 유성기 복원 시리즈) (7인치)

Side. A 1. 꿈에 본 내고향 / My Hometown in Dreams - 한정무 / Han Jeong Moo Side. B 1. 홍콩 아가씨 / Hong Kong Lady- 금사향 / Keum Sahyang

한정무 - 꿈에 본 내고향 / 금사향 - 홍콩아가씨 가요사에 중요한 기록물인 유성기를 복원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당시 녹음된 마스터테이프와 유성기를 복원하여 온전한 상태의 사운드로 마스터링하였고 당시 봉투의 이미지를 재현. 마치 유성기를 연상시키는 EP(싱글반)로 제작된 재발매 반이다.


* 중량반 바이닐에 45RPM 커팅으로 최상의 음질을 구현. * 300장 한정 블랙(Black) 반. * 초반의 일러스트 재현과 MRC 리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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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GRAPHY:

Both 30th of januari 1929, Pyongyang, Noord-Korea ; Died 10th of may 2018, Ilsan

Original name Choi Young-pil ; Mother of Park Choong-gwan

Known songs: "A Girl from Hongkong", "Wire where dear is", "Myungdong blues", "Flower of my hometown", "Happy pasture", "Gangnam Moon", "San Francisco"


금사향 홍콩아가씨1954년 도미도레코드 경쾌한 멜로디로 전쟁의 우울함 잊게 해줘 reviewlog 2012. 9. 28.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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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명반·명곡] 금사향 <홍콩아가씨>1954년 도미도레코드 경쾌한 멜로디로 전쟁의 우울함 잊게 해줘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한국대중음악 역사에서 1950년대는 미개척지로 남아있다. 해방 이전보다도 자료보존이 빈약한 이 시기의 대중음악 연구와 발표된 노래들의 정확한 실체 찾기는 마치 달나라로 가는 미지의 여행과도 같다. 실제로 50년대 대중가요들은 작사, 작곡 , 편곡, 연주자의 크레디트는 물론이고 발표 년도와 제작 음반사조차 불명확한 혼돈의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금사향(본명 최영필)의 대표곡 '홍콩아가씨'는 50년대를 대표하는 히트곡이자 지금도 불리어지는 국민애창곡이다. 가난했던 50년대 대중에게 이국에 대한 환상을 심어준 이 노래 역시 그동안 발표 연도가 정확하지 못했다. 전쟁의 우울함을 잠시 잊게 해준 중국풍의 경쾌한 멜로디가 인상적인 이 노래의 원제목은 '香港아가씨'로 한국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2년에 손로원이 작사하고 이재호가 작곡한 노래다. 그래서 그동안 1952년에 발표된 노래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결혼을 하고 부산에서 취입했었다'는 금사향 선생의 증언과 1954년 발표된 한정무의 <꿈에 본 내 고향>과 함께 수록되어있는 것으로 미뤄 음반으로 공식 취입된 것은 1954년이 분명해 보인다.

부산 피난 1954년 취입

'향항아가씨(홍콩아가씨)'는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 피난 온 한복남이 창립한 도미도레코드를 통해서 처음 발표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극심한 경제적 궁핍으로 고단한 삶을 살았던 50-60년대 대중에게 '홍콩'이라는 말은 공간적 개념보다 자유, 동경, 향락, 풍요로움을 의미하는 정신적 개념이 강했다. 70년대부터 널리 유행했던 '홍콩 간다'는 말은 '기분이 좋아 헤롱거린다', '뽕간다' 등의 뜻으로 쓰였다. 실제로 당시엔 중국 음식점 간판들은 북경반점보다 홍콩반점이 더 많았다. 금사향의 차별성은 독특한 보컬 음색뿐 아니라 무대를 가리지 않았던 열정의 화신 같은 화통한 성품을 빼놓을 수 없다.

금사향은 192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1946년 상공부 섬유국 영문 타이피스트로 근무하던 중, 작곡가 박시춘과 작사가 조명암이 심사를 본 럭키레코드사 주최 전국 가수선발 경연대회에 출전해 박재홍에 이어 2위에 입상한 그녀는 서울중앙방송국(KBS전신)의 1기 전속가수가 되었다. 애교 넘치는 은방울 같은 목소리를 지닌 그녀는 박시춘으로 부터 '오빠는 풍각쟁이야'로 유명한 박향림의 후계자가 될 재목으로 칭찬을 받았다.

19세 때 발표한 데뷔곡 '첫 사랑'이 좋은 반응을 얻었을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금사향은 포탄이 떨어지는 전쟁터 위문 공연장을 누비며 노래했던 열혈여장부였다. 트럭 두 대를 연결해 만든 간이무대에서도 군인들을 위로했고 폭우가 쏟아지는 야외무대에 서는 감전될까 염려되어 저고리 고름으로 마이크를 감싸 쥐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녀는 국군위문단으로 최전방에 공연을 갔을 때 알게 된 노래 잘하는 젊은 군인이 다음 날 무장공비에 의해 사망하는 상황에서도 무대에 오르는 강단을 보였다. 다들 만류했지만 전우를 잃은 이들의 마음을 모른 척 할 수 없었던 그녀의 강직한 성품을 읽을 수 있는 에피소드다.

