쟈니브라더스 - Johnny Brothers (Johny Brothers)


Tracks you can find here:

V.A.: Music Museum 220 Best

CD10-1 빨간 마후라 / Red muffler (1964)

CD10-2 가슴을 펴라 / Stretch your chest (1965)

Johnny Brothers are amongst the first male harmony bands. This song is arranged with strings mostly. The singers respond with whistles and hums too. The song itself is so much driven by rhythm the song almost becomes a march. It is not a miracle to realise how the band was quickly mobilized to make soldier marching songs during the Korean War. The second slower song has one warm and deep breathy lead voice (최희준 / Choi Hee-Joon), but has the powerful backing vocals of the Johnny Brothers too adding extra power. It is a bluesy s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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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쟈니브라더스

쟈니 부라더스’는 남성 4중창단 전성시대를 활짝 열었던 1960년대의 슈퍼스타였다.

최초의 남성보컬그룹 ‘블루벨즈’와 ‘멜로톤 쿼텟’에 이어 3번 째로 탄생한 대학생보컬그룹 ‘쟈니 부라더스’는 아름다운 하모니의 4성 화음뿐만 아니라 무용수 뺨치는 율동까지 곁들인 무대매너로 대중들을 사로잡았던 만능 엔터테이너들이었다. 전쟁의 포화를 딛고 일어서려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시동과 더불어 월남파병으로 온 나라가 희망과 우울함이 뒤섞인 1960년대 초. 그들은 도회풍의 밝은 노랫말을 스탠더드 팝 계열의 경쾌한 가락에 얹어 대중들에게 위안을 안겨 주었다.

이들의 국민가요 급 히트곡인 ‘빨간 마후라’는 단순한 행진곡풍 노래가 아닌 팝적인 요소를 가미한 가락으로 메가톤급 사랑을 받았다.

1962년 데뷔이래 40여 년 동안 외곬 음악인생을 걷고 있는 창립멤버 김준은 가요계의 신사로 후배 가수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본명이 김산현(金山鉉)인 그는 1940년 1월14일 만석꾼이었던 부친 김득수와 모친 최창선의 1남1녀 중 3대 독자로 평안북도 신의주 마전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김준은 또래 아이들은 상상하기 힘든 당꼬 바지에 소가죽 구두를 신고 장난감 칼과 진짜 기상나팔을 부르며 동네를 주름잡았던 골목대장이었다.

음악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던 집안이었지만 부친은 노래 잘하는 아들을 자랑스러워 했다. 동요를 잘 불렀던 그는 유치원 때 5개 국어로 노래하는 프로에 소련어로 노래를 불러 주위를 놀라게 했다.

7살 무렵 토지개혁으로 집안의 재산을 몰수당하자 가족들과 함께 월남해 서울 남산초등학교에 입학해 1년간 다니다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광산촌의 주천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부친은 한때 강원도 일원에서 꽤나 알아주던 ‘달별표 비누’공장을 세워 사업을 일으켰다.

이미 노래 잘하는 아이로 소문났던 김준은 6ㆍ25가 터져 인민군이 들이 닥쳤을 때 행사가 있으면 불려가 인민군 노래를 강제로 불렀다. 1ㆍ4후퇴 때 목포를 거쳐 남제주군 안덕면 사계리 대전부락 향교에서 어렵게 살던 중 어머니가 영양실조로 돌아가시자 토끼부락으로 옮겨 구멍가게를 차렸다.

고단한 세월이었다. 그러나 가곡으로 도내 음악 콩쿠르를 휩쓸었던 그는 아침조회시간에 교단에서 노래를 불렀던 제주 대정고교의 유명한 노래꾼이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한동안 인근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일하기도 했다. 이때 미군교회의 흑인목사 채플린 게이를 통해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도 배우고 루이 암스트롱의 트럼펫과 마할리아 잭슨의 재즈와 흑인영가를 접했다.

고교 졸업 후 경희대에서 주최한 ‘전국 남녀 중고 음악 콩쿠르’ 성악부에 3등으로 입상을 하며 경희대 음대에 60학번 장학생으로 입학했던 김준은 “고백할 것이 있다”며 어려운 말문을 열었다.

김준은 “이미 졸업하고 쉴 때 대정고의 정남혁 음악선생이 학교 대표로 콩쿠르에 내 보낼 학생이 마땅치 않자 나를 찾아와 다시 머리를 깎게 해 고등학생으로 만들어 콩쿠르를 참가시켰다”며 가슴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이미 감리교신학대학에 입학한 고교동기 장철우 목사가 소개한 교회 음악선생 이동일의 도움으로 입상을 했다. 이후 용산 수도여고 건너편 캠프 코이너 채플의 시온 성가대 합창단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잡무를 도와주며 숙식을 해결하고 악보를 익혔다. 이 시절은 그의 음악적 기초와 인성을 정립해준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1학년 수료를 하고 2학년 올라갈 때 장학제도가 없어지자 직업이 필요해 김종필이 단장이었던 예그린악단 합창단원모집에 응시해 들어갔다. 김준은 “이때 처음으로 하루 세끼를 먹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예그린 시절은 여러 장르의 음악을 접해 좋았다.

또한 멜로톤 트리오 멤버 중 한 명이 군에 입대해 임시멤버로 영입되어 시민회관무대에 서기도 했다. 1년 후 예그린 악단이 해체하자 김산현은 김준으로 예명을 만들어 평소 배짱이 맞았던 동료단원 진성만, 김현진, 양영일과 보컬그룹을 결성했다.

이들은 브라더스 포, 에임스 브라더스 등의 노래를 좋아했지만 ‘콰이어강의 휘파람’을 부른 ‘미치 밀러 합창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포크 싱어 전석환은 연습실을 빌려주고 하몬드 올갠을 쳐주며 이들을 지도해 준 은인이었다. 1962년 율동을 겸해서 노래 연습을 해 새롭게 개국한 동아방송 노래자랑 연말결선에 올라 최고상을 받 으며 화려하게 가요계에 데뷔했다.

그룹 이름이 없던 이들은 전석환의 별명 ‘쟈니’를 따 ‘쟈니 부라더스’로 이름을 정하고 본격적으로 대중들 속으로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최정상 중창단

1962년 MBC가 주최한 동대문운동장의 ‘5ㆍ16혁명 1주년 기념 콩쿠르 대회’는 ‘쟈니 부라더스’라는 공식이름으로 대중들 앞에선 첫 무대였다. ‘황화의 골짜기’와 흑인 영가를 부르는 신출내기 보컬그룹의 흥겨운 무대에 대상의 영예가 안겨지며 수많은 관객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 ‘마포사는 황부자’에 이어 영화주제가 ‘빨간 마후라’가 공전의 히트를 하며 정상의 인기그룹으로 급부상했다.

