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파 - Lee Eun-Pa


This is a CD from the 23CD box:


유성기로 듣던 불멸의 명가수: 이은파 편 (vol.11) /

Immortal Singer Heard during the Meteor Period: Lee Eun-pa, Vol. 11

1 관서천리(關西千里) / Kwanseocheon-ri (Chisato Kansai) (1935) (OKEH 1793)

2 지는 석양(夕陽) / Sunset (OKEH 1793)

3 압강물 흘러 흘러 / Flowing down the river (OKEH 1796)

* 4 채란새 / Yellow Egg (OKEH 1914)

5 강(江) 넘어 천리(千里)길 / Cheonri-gil road beyond the river (OKEH 1914)

* 6 안달이 나요 / I'm frustrated (OKEH 1925)

7 여자된 허물 / Woman's Sludge (OKEH 1962)

* 8 남천(南川) 처녀(處女) / Namcheon Maiden (OKEH 12043) -jazz influence-

* 9 사리랑 동동 / Sarirang Dongdong (OKEH 12055) -jazz/Korean folk-

10 요핑게 조핑게 / Yoping Crab (OKEH 12062)

11 큰애기 행진곡(行進曲) / The Big Baby Parade (OKEH 12085)

* 12 물레방아 / Watermill (OKEH 12096) -jazz influence-

13 에헤라 춘풍(春風) / Ehera Spring Wind (OKEH 12104) -jazz influence/Korean folk-

14 미운 정(情) 고운 정(情) / Ugly affection (OKEH 12124)

15 풋난봉 / Funanbong (?) (OKEH 12141)

16 꽃피는 포구(浦口) / Flowering muzzle (Uraguzzi) (OKEH 12147) -accordion intro/folk-

17 덩더궁 타령(打鈴) / Tengdeokgung Taryeong (OKEH 12178)

18 쌍도라지 고개 / double bellflower (OKEH 12128)

19 파랑치마 / Blue Skirt (OKEH 12260)

20 사랑 낭군(郎君) / Love Nanggun (OKEH 12260)

Tracks with * I consider essential listens or classics, or tracks not to miss to check out. They are of course also very suitable for western radioshow airplay.


Guidelines written down for the Psychefolk radioshow:


"This is another nice and talented voice from the thirties/forties.


The first 3rd of tracks listen very well when played loud. It shows us subtle high voice of singing. The first few tracks reveal something of Korean rhythms, a celebrative marching group, instruments like picking guitar, flutes or clarinet or violin and percussion with singing. A bit more emotional singing can be heard on track 4, accompanied by slide acoustic guitar, bass and such.


At times (track 6,7), it again then sounds slightly more Japanese. Then comes the influence of 30s jazz (track 8-10), brilliantly mixed with Korean old/new folk too, I also hear Hawaiian guitar, violin and of course Korean rhythms.


Track 11 is a waltz with acoustic rhythms, violins and some slide guitar, with a rather Japanese melody on top.

Track 12 shows a happy rhythmical song, nicely arranged beautifully with a wide variety of orchestral and jazz instruments, playing closely as entity.

The next few tracks continue in between new folk sounds from eastern origin (Japanese/Korean) while adapting a less or stronger influence of jazz, a few times being more traditional (15).

Track 16 starts with an accordion lead intro with water splashing piano accents, and an original Japanese kind of slow waving dance singing.

The next few tracks are more recognisable Korean ? trot with a smaller or slightly increased jazz influence."


Other albums with tracks:


30년대 신민요 Victor Gramophone series Pork Song

13 베짜는 처녀 / Weaving virgin


I assume this is a Korean folk song, accompanied subtly with often none and then somewhat humpapa-like rhythms.