1952년 한국전쟁 중에 오리엔트레코드를 통해 발표한 '님 계신 전선'은 남편을 전선으로 떠나 보낸 아내와 그 가족들 의 슬픔을 애잔하게 노래했다. 이 노래 역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전쟁터를 누비던 금사향을 인기가수로 견인했다. 당시는 공연만 하는 가수와 레코드 취입만 하는 가수가 따로 있었다. 그래서 무대에서 노래는 불렀지만 음반 한 장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가수가 허다했다. 문학적 재질이 있었던 금사향은 작사 작업에도 재능을 보였지만 유달리 작은 키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어 레코드 취입가수로만 활동을 하려고 했다. 당시 한복에 하이힐을 신고 무대에 오른 가수는 그녀가 최초였다고 전해진다.

'증류수'같은 목소리란 평가처럼 간드러지면서도 맑고 청아한 금사향의 보컬은 귀에 콕콕 박혀오는 독특함이 있다. "'홍콩아가씨' 덕분에 도미도레코드가 벽돌집을 샀다"는 소문까지 나돌게 했던 이 노래는 금사향의 대표곡이 되었고 시대를 초월해 수많은 후배가수들이 리메이크 작업에 기꺼이 동참한 명곡이 되었다.

<저작권자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입력시간 : 2012/09/25 17:39:22 수정시간 : 2012/09/28 16:09:09

[출처] 금사향 홍콩아가씨1954년 도미도레코드 경쾌한 멜로디로 전쟁의 우울함 잊게 해줘|작성자 절판소장


Golden Love Hong Kong Lady 1954 Dormy Records Let me forget the gloomyness of war with a light melody (Sep 28, 2012)


[Albums and Masterpieces of Our Time]

Geumsaeng <Hong Kong Girl> 1954 Sea Bream Record

A Light melody making us forget the gloom of war

Choi Kyu-sung Critic critic oopldh@naver.com


In the history of Korean pop music, the 1950s remain unexplored. The study of popular music at this time, when data preservation is poorer than before liberation, and the search for the exact substance of published songs is like an unknown journey to the moon. Indeed, popular songs in the fifties have been left in a state of unclear chaos, not only in writing, composing, arranging, and playing credit, but also in the year of publication and record label.


Geumsa-hyang (real name Choi Young-pil) 's representative song' Hong Kong 'is a hit song that represents the 50s and is a national favorite song. The song, which invented the illusion of exoticism to the poor public in the fifties, was also inaccurate. The original title of the song, which impresses the melancholy melody of the war for a while, was written by Son Ryu Won and composed by Lee Jae-ho in 1952, when the Korean War ended. So it was known for the song released in 1952. However, it was recorded along with the testimony of Geumsa Hyang, who had been married after the war and was blown out of Busan, and Han Jeong-moo's <My Hometown in Dreams> published in 1954. The setting links were obvious.


Busan evacuation in 1954


'Hanghang Baby' (Hong Kong's Baby) was first announced through Domido Record, founded by Hanbok Nam, who fled to Busan during the Korean War. After the Korean War, the term 'Hong Kong' was more of a spiritual concept in terms of freedom, admiration, pleasure, and abundance than the spatial concept for the 50-60's who lived a hard life due to severe economic poverty. The word 'Hong Kong Kanda', which has been popular since the 1970s, is used to mean `` feel good and tease '' and `` Mong Kanda. '' In fact, at that time, Chinese restaurant signs had more Hong Kong spots than Beijing spots. The distinctiveness of gold fragrance is not only a unique vocal tone, but also a gorgeous character like the incarnation of passion that did not cover the stage.


"Gold musk" / Keum Sayhyang was born in Pyongyang in 1929. In 1946, while working as an English typist at the Korean Bureau of Commerce and Industry, composer Park Si-chun and lyricist competed at Lucky Records' National Singer Competition, where she won the second place after Park Jae-hong. Became the 1st full-time singer. With a loving silver-dropped voice, she was praised by Park Si-chun for being a successor to Park Hyang-rim, famous for her brother.


The Korean War broke out when the debut song 'First Love', released at the age of 19, received a good response. Geumsaeng was a hot-blooded heroine who sang in a battleground where the shells fell. In the simple stage made by connecting two trucks, they comforted the soldiers and sang with a ring of mics. She showed her pulpit on stage even when a young soldier who sings when she went to the front of the National Guard was killed by an airmen the next day. It is an episode in which everyone can read her upright character, who could not pretend to know the minds of those who had flowed but lost their comrades.