‘당시 연속극과 영화주제가 대부분을 도맡아 불렀다’는 김준의 말처럼 데뷔부터 1967년까지 6년 간 ‘방앗간 집 둘째 딸’, ‘니가 잘나 일색이냐’등 히트 퍼레이드로 ‘쟈니 부라더스’는 황금기를 누렸다.

1968년 가수라면 누구나 출연을 꿈꾸던 TBC방송의 최고 인기프로인 ‘쇼쇼쇼’ 레귤라 그룹으로 매주 출연하며 최정상의 중창그룹으로 군림했다. 멋들어진 화음과 함께 건장한 남성들의 무용수 뺨치는 율동은 장안의 화제를 불러오며 쟈니 부라더스는 감당키 힘든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인기는 최정상이었지만 음악적인 한계에 부딪쳤다. 4중창단의 화음 보다는 쇼프로그램의 성격에 따라 멜로디위주로 솔로나 듀엣으로 제멋대로 팀의 음악구성을 변경하는 강요된 활동은 각자의 개성을 살리지 못했고 멜로디 멤버가 아프면 그룹활동을 한동안 중단해야 했다.

지금도 여전한 중요 보컬에만 무게중심을 두는 당시 가요계 풍토 때문에 멤버들이 불만을 터뜨리면서 팀이 균열하기 시작했다.

음악적 갈등을 느낀 김준은 ‘보컬그룹 활동이 영원하지는 못할 터이니 각자 솔로로 나가 멜로디 보컬을 익혀 실력을 쌓자’고 제안했지만 다른 멤버들은 ‘우리 인기가 최고인데 그냥 이대로 그룹을 지키자’고 반발, 의견충돌이 빚어졌다.

결국 김준은 인기만을 위한 소비적인 그룹 음악활동 보다는 어릴 적부터 가슴속에 품어오던 재즈를 하고 싶은 자신의 음악 색깔을 찾기 위해 결별을 선언했다. 1968년 7월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쟈니 부라더스의 해체선언에 대중들과 방송국들은 경악했다.

이후 각자 새로운 직업으로 흩어져 있던 쟈니 부라더스 멤버들에게 MBC는 재결합을 강력하게 권유했다. TBC와 오락프로그램 경쟁을 치열하게 벌이던 MBC로서는 경쟁력 있는 쟈니 부라더스 멤버들로 TBC에 대항하려 했다.

지인을 통한 방송국의 강력한 압박에 멤버들은 자기 직업을 유지한 채 재기의 무대를 갖기로 합의했다. 일과 후 저녁에 모여 연습을 강행하여 결국 1969년 12월 30일 MBC 특별방송으로 ‘쟈니 부라더스 쇼’로 재기무대를 가졌다.

이후 1970년 첫 방송부터는 ‘전국에 메아리 친다’는 순수 우리말의 의미를 따 그룹명을 ‘메아리 진’으로 개명하며 음악활동을 본격화했지만 음악적인 변화 없이 방송사의 기획에 의존한 재기활동은 반짝 반응에 그치며 단명했다.

1970년 김준은 퇴계로 아스트리오 호텔에서 최상룡 마스터에게 미8군 오디션을 받고 8군무대에서 본격적인 솔로 재즈가수로 거듭났다.

이후 싱어 송 라이터로 재 탄생한 김준은 1969년 펄씨스터즈 공연에 함께 출연한 장우, 박상규, 차도균과 함께 이백천이 붙여준 ‘포 다이나믹스'라는 노래동아리를 결성했다.

이들 4명은 산타클로스 복장을 하고 하모니카를 불며 명동거리에 나가 불우이웃을 돕기 위한 즉흥 모금연주회를 가지는 진보적 음악활동으로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개성이 강했던 멤버들은 1974년 남산 드라마센터의 ‘다이나믹스’공연을 끝으로 동아리활동은 중단했다. 이후 음악적 배짱이 맞았던 ‘김준ㆍ장우’두 사람은 듀엣 활동으로 주목을 받으며 재즈의 대중화에 힘썼다.

쟈니 부라더스 멤버들 중 김준 만이 줄곧 음악인생을 걷고 있다. 가톨릭 의대 출신 베이스 진성만은 배우 김지미의 여동생과 결혼, 1987년 ‘지미필름’을 설립했고 현재는 청담동에서 ‘로바다야케 재인’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 외대출신 리드 김현진은 아마추어 바둑3단으로 서울에서 건설업을, 경희대 음대 출신인 하이테너 양영일은 팀 해체 후 MBC TV 코미디언으로 변신했다가 현재 코스모스 악기사 부산지점장으로 살아가고 있다.

김준은 1990년대 초 한국재즈클럽을 만든 이래 현재 의정부에서 재즈까페 준을 운영하며 수많은 재즈음반과 공연으로 중단 없는 재즈보급운동을 펼치고 있다. ‘순간적인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진실한 음악을 추구하는 가수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그의 소박한 음악관에서는 한없이 자유롭고 풍요로운 대중 음악가의 아름다운 풍모가 느껴진다.

그는 재즈 1세대들의 친목과 후배 가수들의 음악활동을 이어주는 아름다운 가교로 선후배들의 신임을 받고 있다.

출처 : 연어알 | 글쓴이 : 북극해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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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gh translation):

"Johnny Brothers


Johnny Brothers' were a superstar of the 1960s,

which opened the heyday of the male quartet.


The third male college vocal group, Johnny Brothers, was born after the first male vocal group 'Blue Bells' and 'Meltone Quartet'. They were all-round entertainers.


With the start of the five-year economic development plan to rise from the saturation of war, the nation was mixed with hope and melancholy by virtue of Vietnam. They comforted the masses with bright, melodic words in the standard pop series.


Their national song, "Red Mahura," was loved by not only as a marching song but also for its pop elements.


Founding member Kim Joon, who has been walking alone for 40 years since his debut in 1962, is a gentleman from the music industry. His real name is Kim San-hyun. He was born on January 14, 1940, in Majeon-dong, Sinuiju, North Pyongan, North Korea, as the third child of his father Kim Deok-su and his mother Choi Chang-sun. Young Kim was an alley captain who wrecked the town with his donkey pants, cowhide shoes, and toy knives and real weather trumpets that his children could not imagine. The family had no relationship with music, but the father was proud of his son who was good at singing. He sang well and surprised him by singing a song in Soviet language to a pro in five different languages. When he was about seven years old, he was confiscated the property of his family by land reform. He and his family went to Namsan Elementary School in Namnam Elementary School in Seoul and went to Jucheon Elementary School in Mincheonchon, Yeonwol-gun, Gangwon-do for one year. His father started a business by building a “monthly ticket soap” factory, which was once well known in Gangwon-do. Kim Joon, who was already known as a good singer, was called for duty when the Korean People's Army broke out when the Korean People's Army broke out. During the retreat, he passed through Mokpo and lived in Hyanggyo, Sagye-ri, Saeok-ri, Andeok-myeon, Namjeju-gun. It was hard time. However, he swept the music competition in Tokyo with his songs, and he was a famous singer of Jeju Daejeong High School who sang in the denomination during the morning session. Because of the difficult situation of his family, he gave up attending college. For a while, he worked as a nearby US Army Houseboy. At this time, he learned the songs of Elvis Presley through the black church of pastor Chaplin Gay, and met Louis Armstrong's trumpet music, Mahalia Jackson's jazz, and black soul music. After graduating from high school, Kim Jun won the third prize in the vocal music section of the National Men's and Women's Used Music Competition hosted by Kyung Hee University and entered the 60th grade as a scholarship student at Kyung Hee University.

Kim Jun released the story that Jung Nam-hyuk, music teacher of Dae Jung-go, introduced him to the competition as a representative of the school when he didn't want to come to school. He won a prize with the help of Lee Dong-il, a church music teacher who was introduced to Pastor Chul-woo Jang, a high school student who already entered the Methodist Theological Seminary. He then worked part-time at the Zion Choir Choir at Camp Coiner Chapel across from Yongsan Capital High School. He helped with chores, solved lodging, and learned sheet music. This was a beautiful time that established his musical foundation and character.

When he finished the first year and went up to the second year, and the scholarship system disappeared, he needed a job. Kim Joon recalls, “I ate three meals a day for the first time.” The days of Yegreen were good at encountering different genres of music.


One of the members of the Meloton Trio joined the military and joined as a temporary member, joining the Citizens' Hall stage. A year later, when the Yegreen Band disbanded, Kim San-hyun made a celebrity with Kim Jun, and formed vocal groups with fellow members Jin Sung-man, Kim Hyun-jin, and Yang Young-il.


They liked the songs of Brothers Four and Ames Brothers, but they were heavily influenced by the Micah Miller Choir, which sang the Whistle of the Choir.


Folk singer Jeon Seok-hwan rented a practice room and struck Hammond Organ and was the man who led them. In 1962, he practiced singing along with rhythmic movements and won the year-end finals with the newly launched Dong-A Song Singer.


Not having a group's name they were named after "Juni Brothers" after Jeon Seok-hwan's nickname "Johnny" and began to dig into the public in earnest.


Choi Sang-sang Choir


In 1962, the Dongdaemun Stadium's “1st Anniversary Contest of the May 16 Revolution” was organized by MBC and was the first stage in front of the public under the official name of Johnny Brothers. The audience's honor was given to the exciting stage of the upcoming vocal group, which is called the "Valley of Yellow Flowers" and the Black Spirit.


Subsequently, the theme of the radio soap opera “Maposha Hwangbuja,” followed by the film theme “Red Mahura”, became a top-ranking group.


As Kim said, “The soap opera and film theme were in charge of most of the time,” Johnny Brothers enjoyed the golden age in his debut until 1967 with the hit parade such as 'The second daughter of the mill house' and 'Are you all the best?' .


In 1968, they appeared as a regular group of T-Sho's most popular show, Shosho Show, which was a dream to appear in 1968. The men's dance-shaping rhythms of the strong men along with the fine chords bring about Jangan's buzz, and Johnny Brothers was loved by the tough public.


Popularity was at its peak, but it hit also a musical limit. Depending on the nature of the show program rather than the choir chords, forced activities to change the team's musical composition to solo or duet due to the nature of the show did not make up the personality of the individuals and they had to stop the group for a while when the melody singer member became ill.


The team began to crack as members complained about the music industry at the time, while still focusing only on important vocals.


Kim Joon, who felt a musical conflict, suggested that 'vocal group activities won't last forever, so let's go solo and learn melody vocals to build up our skills.' But other members said, 'Our popularity is the best.' A conflict had arisen. In the end, Kim Joon-de declared to find his own color of music that he wanted to jazz since childhood when he was young rather than spending a group music activity just for popularity. The public and the broadcasters were astonished at the declaration of Johnny Brothers' dissolution in July 1968.


Afterwards, MBC strongly recommended reunions to Johnny Brothers members, who were scattered in their new jobs. MBC, who was fiercely competing with TBC for entertainment programs, tried to fight TBC with competitive Johnny Brothers members.


Under the strong pressure of the station through acquaintances, the members agreed to have a stage of recovery while retaining their jobs. After the evening, they gathered and practiced and finally staged on the December 30, 1969 MBC special broadcast with the Johnny Brothers Show.


Since the first broadcast in 1970, the group name was changed to "Echo Jean" in the name of `` Echoing the Nation '', but music activities began in earnest. It was short-lived.


In 1970, Kim Joon retired from the Astrio Hotel and received an audition from the U.S. Army for the eighth Army.


Later, Kim Joon, who was reborn as a singer-songwriter, formed a song club called “Dynamics” by Lee Baek-chun, along with Jang Woo, Park Sang-kyu and Cha Do-kyun, who appeared in the Pearl Sisters performance in 1969.


The four gathered to talk about progressive music activities, dressed as Santa Claus, blowing harmonicas, going to Myeong-dong streets, to impromptu donations to help the needy. However, the members with strong personalities stopped their club activities after the "Dynamics" performance at Namsan Drama Center in 1974. Afterwards, the two musicians, Kim Joon and Jang Woo, who were hit by musical interests, received attention due to their duet activities where they tried to popularize jazz.


Among the members of Johnny Brothers, Kim Joon-man has been purchasing music life all the time. Bass Jin Sung-man, a Catholic medical school, married Kim Ji-mi's younger sister, founded Jimmy Film in 1987, and currently runs Rovadayake Jane in Cheongdam-dong.


Kim Hyun-jin, a Korean-born foreign leader, led a construction company in Seoul with an amateur Baduk 3-dan, and high tenor Yang Young-il, who is a member of Kyung Hee University's music college, has been transformed into a MBC TV comedian after disbanding the team.


Since the creation of the Korean Jazz Club in the early 1990s, Kim has run the Jazz Café Jun in the Uijeongbu government and has been carrying out a jazz dissemination campaign with numerous jazz records and performances. 'I want to show the true image of a singer who pursues true music without competing for instant popularity', I can see the beautiful features of the free and rich pop musicians.