In 1952, during the Korean War, the 'God's Frontline' released through Orient Records sang sorrowfully for the sorrow of his wife and her family who sent her husband off the wire. The song also recorded an all-time hit and attracted the gold fragrance that flew along the battlefield to become a popular singer. At the time, there was a singer who performed only a performance and a singer who only took records. So there were a lot of singers who sang on stage but disappeared because they didn't have a record. Geumsayang, who had literary materials, was also talented in his writing, but he had a complex of unusually short heights, so he tried to act as a record blow singer. It is said that she was the first singer to go on stage wearing high heels in a hanbok.


The voice, like a distilled water, is as simple as an evaluation, but the clear and elegant vocal vocals are unique in their ears. The song, which has been rumored to be a brick house thanks to 'Hong Kong lady', has become a representative song of gold fragrance and has become a masterpiece that many junior singers willingly participated in the remake work.


<Copyright ⓒ Internet Hankook Ilbo, [Source] Gold Incense Hong Kong Baby 1954 Dormy Records Let me forget the melancholy of war with a light melody |


https://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2075

“노래는 나의 생명, ‘은퇴’란 절대 없어요”

이은경 / 여성신문 편집위원 승인 2013.10.17 16:57 수정 2013-10-22 17:12

86세 나이에도 크고 작은 무대에서 열창…

지난해엔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 받기도

“연예인은 센스와 광기로 살아… 관객 환호성을

청심환 삼아 필사적으로, 결사적으로 노래 부른다”

군부대 위안 공연을 다니던 40대 당시의 모습을 배경으로 하고 앉은 원로가수 금사향씨.cialis manufacturer coupon cialis free coupon cialis online coupon

군부대 위안 공연을 다니던 40대 당시의 모습을 배경으로 하고 앉은 원로가수 금사향씨.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1946년 열아홉 나이에 럭키레코드사가 주최한 전국가수선발경연대회에서 5000명을 제치고 1등을 했어. 그래서 당시 중앙방송국(현 KBS) 전속 가수 1기로 활동을 시작해 지금까지 67년간 노래 외엔 아무것도 안 했어. 돈 욕심도 없었고. 내가 활동할 때는 가수가 별로 없었지만 지금은 가수들이 너무 많으니까 이제는 붕어빵 장수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웃음)”

“별들이 소근대는 홍콩의 밤 거리 나는야 꿈을 꾸며 꽃 파는 아가씨~.”(‘홍콩아가씨’ 중 일부·이재호 작곡)로 6·25 직후 삭막하고 황폐해진 사람들의 마음에 설렘을 안겨주었던 금사향(본명 최영필·86)씨를 만났다. 그는 이 ‘홍콩아가씨’ 한 곡의 대히트로 ‘아가씨’ 노래의 원조가 됐고, 아직도 무대에 서고 있는 최고령 원로 가수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 노래는 2000년대 중반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배경음악으로도 사용돼 신세대에게도 낯설지 않다.

우연히 나간 가수경연선발대회서

1등 거머쥐며 화려한 데뷔

지난 16일 그가 생활하고 있는 일산의 한 요양센터에서 만난 그는 대뜸 “‘진달래’란 이 방 이름이 예쁘지 않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거든”이란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의 방 벽엔 그를 방문했던 초·중·고생들의 “할머니, 정말정말 아름다우세요!” “할머니 사랑해요!”라고 쓴 편지와 함께 할리우드 스타 메릴린 먼로와 한류 스타 장근석의 사진이 “보기 좋다”는 공통 이유로 나란히 붙어 있었다. 그는 연신 걸려오는 공연 섭외 전화로 바빴다. 지금으로선 좀 상상이 안 가지만, 1950~60년대 인기가 절정이었던 그때나 지금이나 그에겐 매니저가 없다. 작은 비닐봉투에 한가득한 메모지에 빼곡하게 굵은 글씨로 적어놓은 메모를 뒤적이며 일정을 확인하곤 한다. 얼마 전에도 경남 사천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펼쳐진 추억의 가요무대에 섰고, 14일엔 곧 방영될 KBS ‘가요무대’를 위해 녹화했다. “노래하다 흥에 못 이겨 쓰러지면 저 여자 시체 다 됐다고 흉 볼까봐 안전 빵으로” 의자에 앉아 노래를 불렀지만.