He was trusted by seniors and juniors as providing a beautiful bridge between the friendship of the first generation of jazz and the musical activities of junior singers."


Source: Salmon roe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60608326001


[출처: 서울신문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60608326001#csidxf5d4c0fbfa7e5388216ef862aa47c12

하늘로 떠난 별들

명복을 빕니다 블루벨즈 박일호선생님~

블루벨즈 데뷔 초기시절 멤버 사진. 사진의 맨 오른쪽이 타계한 박일호선생이다.

아침에 신문사로 부터 전화한통을 받았다.

블루벨즈의 박일호(본명 박응호)선생이 14일 오전 10시 심장마비로 세상을 뜨셨다는...

어제는 작곡가 이영훈의 부고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팠는데 슬픈 소식의 연속이다.

14일 오후 경기도 일산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별세한 블루벨스의 멤버 박일호(본명 박응호) 씨의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 영안실 2층 6호실에 마련됐다.

장례식은 한국연예예술인협회장으로 치러진다. 향년 73세.

㈔한국연예예술인협회는 "17일 오전 9시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영결식이 열리며 장례는

한국연예예술인협회장으로 치른다. 장의위원장은 협회의 석현 이사장이 맡는다"고 밝혔다.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 영안실 2층 6호실에 마련됐다. 유족으로는 아내 채문조 씨와 아들 박문성, 딸 주현ㆍ주원ㆍ선영 씨,

사위인 SBS 편성팀 강성훈 PD가 있다.

우리는 2008년 2월 14일 한국대중음악계의 보석을 두 명이나 잃었다.

이영훈과 블루벨즈의 박일호선생..

박일호 씨의 유족은 “평소 건강하셨는데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운명하셨다.

두 딸이 일본에 거주하고 있어 아직 발인일과 장지는 결정짓지 못했다.”고 밝혔다.

빈소는 서울 연건동 서울대학병원이고 유족으로는 아내 채문조씨와 아들 박문성, 딸 주현·주원·선영씨,

사위인 SBS 편성팀 강성훈 PD가 있다.

발인 17일 오전 9시. 02-2072-2027

박일호는 1958년 그룹 블루벨스를 창단해 1960년대 '즐거운 잔칫날' '명랑가족' '열두냥짜리 인생' 등으로 활동했다.

1972년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장, 1977년 한국연예협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1960년대 남성중창단 전성시대를 이끈 블루벨스는 박일호·현양·서양훈·김천악 4명은 우리 대중음악계로서는

보컬팀의 선구자라 할 만 했다. 그들은 작곡가 손석우씨의 비너스 레코드 사단출신으로 흥겹고 아름다운 남성화음으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선창' '부두' '엽전 열두냥''‘명랑가족’‘마리아 엘레나’ 등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했었다.

멤버 중 현양도 오래전에 세상을 떴으니 오리지널 멤버는 이제 2명 남았고 2기로 멤버로 들어온 장세용선생도 있다.

연합뉴스에 최초로 보도된 그의 부고 소식을 들으며 60년대 가수들도 이제 상당수

세상을 떠나고 있음을 느끼며 한 시대가 지나가고 있음을 절감했다.

지난 년말 작사가 박건호선생을 시작으로 금년만에도 작곡가 최창권 산울림 막내 김창익

그리고 작곡가 이영훈에 이어 박일호선생까지 유명 대중음악들의 줄줄이 부고소식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 정도다.

그런데 언론보도를 보니 국내 최초의 남성중창단이고 뒤이어 출범한 봉봉사중창단과 쌍벽을 이뤘다고 적혀있다.

국내 최초의 남성 중창단이란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이미 일제감정기때 수많은 장르의 대중가요 음반을 발표했던 연희사중창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실은 잊혀졌지만 최초의 수식어는 그렇게 확인없이 쉽게 붙여져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블루벨즈가 60년대 남성사중창단 전성시대의 주역이었음은 분명하다.

참조로 60년대 남성사중창단 결성 시기를 말하자면

1 블루벨즈 2 멜로톤 쿼텟 3 쟈니브라더스 4 봉봉사중창단 5 아리랑브라더스로 이어진다.

60년대 당시 블루벨즈 쟈니브라더스 봉봉사중창단의 인기는 골든 트라이앵글을 형성했을 정도.

세금을 얼마나 냈느냐를 놓고도 신경전을 벌였을 만큼 그들간의 경쟁의식은 대단했었다.

솔로가수로 활동하다 블루벨즈의 리더격이 된 박일호선생은 가수분과위원장까지 역임한 분.

저음의 미성이 돋보였고 블루벨즈의 화음은 대중가요의 격을 높혔던 수준 높은 그것이었다.

박일호 선생의 명복을 빌어본다~

Automated translation (with mistakes):

[Source: Articles provided by Seoul Newspaper]


The stars left in the sky : I wish you good luck Blue Bells


I got a phone call from the newspaper this morning. Park Il-ho (real name Park Eung-ho) of Blue Bells died of a heart attack at 10 am on the 14th ... Yesterday I heard my composer Lee Young-hoon's obituary and was sick.In the afternoon of 14th, Park Il-ho (real name Park Eung-ho), a member of Blue Bells, died of a heart attack at his home in Ilsan, Gyeonggi-do. The office is located in Room 6, 2nd floor, Seoul National University Hospital. The funeral is held by the Korean Artists Association. He was 73.


Survivors were his wife Chae Moon-jo, his son Moon-sung, his daughter Joo-hyun, Ju-won and Sun-young. His son-in-law SBS team Kang Sung-hoon is PD.

We lost two jewels from the Korean pop world on February 14, 2008.


Park Il-ho's survivor said, “He was always healthy and suddenly died of a heart attack. The two daughters are living in Japan.


Park Il-ho founded the group Blue Bells in 1958 and worked as a 'happy feast day', 'myeong family' and '12 -year life 'in the 1960s. In 1972, he served as chairman of the Korean Entertainment Association and chairman of the Korea Entertainment Association in 1977.


In the 1960s, the Blue Bells, which led the heyday of male choirs, Park Il-ho, Hyun-yang, Yang-hoon Seo, and Kim Cheon-ak were four Korean pop musicians.

It was a pioneer of a vocal group. They are from Venus Record Division of composer Son Seok-Woo.


'' The shadow of faint old love. He released a number of hit songs including 'Dock', 'Wharf', 'Twelve Matches', 'Myeong Family' and 'Maria Elena'.


Hyunyang also passed the world long ago, and there are only two original members, and Jang Se-yong, who joined the second term.


Many of the singers in the 60's are now listening to the news of his obituary first reported on Yonhap News.Feeling that we are leaving the world, we have saved that an era is passing.


Songwriter Choi Chang-kwon, the youngest composer, written by Park Gun-ho at the end of last year. Also, composer Lee Young-hoon and Park Il-ho have a hard time keeping track of famous pop music.


However, the media reports that it was the first male choir in Korea and formed a double wall with the Bongbong corps. The expression of Korea's first male choir is misleading. This was because there was a yeonhee quartet that released many popular songs and album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Of course, that was forgotten, but the first modifiers should not be so easily attached without confirmation. But it is clear that Bluebells was the star of the men's corps of the 60s.


For reference, when was the formation of the men's quartet in the 1960s?


1 Blue Bells 2 Melotone Quartet 3 Johnny Brothers 4 Singing Corps 5 Arirang Brothers.


The Blue Bells & Johnny Brothers Volunteer Singer was popular in the '60s, forming the Golden Triangle. The sense of competition between them was so great that they fought over how much they paid.


Acting as a solo singer Park Il-ho, who became the leader of the Blue Bells, served as chairman of the Singing Committee. The bass was aesthetically pleasing, and the Blue Bells chords were of a high standard, which increased the popularity of popular songs.


I pray for Mr. Park Il-ho's master suit ~


http://m.newsmaker.or.kr/news/articleView.html?idxno=4110


[박성서 평론] 데뷔 50주년 맞는 남성4중창단 쟈니브라더스 기사승인 2013.04.04 13:3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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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적 매력이 한껏 돋보이던 남성 4중창단 쟈니브라더스가 올해로 데뷔 50주년을 맞는다. 우리나라 최장(最長), 최고령(最高嶺)의 보컬 팀이다."원년 멤버 그대로 다시 모여 무대에서 열심히 땀 흘릴 각오가 되어 있다"는 이들의 평균연령은 73세. 이는 세계에서도 찾기 쉽지 않다. 우리나라 최장(最長) 최고령 보컬 팀으로 김현진(리드·76), 양영일(테너·73), 김준(본명 김산현·바리톤·72), 진성만(베이스·72)이 그 주인공들. 여전히 ‘빨간 머플러’가 썩 잘 어울릴 듯한 외모, 전성기 때 못지않은 ‘박력’에 ‘깊이’까지 갖춘 이들의 정겨운 화음은 세월을 뛰어넘어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글 l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젊음의 상징에서 실버세대들의 꿈을 전한다

▲ 35년만에 재결합한 남성4중창단 쟈니브라더스의 멤버들. 좌로부터 김준, 김현진, 진성만, 양영일씨.

남성적 매력이 한껏 돋보이던 남성 4중창단 쟈니브라더스가 올해로 데뷔 50주년을 맞았다. 우리나라 최장(最長), 최고령(最高嶺)의 보컬팀인 셈. "원년 멤버가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모여 무대에서 열심히 땀 흘릴 각오가 되어 있다"는 이들의 평균연령은 73세. 이는 세계에서도 그 유래를 찾기 쉽지 않을 듯하다. 우리나라 최장(最長) 최고령 보컬 팀으로 김현진(리드·76), 양영일(테너·73), 김준(본명 김산현·바리톤·72), 진성만(베이스·72)이 그 주인공들. 평상시에는 각자 점잖은 의상의 노신사들이지만 무대의상만큼은 반드시 밝고 화려한 색상으로 통일한다. 코디는 데뷔시절부터 의상, 액세서리를 담당해온 김준씨가 여전히 도맡고 있다. 여전히 ‘빨간 머플러’가 썩 잘 어울릴 듯한 외모, 전성기 때 못지않은 ‘박력’에 ‘깊이’까지 갖춘 이들의 정겨운 화음은 세월을 뛰어넘어 특히 중장년층들의 깊은 공감을 이끌어낼 것이다.

예그린합창단원으로 출발, 해체 후 쟈니브라더스 결성 이들의 첫 결성 당시 상황은 어떠했을까, 데뷔 후 쉬지 않고 현재까지도 계속 음악활동을 해오고 있는 멤버 김준씨를 먼저 찾아보았다.‘Old is New'라는 문구와 함께 ‘시작은 그 끝과의 약속이다.’라는 어귀가 먼저 눈에 띄는 남양주에 위치한 ‘김준 재즈클럽‘. 이 곳에는 ’재즈계의 신사‘라 불리는 김준씨가 늘 삽화처럼 피아노를 치며 노래하고 있다. “재즈는 여백이 많은 음악입니다. 불협화음을 화음화하는 데 묘미가 있지요. 악보에 없는 음을 표현하는 즉흥적인 호흡이 생명입니다.” 재즈는 연습을 게을리 하면 그걸로 끝장이라고 말하는 김준씨. 때문에 그는 활발한 공연과 더불어 매년 한두 장 이상의 음반을 꾸준히 발표해오고 있다. ‘하루 연습 안 하면 내가 알고 이틀 안 하면 남이 알고, 사흘 안 하면 무대에서 떠나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재즈에 몰두하는 김준 클럽에는 필자가 시간 날 때마다 드나들었지만 불과 두세 번 정도를 빼면 손님이 단 한명도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 스스로 강조하듯 ‘돈 안 되는 일’에 매달려 온지 40여 년째다. 1960년 경희대 음대 장학생으로 입학했던 김준. 대학생활이 시작되자마자 4.19를 맞아 잦은 휴강과 함께 결국 휴교령이 내려졌다. 갈 곳이 없었던 그는 종로2가 ‘뉴월드’음악감상실 DJ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함과 동시에 당시 50인조로 구성된 교회 성가대 ‘시온성가단(단장 이동일)’의 일원이 된다. 아울러 이 무렵 당시 4인조 쿼텟 ‘멜로톤‘의 멤버 한 명이 입대해 결원이 생기자, 대타로 참여해 잠시 활동하기도 했다. 1961년 5월16일, 라디오에서 새벽을 가르는 군가연주와 ‘혁명공약’을 낭독하는 아나운서의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학교는 4.19에 이어 다시 휴교령이 내려졌다. 학교 정문 앞에는 엄청난 포신을 자랑하듯 탱크가 버티고 있었고 이른바 ‘혁명군’들이 10m 간격으로 서서 삼엄한 경비를 펴고 있었다. 그리고 2학기 수강신청을 끝내고 정상수업이 시작되던 어느 날, 그는 한 방문객과 마주친다. 그리고 이내 지프차에 실려 미아리고개에 있는 군부대 막사로 이송된다. 그 곳엔 이미 예닐곱 명이 먼저 와서 초조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 중 한명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예술 중흥을 위해 엄격한 자격심사를 거쳐 새로 창단하는 ’예그린가무단‘의 합창단원으로 입회시키겠다’고 했다. 사실상 일방적인 통고에 가까웠던 이 예그린의 단장은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혁명 주체 세력’ 김종필씨였다.