“한창때는 스타라 (대기실 분장실도) 독방을 썼고, 여기 들어와선 죽을 때까지 이 독방을 써. 그런데 사람들은 내 목소리가 한창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고 해.(웃음) 워낙 고음이라 드러누워서도 다 소리를 낼 수 있어. 밥은 사흘이면 쉬는데, 난 지금 그 밥에 곰팡이가 낀 격이어서 얼굴이 묵은지에 양념한 것 같고, 입술에 바른 립스틱은 헌 구두에 구두약 칠한 것 같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하면 내 팬들이 재미있다고 막 웃어. 젊었을 때는 입에 지퍼 채운 듯 말을 못 했지만 나이 들어 무대 서니 말이 막 술술 나오는 것이 신기해.(웃음)”

사실 그는 말년 막바지에 생활고로 고생했다. 경기 고양시 동산동 공기 좋고 한적한 곳에 연예인 마을을 만들고 싶었고, 이를 위해 아껴왔던 종잣돈을 믿고 있던 지인에게 사기당한 후 인근 가건물에서 기초생활수급자로 어렵게 생활해왔다. 온몸 아프지 않은 데가 없어 ‘인조인간’으로 불리기도 했다는 그는 심각한 퇴행성 관절염으로 바깥 출입이 힘든 때도 있었지만 가수 남일해 등의 도움으로 웰튼병원에서 무료 인공관절 수술을 받아 제2의 무대인생을 계속할 수 있게 됐다. 그는 “살아 있을 때 돈은 (세상과 나를 연결해주는) 연락선 같은 것, 돈 한 푼 없어도 내 마음속에 희망이 있으면 그게 천당이고, 절망이 가득 차면 그게 지옥 아니겠어? 똑같은 분위기에서도 생각만 바꾸면 천당이 되는 거야”라며 요즘도 기분 내키면 혼자 버스에 올라 창밖 풍경을 보다가 내려서 카페에 들어가 젊은이들의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곤 한다고 했다. 이런 초긍정 낙관주의가 통했는지 2010년 한 해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대상과 특별공로상을 연거푸 수상한 데다가 지난해엔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 수상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

“몇 년 전 팔순잔치를 강화도 선원사에서 내 히트곡 ‘임 계신 전선’(작곡 박시춘) 노래비를 세우며 했어. 그때 주지승이 나를 평생 모시겠다고 했는데, 단번에 싫다고 했어. 이래 봬도 내 코가 육쪽마늘 코야. 평생 단 돈 천 원도 안 꿔 썼어. 돈이 없으면 시금치죽 쒀 먹으면 되지,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거나 도움 받을 일이 뭐 있어? 속상하면 속상한 맛으로 사는 게 인생 아니겠어?”

“‘임 계신 전선’ ‘홍콩아가씨’ 등 전후 어려운 시절 희망과 낭만 선사한 게 보람”

한창이던 시절 동료 가수들과 함께한 금사향씨(오른쪽에서 둘째). 서양식 공단 드레스에 자주색 코르사주를 단 첨단 패션이다. ( 왼쪽부터) ‘알뜰한 당신’을 부른 황금심, ‘아리랑 낭랑’을 부른 백난아, ‘꿈에 본 내 고향’을 부른 한정무, 금씨, 만담가 고춘자.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 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 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cialis coupon free discount prescription coupons cialis trial couponprescription drug discount cards site cialis trial coupon

한창이던 시절 동료 가수들과 함께한 금사향씨(오른쪽에서 둘째). 서양식 공단 드레스에 자주색 코르사주를 단 첨단 패션이다. ( 왼쪽부터) ‘알뜰한 당신’을 부른 황금심, ‘아리랑 낭랑’을 부른 백난아, ‘꿈에 본 내 고향’을 부른 한정무, 금씨, 만담가 고춘자. ⓒ금사향 제공

그의 집안에서 그는 유일무이한 대중 연예인이다. 아버지도, 오빠도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한 음악가 집안에서 자란 그는 높은 경쟁률 속에 당시 상공부 섬유국 타이피스트로 합격한 잘나가던 직장 여성이었다. 전국가수선발경연대회에 나가게 된 것도 혼자 흥얼거리던 노랫소리를 들은 주변 사람들이 목소리가 예쁘니 나가보면 어떻겠느냐는 권유에서 비롯됐다. 다른 가수 지망생들은 “온 가족이 동원돼 사이다와 소금을 가지고 와서 열렬히 응원하는데, 난 웬 용기가 났는지 홀로 무대에 섰고 덜컥 합격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요새 가수는 당일치기로 되는 것 같아. 그때는 ‘다홍 염낭 남염낭’ 등 발음하기 어려운 문장을 즉석에서 몇 번 해보는 것도 오디션 과정에 포함됐었어. 난 레코드사가 선발한 가수라 연습생 등 험난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가수가 됐고, 비록 데뷔곡 ‘첫사랑’은 전쟁통에 별 히트를 하지 못했지만 그 후 연속으로 ‘임 계신 전선’ ‘홍콩아가씨’가 크게 인기를 얻어 아직까지도 주로 그 두 곡으로 먹고 살잖아?

지금 생각해 보면 ‘홍콩아가씨’는 전후 배고프고 비참하고 절망하던 사람들에게 아련한 희망을 안겨준 노래 같아. 노래 속 자유로운 분위기 자체가 희망이 된 것 같고, 이게 사교춤으로도 이어졌지.”