‘단복은 계절에 따라 무상 제공’ ‘출연료 파격 대우’ ‘향후 무대 활동 보장’ 등이 그들이 내건 조건이었다. 이 예그린합창단의 월급은 당시 돈으로 무려 ‘오천원’ 정도였기 때문에 기성가수나 교직에 몸담은 실력자들까지 앞 다투어 응시, 경쟁이 치열했던 터라 그로썬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부푼 꿈을 안고 시작된 예그린, 그는 창작 뮤지컬 ‘한 여름 밤의 꿈’에 단역으로 출연하는 등 활동을 시작했으나 1년 후 예그린은 해산되고 만다. 때문에 합창단 중 막내이자 가장 ‘끼’가 많았던 동갑내기들, 즉 김준, 양영일, 장호성, 진성만은 4중창단을 결성한다. 아울러 이들은 당시 mbc 톱싱거 경연대회, 동아방송 연말 중창단경연대회 등을 잇달아 휩쓸며 무서운 신예로 급부상했다. 예그린은 당시 악보 보는 것을 시작으로 연기, 춤까지 그야말로 만능 엔터테이너를 요구했던 만큼 이들 네 명의 실력은 이미 탄탄한 기본기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면적이었던 TV 쇼를 입체적으로 바꾼 ‘버라이어티’의 주인공들

▲ 2007년, 35만에 원년 멤버 그대로 재결성 ‘돌아온 쟈니브라더스’

특히 춤과 연기 실력은 물론 탄탄한 기본기를 갖추어야만 활동이 가능했던 당시 ‘예그린악단’. 이 악단의 합창단원 출신답게 춤과 연기 실력으로 완전무장한 쟈니브라더스의 등장으로 당시 평면적이었던 TV 쇼가 놀랍도록 화려하고 입체적으로 변신했다. 그야말로 ‘버라이어티’라는 용어를 대중화시킨 주인공인 셈이다. 아울러 당시 MC 후라이보이 곽규석과 꽁트까지 소화했던 ‘뿅망치의 원조’이기도 하다. 쇼 프로그램에서의 절대적인 인기 못지않게 이들은 ‘방앗간 집 둘째딸’ ‘아나 농부야’ ‘마포 사는 황부자’ 등에 이어 ‘빨간 마후라’ ‘수평선’까지 공전의 히트를 날리며 정상의 인기그룹으로 급부상했다. 당시 멤버는 김산현(김준)을 비롯해 김현진, 양영일, 진성만. 이들의 힘차고 경쾌한 하모니는 듣는 이들에게 '알파파'(※마음이 평온해질 때 나오는 뇌파)가 샘솟게 만드는 노래, 그 자체였다. 이들의 음악적 실력은 대표곡인 ‘빨간 마후라’ 취입과정에서도 잘 나타난다. 63년 초여름. 이 영화 제작사인 신필름 측은 작곡가 황문평씨에게 주제가 작곡을 의뢰해온다. 아울러 이 영화주제가는 파일럿들이 첫 출격할 때 불러야하는데 하필 오늘 OO기지 비행장을 빌려 촬영하는 날짜라 오늘 중으로 만들어 달라고 독촉을 해왔다. 가사를 받아 쥔 황문평씨는 노래 구상은 물론 동시에 노래를 불러줄 가수부터 찾아야 할 형편이었으므로 급한 대로 당시 동아방송 강수향 음악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때 마침 방송국에 쟈니브라더스가 나와 있다는 것을 알고 황씨는 곧바로 악상의 뼈대를 잡고 방송국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멜로디를 다듬었다. 주제가를 의뢰받은 뒤 불과 몇 시간 만에 작곡을 했고 두서너 번의 연습 끝에 ‘빨간 마후라’는 쟈니브라더스에 의해 취입된 것이다. 쟈니브라더스의 넷 모두는 악보만으로도 곧 바로 노래가 가능한 말하자면 ‘초견독보(初見讀譜)’의 실력자들이었다. 이렇게 급조된 ‘빨간 마후라’였지만 이제는 어느덧 대표적인 공군가로 자리했다. 또한 아시아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비롯, 상을 휩쓴 이 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수출되면서 특히 대만에서도 이 노래가 대만 공군가로 불려지고 있는데 심지어 아직까지도 대다수의 대만국민들은 이 노래가 자국의 군가로 알고 있을 정도다.

쇼쇼쇼’통해 ‘자니브라더스 고별쇼’, ‘메아리진’으로 개명

▲ MBC 제2회 톱싱거경연대회에 출연했던 당시의 쟈니브라더스, 1963년.

이들은 당시 꿈의 무대였던 워커힐에 전속되며 통행금지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마치 한 몸 인양 ‘사인일각(四人一脚)’을 이뤄 바쁘게 활동,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인기가 높아갈수록 멤버들은 되레 심각한 고민에 빠져든다. 음악적인 불만족에서 오는 갈증이었다. 4중창단은 4성, 즉 네 화음이 모여 노래가 구성되어야 하는데 당시에는 ‘유니 송’으로 불러달라는 주문까지 받아야 했던 만큼 중창단이라는 의미가 무색하던 시절이었다. 중창단의 인기에 비례해 본인만의 개성은 죽여야 하는, 이른바 개개인의 능력을 제대로 드러내 보일 여지가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점차 이들은 각자 솔리스트로써의 기량을 쌓아나가며 해체 수순을 밟기 시작한다. “한사람, 한사람만으로도 무대가 꽉 차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때문에 쟈니브라더스는 TV와 워커힐 무대 등에서 화려한 스테이지와 함께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면서도 쇼 중간 중간 쉬는 시간을 이용해 각자 솔리스트로서의 기량을 키우기 위해 경쟁적으로 각자 연습무대에 나섰던 장면들이 생각납니다.” 당시 워커힐악단에서 키타리스트로 활동하며 ‘저녁한때 목장풍경’ ‘비둘기집’ 등의 작곡가로 명성을 날리던 김기웅씨의 회고다. 그는 당시 이들의 레퍼토리 편곡을 기꺼이 도맡아 주기도 했다. 결국 68년 8월, 그룹보다 각자 솔로로 활동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린 이들은 마침내 TBC-TV ‘쇼쇼쇼’를 통해 ‘자니브라더스 고별쇼’를 갖는다. 솔리스트로의 변신을 위해 피아노 독주부터 빅밴드 곡에 이르기까지 1백여 곡을 준비해오며 ‘스타일리스트(Stylist)'를 꿈꾸던 김준씨가 멤버 중 가장 먼저 독립, 솔로활동을 시작한다. 69년 11월, 평소 즐겨 부르던 레퍼토리들을 모아 독집음반 ’김준과 톱송(Top Song)'을 발표한 것. 스탠더드 팝과 재즈의 번안곡이 주를 이룬 이 음반의 수록 곡들은 지금까지도 김준씨의 변함없는 애창곡들이다. 그러나 자니브라더스는 주위의 권유에 의해 또다시 재결성하게 된다. 이들의 재결합을 가장 적극적으로 권유했던 사람이 바로 당시 서울신문사 발행인이던 장태화 사장. 음악애호가이기도 했던 장사장은 이들의 재능을 아까워하던 끝에 직접 그룹명을 ‘메아리진(’전국에 메아리 친다’는 뜻의 순수 우리말)‘으로 개명해준 뒤 70년 1월11일 mbc-TV ‘메아리진쇼전우중 PD)’를 통해 컴백, 매주 30분씩 브라운관을 화려하게 장식, 음악성과 예술성 있는 인상적인 프로그램을 한동안 펼쳐 보이기도 했다. 이들은 당시 중창단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제각각 부업전선에 나선 후 이어 72년, 을지로 4가에 ‘메아리진’이라는 음악 살롱을 차려 경제적 타개책을 적극 모색하지만 이러한 ’인기‘도 그들 개개인의 ‘끼’와 ‘욕구’를 막기엔 역부족, 1년이 채 못돼 하나둘씩 각자의 길로 흩어진다. 결국 최정상에서 이들은 완전히 해체하고 만 것. 이들이 마지막으로 함께 섰던 무대는 73년 1월, 당시 TBC '쇼쇼쇼(PD 황정태)‘ 4백회 특집프로그램이었다.