사실 그는 무대의상에 새 기운을 불어넣은 선구자 격이다. “하늘 같았던” 선배 신카나리아(1912~2006)가 무대의상은 인조견 한복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충고했지만 “팬들이 먼 데서만 나를 보란 법이 있느냐”며 “최고급 양단, 뉴똥(명주실로 짠 옷감)으로 한복 의상을 만들 것”이라고 대꾸할 정도로 옷에 대해서만은 소신이 강했다. 당시 가수들 세계에선 “하루 선배가 대령, 하루 후배가 신병”이라며 아무리 좋은 음식과 과일이 들어와도 선배가 먼저 손을 대지 않으면 절대 손을 안 댈 정도로 위계질서가 엄격한 때였다.

“군대 위문공연 때인가 한복에 8㎝ 뾰족구두를 무대에서 처음 선보였어. 작은 키 탓도 있었지만 한복 입으면 꼭 고무신만 신고 노래 부르란 법은 없다고 생각했어. 갓난아기들의 돌 버선 앞코에 수놓은 매화꽃에서 힌트를 얻어 무대의상에 수를 넣는 것도 처음 시도했지. 치마폭에 큼지막하게 공작 두 마리가 마주보고 있는 것을 수놓아 시선도 끌었지. 지금은 스팡클(반짝이)이 흔하지만 당시엔 귀해서 브로치를 한 서른 개 정도 사서 옷 곳곳에 무늬처럼 달아 스팡클 효과를 내기도 했고, 철공소에서 구리줄을 사서 그걸 ‘에스(S)’자로 만들어 머리에 딱 핀처럼 꽂아 멋을 내기도 했어. 요즘 가수들로선 상상도 못할 얘기지? 우리 전에 대선배들의 경우엔 솥 밑에 낀 검정 그을음을 손톱으로 긁어내 이것을 돼지 비계와 섞어 눈썹 그리는 연필로 사용했다고 하니, 거기에 비하면 그래도 좀 나은 편이었지.

하여튼 새까만 벨벳으로 만든 의상과 흑장미 꽃을 달고 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노래를 부르니 조그만 서양 인형처럼 보여 넋이 빠져 풀썩 주저앉는 관객도 있었다고 해.(웃음)”

8㎝ 하이힐, 구리줄 헤어핀 등 무대의상 개척

“겹치기 출연 욕심 안 부린 게 장수 비결”

생계를 위해 국제시장에서 ‘울고 넘는 박달재’의 가수 박재홍(1927~89)이 전기용품을 팔고, ‘애수의 소야곡’의 가수 남인수(1918~62) 부부가 샌드위치를 팔던 부산 피란 시절을 거쳐 그는 지금까지도 크고 작은 무대에 끊임없이 서고 있다. 본명은 ‘최영필’이지만 예명 ‘금사향’에 담긴 “거문고 실이 울리는 소리”란 뜻이 가진 섬세하면서도 길디긴 잠재적 역량 때문일까.

“평생 가수로 살면서 특별한 관리는 안 했어. 있다면 지나친 욕심 안 부리는 것 정도랄까. 그래서 평생 겹치기 출연 같은 것은 안 하려고 했어. 한창 전성기 때는 남자 가수, 여자 가수들이 다 나를 시기해 남녀를 불문한 공동 라이벌들의 견제 속에 살았지만 그런 라이벌들이 있어야 발전이 있다고 기쁘게 생각해서 싸움 한 번 안 했던 것 같아. 슬럼프? 숨


Automated translation with most mistakes still in:


"Singing is my life, there is no retirement."

Lee Eun-kyung / Editor-in-Chief of Women's Newspaper (2013.10.17)


Even at the age of 86, she sang on stages big and small…Last year, she received a Silver Medal of Honor for the Korean Pop Culture and Art Award.


“A celebrity lives with common sense and madness… I sing desperately for my heart. ”


“In 1946, at the age of nineteen, I won first place at the National Singer Contest hosted by Lucky Records. So I started my career as a singer of the central broadcasting station (currently KBS) and did nothing but singing for 67 years. I didn't want money. There weren't many singers when I was active, but now I have too many singers, so now I can do Taiyaki. (Laughter) ”


"The young lady who dreams of a night in Hong Kong where the stars are crowded with flowers." (Some of Hong Kong's mistresses, composed by Lee Jae-ho) I met my real name, Choi Young-pil, 86). He contributed to the song “Hong Kong Girl” with a big hit and is the oldest senior singer still on stage. The song, which has been alive for a time, is used as the background music of the movie “Friendly Geumja” in the mid-2000s, so it is not unfamiliar to the new generation.

Singer Contest


Splendid debut with first place


He met at a nursing center in Ilsan where he is living on the 16th. It's my favorite flower. ” His grandmother, who visited him on his wall, said, “Grandma, really beautiful!” Along with the letter “I love you grandmother!”, Pictures of Hollywood star Marilyn Monroe and Hallyu star Jang Geun Suk were side by side for a common reason “good to see”. He was busy on the phone for an upcoming show. I can't imagine it right now, but when he was at the height of the popularity of the 1950s and '60s, he doesn't have a manager. I often check the schedule by scrubbing memos written in bold letters on a small plastic bag. Not long ago, he stood on a musical stage of memories held at the Sacheon Culture & Arts Center in Gyeongnam, and recorded on KBS for the upcoming KBS Music Stage. "I'm sitting in a chair with a safe bread," she said.


“I used to have a solitary starra (a parlor dressing room) in the middle of nowhere, and I used this solitary until I died. But people say that my voice hasn't changed much in the middle of now or now (laughs). Bob rests in three days, but I think it's moldy, so I've seasoned my face. Lipsticks on my lips seem to be bitumen on old shoes, but if it's okay, my fans laugh. When I was young, I couldn't speak as if I had a zipper on my mouth, but it was amazing that I was standing on stage as I got older (laughs). ”


In fact, he suffered at the end of his life. I wanted to create a celebrity village in a nice and secluded place in Dongsan-dong, Goyang-si, Gyeonggi-do. He was called `` artificial human '' because he was not sick all over his body, and he had a difficult time to go out due to severe degenerative arthritis, but he was able to continue his second stage life with free joint surgery at Wellton Hospital with the help of singer Nam Il Hae. He said, “When you are alive, money is like a ferry that connects me with the world. Even in the same atmosphere, if you change your mind, you will become heavenly beings. ”Even now, if you feel good, you will go on a bus alone, look out the window, and go down to the cafe to watch the young people. In 2010, she won the Grand Prize and Special Achievement Award in Korea's Performing Arts Awards only for the year.


“A few years ago, I ate the eighth-long feast at the Gangwon-do sailor, setting up my hit song,“ Critical Front ”(composition Park Si-chun). At that time, Ji-seung said he would take me for a lifetime, but he said no at once. Since then, my nose is meat garlic nose. I never spent a thousand won a lifetime. If you don't have enough money, you can eat spinach. Wouldn't it be life if you were upset?


“It is worthwhile to give hope and romance during difficult postwar periods, such as“ The Pregnancy Front ”and“ Hong Kong Girl. ”



Geum Sa-hyang (second from right) with fellow singers in the middle of his life. It is a cutting-edge fashion with purple corsage in western satin dress. (From left) Golden heart called 'Your budget', Baek-nan who called 'Arirang Rang', Han Jung-moo who called 'My hometown in dream'

In her family she is the only pop performer. Growing up in a family of musicians whose father and brother acted as violinists, he was a well-established working woman who passed the competition as a typist at the time. Participation in the national singer contest came from the invitation that people around me who listened to the humming song alone had a pretty voice. Other singers wished that "the whole family was mobilized to bring cider and salt, and I cheered enthusiastically. I stood alone on the stage to see if I had the courage."


“In a sense, the fort singer is going to be a day trip. At that time, it was also part of the audition to try out some sentences that are difficult to pronounce, such as “Dahong salt bag, Nam salt bag”. I was a singer selected by a record company, and immediately became a singer without going through a difficult process such as trainees. Do you still eat mainly from those two songs?


If you think about it now, 'Hong Kong' is a song that gave hope to those who were hungry, miserable and desperate. The free atmosphere in the song itself seemed to be a hope, and this led to a social dance. ”


In fact, he is a pioneer who has given new energy to stage costumes. “Sky-like” senior Shin Canaria (1912 ~ 2006) advised that stage costumes would be enough for a single-dog costume, but he said, “Is there any way for fans to see me from afar?” I will make a "," he said so much about clothes. In the world of singers at that time, “the senior was a colonel, and the juniors were recruits” and no matter how good food and fruit came in, the seniors were strict enough to never touch their hands.


“It was the first time to show off the 8cm pointed shoes on the stage during the military consolation performance. It was because of my small stature, but I thought there was no way to wear only rubber shoes and sing when wearing hanbok. It was my first time trying to get a hint from a plum blossom embroidered in front of a newborn baby's stone socks and to put a number on the costume. The two large peacocks in a skirt width were enthralled and attracted attention. Spangles are common now, but at that time they bought about thirty brooches and used them as patterns on their clothes to make the spankle effect, and they bought copper wires from ironworks and made them 'S' heads. I plugged it in just like a pin. You can't imagine these days singers? Before us, the seniors scraped the black soot under the pot with their nails and mixed it with a pig scaffold and used it as an eyebrow pencil.


Anyway, there were some audiences wearing black velvet costumes, black rose flowers, spotlights, singing, and looking like little Western dolls.

Pioneered stage costumes including 8cm high heels and a copper hairpin


“The secret of longevity is not greed for overlapping appearance.”


Park Jae-hong (1927-89), singer of 'Pakdaljae' crying over the international market for his livelihood, went through Busan Piran when his wife Nam In-soo (1918--62), a singer of Soya Gok's song, sold sandwiches. Even standing on the stage big and small constantly. His real name is Choi Young-pil, but is it because of the delicate, long-lasting potential of the meaning of the “lying sound of the lyre strings” contained in the title “Gumsa-scent”.