2007년, 35만에 원년 멤버 그대로 재결성 ‘돌아온 쟈니브라더스’

▲ 가수 김상국과 함께 국군의 날 특집방송에 출연한 쟈니브라더스, 1965년.

이로부터 35년 뒤인 2007년 3월 12일, 이들은 KBS '가요무대, 돌아온 쟈니브라더스편'을 통해 공식적으로 재결합, 컴백을 선언했다. 오랜만에 똑같은 의상으로 통일한 이들은 당시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비록 그동안 제각각의 길을 걸어왔지만 늘 음악과 함께 해왔기에 이 번 재결성은 매우 자연스레 이루어진 일’이라고. 실제로 멤버 중 바리톤 파트의 김준씨는 그룹 해체 후 싱어 송 라이터로 변신, 솔로가수로 그리고 작곡가로도 재능을 한껏 발휘하며 현재까지도 매년 음반을 발표해왔다. 그가 작곡한 노래들을 살펴보면 ‘사랑하니까’(패티김)을 비롯해 84년 TBC 세계가요제 금상 수상곡 ‘나 이제 여기에(박경희)’, ‘내 마음은 풍선(장미화)’, ‘그래도 설마하고(임희숙)’, ‘Blue Smile(이미배)', 그리고 김준 자신의 목소리로 발표한 ‘휘파람 하이킹’ ‘여보소 날보소’ '태양의 데이트(김준 작사, 김학송 작곡)' 등. 그는 70년도부터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음반을 발표하지 않은 해가 없을 정도로 ‘음악의 생활화’, 그 일관된 삶을 지켜왔다. 또한 1980년에 'International JUN Free Art'를 설립한데 이어 K.J.C(한국재즈모임)의 창립회장을 맡았기도 하는 등 재즈 활동을 위해 힘을 바쳐왔다. 아울러 주위동료들의 신명을 도와주며 앞장서왔던 그는 현재, 남양주에서 부인 김미자 여사와 함께 ‘김준재즈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지난 해 12월, 재즈처럼 자유스럽고 심오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과 음악이야기를 담은 자서전 ‘김준 재즈이야기(포이즌 발행)‘를 출간했다. 멜로디 파트의 김현진씨는 그간 보험일을 거쳐 현재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본인이 이끄는 ‘울바우 남성합창단’과 더불어 매년 정기공연을 해왔다. 또한 ‘빈대떡 신사’의 작곡자인 양원배씨의 차남으로 경희대 음대 출신이기도 한 테너 양영일씨는 지난 23년 간 음악교사로 재직해왔다. 그런가하면 동아방송 성우 1기생이기도 한 베이스 진성만씨는 영화배우 김지미씨의 여동생 김지애씨와 결혼, 지미필름 대표를 거쳐 현재는 요식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렇듯 이들은 쟈니브라더스를 떠나서도 여전히 현역들이다. ‘쟈니브라더스’라는 이름으로 함께 무대에 서는 것이 오랜 꿈이었다는 이들은 수시로 모여 호흡을 고르고 화음을 맞추고 있다. 이전까지는 멜로디 위주의 유니송(Unison)을 주로 발표해왔지만 이제부터는 하모니 위주의 4성, 즉 네 화음을 조화시켜 남성4중창단으로써의 매력을 한껏 펼칠 예정. 클래식과 교회음악에서 출발한 이들이 들려줄 주 레퍼토리는 역시 올드 팬들에게 친숙한 ‘올드송’들, 즉 ‘메모리’다. 자신들의 히트곡은 물론 민요에서 올드 팝까지 폭넓게 소화하고 있고 있다. 사람이 지니고 있는 것 중 가장 늦게까지 변하지 않는 것이 바로 목소리라 했던가. 이들의 전성기가 남성적인 매력이 물씬 풍기는 젊음의 상징이었다면 이들의 재결합된 쟈니브라더스는 바로 실버세대의 꿈이자 희망이 되어줄 것으로 기대해본다.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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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ny Brothers celebrates 50th anniversary of debut


Johnny Brothers, the men's four-member choir, has their 50th anniversary debut this year. It is the longest and oldest vocal team in Korea. The average age of the members is 73 years old. This is not easy to find in the world. The longest old vocal teams in Korea are Kim Hyun-jin (lead 76), Yang Young-il (tenor 73), Kim Joon (real name Kim San-hyun and baritone 72) and Jin Sung-man (base 72). Still, the red muffler looks so good and the harmonious chords of those who are as deep as their peak power and depth are still around us.


Written by Park Sung-seo (popular critic, journalist)


Communicating the Silver Generations' Dreams as a Symbol of Youth



Members of the men's quartet Johnny Brothers who reunited after 35 years. From the left, Kim Jun, Kim Hyun Jin, Jin Sung Man, and Yang Young Il.


Normally they are old gentlemen of decent costumes, but the stage costumes must be unified in bright and colorful colors. Cody is still in charge of Kim Jun, who has been in charge of costumes and accessories since his debut. Still, the red muffler looks so well suited, and the heartwarming chords of the 'force' that is as good as in the heyday are going to go deeper and deeper, especially for the elderly.