“I lived as a lifelong singer and didn't have any special management. If it's too much greed? So I never tried to do overlapping appearances all my life. In the heyday, both male and female singers were jealous of me and lived in checks of joint rivals of both men and women, but I did not fight once because they were happy to see the progress. slump?"


‘별들이 소근대는 홍콩의 밤거리~’로 시작하는 애창곡 ‘홍콩아가씨’를 부른 원로가수 금사향(본명 최영필)이 10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89세.

10일 별세한 원로 가수 금사향이 생전 자신의 LP판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연합뉴스

대표곡 ‘홍콩아가씨’를 비롯해 ‘님 계신 전선’, ‘소녀의 꿈’ 등 1950~60년대를 대표한 가수다. 1948년 서울중앙방송국(현 KBS) 1기 전속가수로 뽑혀 활동했으며, 데뷔곡 ‘첫사랑’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예명 금사향(琴絲響)은 ‘거문고를 울려서 나는 교향악’이란 뜻으로 작사가 고려성(1917~1977)이 지어 준 이름으로 전해진다. 1929년 평양 출생인 그는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섬유국에서 영문 타자수로 일하던 중 지인들의 권유로 1946년 전국가수선발대회에 참가해 1등을 했다. 6·25 전쟁 중인 1952년 ‘님 계신 전선’을 발표해 전국에 위문공연을 다녔다. 당시 한국 가수로는 처음으로 굽 높은 하이힐을 신고 전장을 누빈 멋쟁이로 불렸다.

불후의 애창곡 ‘홍콩아가씨’는 1954년 부산 도미도 레코드사에서 녹음했다. 낭만적인 가사와 멜로디로 전쟁으로 가라앉은 분위기를 잊게 해 줘 국민적 인기를 끌었다. 2005년 이영애가 주연한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도 삽입됐다. 그가 ‘홍콩아가씨’의 주인공인데도 홍콩을 한 차례도 방문하지 못했다가 2013년 12월 홍콩 현지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2012년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이 수훈됐다. 빈소는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 장례식장 301호실, 발인은 12일 오전 5시다. 장지는 서울추모공원. (02)2262-4800.

[출처: 서울신문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80511027017#csidx5e879a63a470ab39c3e119e6ff27ee1

"Elder singer Geum Sa-yang (real name Choi Young-pil), who sang the song “Hong Kong Girl,” started with “Hong Kong's nightlife”, died on the 10th. 89 years old.


She is a representative singer of the 1950s and '60s, including her representative song “Hong Kong Agae”, “Your Front” and “Girl's Dream.” In 1948, he was selected as the exclusive singer of the Seoul Central Broadcasting Station (now KBS) and began to become famous for his debut song “First Love.” Geumsayang (향) means 'the symphony of a lyre,' written by Koryo Sung (1917 ~ 1977).


Born in Pyongyang in 1929, he worked as an English typewriter in the Bureau of Commerce and Industry (currently the Ministry of Trade, Industry and Energy). In 1952, during the Korean War, she announced “Your Front” and went to the nation for performances. At the time, he was the first Korean singer to wear a high-heeled high-heeled shoes.


The immortal favorite song “Hong Kong Girl” was recorded by Dominado Records, Busan, in 1954. The romantic lyrics and melody helped me forget about the atmosphere of the war. In 2005, Lee Young-ae starred in the movie “Friendly Geumja”. Although he was the main character of the Hong Kong Girl, she never visited Hong Kong but sang on a local stage in Hong Kong in December 2013.


In 2012, received the Silver Tube Medal of Honor for the Korea Popular Culture and Arts Award. The office is located in Room 301, Funeral Hall, National Medical Center, Jung-gu, Seoul. Jangji is a memorial park in Seoul."



홍콩 아가씨' 부른 원로가수 금사향 별세…향년 89세(종합) 송고시간2018-05-10 13:41


1940∼50년대 풍미, 한국전쟁 때 군예대 활동…'님 계신 전선' 등 발표 젊은 날의 금사향 [대중음악평론가 박성서 씨 제공]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1940∼50년대를 대표하는 원로가수 금사향(본명 최영필)이 10일 오전 4시 15분께 별세했다. 향년 89세.

원로가수들의 모임인 거목회 이갑돈 명예회장은 이날 연합뉴스에 "고인이 오늘 새벽 일산 요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며 "말씀은 잘하셨는데, 노령이어서 최근 식사를 못 하시고 링거에 의지했다"고 밝혔다.

생전, 자신의 LP를 들고서 포즈를 취한 금사향

[대중음악평론가 박성서 씨 제공]

1929년 평양 출생인 금사향은 상공부 섬유국에서 영문 타이피스트로 근무하던 1946년 주위의 권유로 조선 13도 전국 가수 선발대회에 참가해 1등을 하면서 가요계에 입문했다.

이후 '첫사랑'이란 곡으로 데뷔한 고인은 1948년 서울 중앙방송국(현 KBS) 전속 가수 1기생으로 활동했으며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님 계신 전선'과 '홍콩 아가씨', '소녀의 꿈' 등의 대표곡을 발표했다. 금사향(琴絲響)은 '거문고를 울려서 나는 교향악'이란 뜻으로 작사가 고려성 선생이 지어준 예명으로 알려졌다.

고인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군예대에서 활동하며 최전방까지 위문 공연을 펼친 참전 연예인이다. '위문 공연 도중 죽더라도 국가에 보상을 받지 않겠다'는 일종의 각서인 '먹물 도장'을 찍고서 군의 사기를 위해 목숨 건 활동을 했다. 작은 체구였던 그는 국내 여자 가수 최초로 하이힐을 신고서 전장의 무대를 누벼 화제가 되기도 했다.

대표곡 중 손로원이 작사하고 박시춘이 작곡한 '님 계신 전선'은 제주도 모슬포에 있던 육군 제1훈련소 군예대 활동 당시 1952년에 취입한 노래다.

또 다른 대표곡 '홍콩 아가씨'는 '별들이 소곤대는 홍콩의 밤거리'로 시작하는 곡으로, 피란 시절 부산에 설립된 도미도레코드사를 통해 1954년에 취입했다. 경쾌한 멜로디의 이 곡은 전쟁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의 아픔을 잊게 해준 노래였다.

1952년 '님 계신 전선'을 취입하는 금사향(맨 왼쪽)

[대중음악평론가 박성서 씨 제공]

고인은 한국전쟁 당시 위문 공연을 다닌 공훈을 인정받아 국가유공자로 선정됐으며, 이 공로로 2012년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무릎에 인공관절 수술을 받아 거동이 불편하면서도 근래까지 전국 곳곳의 무대에 올라 노래했다.

고인을 오랜 시간 조명해온 박성서 평론가는 "가장 어려웠던 한국전쟁 당시 군예대원으로 근무하며 군번 없는 용사로 활동하셨다"며 "어려운 시절을 겪으면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으셨다"고 떠올렸다.

이어 "특히 고인이 자신이 기억하는 구전 가요를 육성으로 재현해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열심히 하신 것이 기억에 남는다"며 "구전된 작자 미상의 노래부터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쳐 1960년대 궁핍했던 시절까지 우리 여인네들의 삶과 함께해 온 노래를 틈틈이 채록하셨다"고 말했다.

빈소는 서울 중구 을지로6가 국립중앙의료원 장례식장 301호, 발인은 12일 오전 6시, 장지는 전북 임실 호국원이다. ☎ 02-2262-4800.

mimi@yna.co.kr


"Hong Kong lady's senior singer dies a Age 89.

Posted on 2018-05-10 by Reporter Lee Eun-jeong


Flavor in the 1940s and 50s, military arts activities during the Korean War… Announced 'Your Front'


Lee Hok-don, the honorary chairman of the senior singer's group, told Yonhap News that the deceased died in Ilsan nursing home at dawn this morning.


Born in Pyongyang in 1929, Geum Sa-hyang entered the music industry by taking part in the 13th National Singer Contest in 1946. Later, he debuted with a song called 'First Love'. In 1948, he was a first-born singer of Seoul Central Broadcasting Station (now KBS). Released the song. Geumsayang (琴 絲 響) means' the symphony of a lyre', and it is known as the name given by the teacher of Goryeo Sung.


The deceased is a veteran entertainer who worked in the military arts college and performed a consolation performance to the front line when the Korean War broke out. He took a life-saving campaign for the morale of the military by making a kind of memorandum, saying that he would not be rewarded by the nation even if he died during the exile. As a small figure, he wore high-heeled shoes for the first time in Korea and became a hot topic on the battlefield.


One of the representative songs written by Son-Won Won and composed by Park Si-Chun's 'God's Front Line' is a song taken in 1952 during the Army First Training Center's military martial arts camp in Jeju-Musulpo.


Another representative song, 'Hong Kong Girl' is a song that starts with 'Hong Kong's Night Street with Stars'. This song of cheerful melody was a song that helped me forget the pain of those who were hurt by war.


The deceased was selected as a national merit for his merit during the Korean War, and he received the Silver Tube Medal of Honor for the 2012 Korea Popular Culture and Art Award. He suffered from artificial joint surgery on his knee and was uncomfortable, but recently he was singing on stages around the country.


Park Sung-seo, a critic who has been lighting up the deceased for a long time, said, "I worked as a military corps member during the most difficult Korean War and worked as a soldier without a military number."


"I remember that the deceased worked hard to recreate the oral song that he remembers by nurturing it, and to record it." "We have taken some of the songs that have been with our women's l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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