Departed as a member of the Ye Green Choir and formed after disbanding Johnny Brothers.


What was the situation at the time of their first formation? I looked for the member Kim Joon, who has been doing music activities since his debut without rest.First, with the phrase 'Old is New', 'Start is a promise to the end.' The Kim Joon Jazz Club is located in Namyangju where the entrance is noticeable. In this place, Kim Joon, called a gentleman of the jazz world, always sings and plays the piano like an illustration.


“Jazz is music with a lot of space. It's great to harmonize dissonance. Life is improvised breathing that expresses notes not in the score. ”Jazz says that if he neglects practice, he ends with it. As a result, he has been steadily releasing more than one or two albums every year. I've been to Jazz Club every time I have time, so I have to say, 'If I don't practice one day, I know others if I don't have two days, and if I don't have three days,' I leave the stage. There were many cases. As he emphasized, he has been hanging on “no money” for over 40 years.


Kim Joon was enrolled as a scholarship student at Kyung Hee University in 1960. As soon as college life began, it was marked 4.19, with frequent school closings, and finally a school leave. Having no place to go, he became a member of the 50-member church choir, Zion Choir (Director Lee Dong-il), while Jongno 2 started working part-time as a DJ of the New World Music Room. At the same time, a member of the four-member Quartet "Melton" enlisted and was vacant, so he participated as a batter and worked for a while.


On May 16, 1961, he woke up to the sound of a martial artist playing at dawn on the radio and an announcer reading the "Pledge of Revolution." The school was closed again after 4.19. In front of the school gate, the tank was holding up like a huge barrel, and the so-called "revolutionary forces" stood at 10m intervals and made a strict guard. One day after he finished his second semester course and started his normal class, he meets a visitor. Soon they are taken to a jeep and transported to a military barracks in Miarigo. There were already six or seven people coming first, making their faces nervous. Soon after, one of them said, “We will join the choir of“ Yegrin Gamudan ”, which is newly established after strict screening for artistic revival at the national level. In fact, the leader of Yegrin, who was close to a one-sided notice, was Kim Jong-pil, a revolutionary force who said, "(I not only drop bombs:) I also drop birds."


The conditions they offered were "uniforms provided free of charge depending on the season," "treatment of fees," and "guaranteed future stage activities." The salary of the Yegreene Choir was about 5,000 won at the time, so there was no reason to reject Groshon because the competition was so intense that staring singers and talented people who were teaching. Yegrin, who started with a bloated dream, started out as a minor role in the creative musical "A Midsummer Night's Dream", but a year later, Yegrin was dismissed. For this reason, the youngest members of the choir and their most “kicking”, namely Kim Joon, Yang Young-il, Jang Ho-sung and Jin Sung-man, formed a four-member choir. At the same time, they swept through the MBC Topsinger Contest and Dong-A Broadcasting Year-end Choir Contest. Yegrin, who began to look at the score, acted and danced, demanded a versatile entertainer, so these four were already equipped with solid basic skills.


The protagonists of Variety who changed the flat TV show in three dimensions


In particular, the “Yegreen Orchestra” was a time when dance and acting skills as well as activities were possible only with solid basic skills. With the appearance of Johnny Brothers, fully armed with dance and acting skills, as a member of the choir of the orchestra, the TV show, which was flat at the time, was transformed into an amazingly colorful and three-dimensional appearance. It is the main character who popularized the term variety. It is also the origin of the hammer, which was used by MC Fryboy Kwak Kyu-seok and Gott.


As much as the absolute popularity of the show program, they have emerged as a top-ranking group, hitting all-time hits such as 'The Mill's second daughter,' 'Ana Farmer,' 'Mapo's Hwangbuja', and 'Red Mapura' and 'Horizon'. At that time, members included Kim San-hyun (Kim Joon), Kim Hyun-jin, Yang Young-il, and Jin Sung-man. Their energetic and cheerful harmony was the song that caused the alpha waves to come to their listeners.


Their musical abilities are well represented in the process of ingesting the representative song "Red Mafura". Early summer 63. The film's producer, Shinfilm, has asked the composer Hwang Moon-pyeong to compose a theme song. In addition, the film's theme should be called when pilots first sortie. Hwang Moon-pyeong, who took the lyrics, was able to find a singer who could not only devise a song but also sing a song at the same time. When Hwang finally found out that Johnny Brothers was on the station, Hwang grabbed the core of the band and made the melody in the taxi to the station. It was composed only a few hours after being asked for a theme song, and after a couple of practice sessions, "Red Mafura" was blown up by Johnny Brothers. All four of Johnny Brothers were able to sing it as soon as they could with the score.


Although it was such an urgent “red mahura,” he is now a representative air force. In addition, as the film, which won the director's award at the Asian Film Festival, was exported all over the world, especially in Taiwan, the song has been associated with Taiwanese air force. The show was renamed Johnny Brothers' farewell show and echoes.


Johnny Brothers were at the MBC 2nd Topsinger Contest in 1963.


They were dedicated to Walkerhill, which was the stage of dreams at that time, and spent their time excluding the curfew.


However, as the popularity grows, members get into serious trouble. It was a thirst from musical dissatisfaction. The four-member choir had to be composed of four stars, or four chords, and at the time, the meaning of the choir was so plain that it had to be ordered to be called "Uni Song." In proportion to the popularity of the choir, his own personality had relatively little room to reveal the so-called individual's ability to kill. Gradually, each of them builds their skills as a soloist and begins to proceed with the dismantling process.


“One person, one person, filled the stage. That's why Johnny Brothers has been competing on the stage to compete as a soloist, using the breaks in the middle of the show, while gaining popularity with spectacular stages on TV and Walkerhill. ”


Kim Ki-woong, who worked as a guitarist at the Walkerhill Orchestra, was known for his composers such as `` Dinner Ranch at Night '' and `` Pigeon House. '' He was also willing to take care of their repertoire arrangements at that time.


Eventually, in August '68, they concluded that it would be better to go solo than the group, and finally have the Johnny Brothers Farewell Show on TBC-TV. To transform himself into a soloist, Kim Joon, who dreamed of becoming a stylist, has prepared more than 100 songs from piano solos to big band songs. In November '69, he sang his favorite repertoire and released his solo album, Kim Joon and Top Song. The album's tracks, which consisted of standard pops and jazz alterations, are still his favorite songs.

But Johnny Brothers is reunited by the invitation around him. Jang Tae-hwa, the publisher of the Seoul newspaper, was the one who most actively invited them to reun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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