유성기로 듣던 가요사 (1925~1945) [Disc 3]

* 5 정한의 밤차 / Jeonghan Night Tea (1935) -with spoken words & train whistle (movie)-

with 박세홍, Park Se Hong & 신은봉 / Shin Eun-Bong

* 7 관서(關西) 천리(千里) / Kansai Temple (1935)

8 앞강물 흘러흘러 / Flowing the front river (1935)

* 9 돈바람 분다 / Valid Wind Blows (1935)

"Jeonghan Night Tea" is an emotionally sung and Japanese-sounding song with voice (two different voices, one by one) with whistle blows and subtle background (piano,..), with some spoken word parts. I assume this could have been used in a movie, and I assume it must have been. A sure favourite track of mine is "Kansai Temple”, a folk traditional with dominant Korean rhythms and rhythmic accents, accompaniment by flutes, clarinet, and traditional rhythm instruments. Certain accents are provides by a bit of extra brass. Also “Flowing the front river” sounds like Korean Folk song, solos with clarinet and rhythms, it is not as much distinctive. “Valid Wind Blows” is a duet song which blends (Korean) folk with flavors of almost ragtime jazz.

유성기로 듣던 가요사 (1925~1945) [Disc 4]

* 4 풍년(豊年)송 / Pungnyeon Song

* 5 덩덕궁타령(打令) / Dungdeokgung Taryeong (1939)

* 9 천리춘색(千里春色) / Chun Lichun Color (1937)

11 요핑계 조핑계 / Jopping System (1937)


“Pungnyeon Song” is duet (with extra backing vocals) of Korean Folk and extra accents of jazz nature. Also “Dungdeokgung Taryeong” is a folk traditional. Leu Eun-Pa’s voice comes out even better with subtle skillful variations in her voice (something which luckily was preserved in songs like this). Also here the band plays small jazz parts, old time music flavours in respect to the traditional parts which have its whole full play. The track is especially a good example of the skills of Lee Eun-Pa’s singing. “Chun Lichin Colour” sadly has more surface noice, but sounds good as well into the folk traditional style. I assume it is a song imitating a bird rhythmical singing (“cuckoo cuckoo”), which is a very original idea making it a classic song to remember. Some of the arranged rhythms at times remind me of a whistling train. Also the last track, “Jopping System” fits in the same sort of style of Korean Folk (with extra small parts of accents with piano and Hawaiian guitar, ..), also sadly it is with lots of surface noice in the recording, its track still proves its importance and distinctive qual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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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GRAPHIES:

The birth and birth place of her are unknown, but she died around 1939, before 08.15.

In the early 1930s, Lee Eunpa wrote the lyrics of Kimneung-in and Mun-wol-wol, ``Front River'' amongst many more so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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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년대와 출생지는 알수 없으며 사망년대는 1939년경이라는 설이 있다. 아무튼 8.15광복이전에 사망한것만은 틀림 없다.

리은파는 1930년대초에 김릉인 작사, 문호월 작곡인 《앞강물》을 취입하였다. 그리고 김릉인 작사, 김해송(김송규)작곡인 《안달이 나요》와 박영호 작사, 문호월 작곡인 《남천처녀》, 박영호 작사, 손목인 작곡인 《녀자된 허물》, 박영호 작사, 박시춘 작곡인 《큰애기행진곡》, 리노홍(리부풍) 작사, 문호월 작곡인 《에헤라 춘풍》, 민정식 작사, 문호월 작곡인 《물레방아》, 조령출(조명암) 작사, 손목인 작곡인 《꽃피는 포구》, 박영호 작사, 문호월 작곡인 《덩덕궁타령》, 조령출(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들인 《쌍도라지고개》, 《파랑치마》, 조령출(조명암) 작사, 김룡환(김영파) 작곡인 《사랑랑군》 등 많은 노래들을 음판에 취입하여 유산을 남겨놓았다.

http://www.nongaek.com/news/articleView.html?idxno=51703:

[논객닷컴=이동순] 지난 시기 민족사의 험한 세월은 사랑하는 가족이 함께 한곳에서 편안히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식민지가 그러했고, 좌우익 이념갈등시기도 그러했습니다.여러 해 전 쫓기듯 도망치듯 집을 나간 낭군이 어느 날 밤 불현듯 돌아온 정황을 짐짓 떠올려봅니다. 몇 해만에 돌아온 집이지만 이웃에게 알려지는 것이 두려운 낭군은 주변을 흘끔거리며 불안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워낙 수상한 시절이라 아내는 먼저 대문부터 꼭꼭 닫아걸고 이웃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주변을 빈틈없이 단속합니다. 오후부터 잔뜩 찌푸리던 하늘이 기어이 밤비를 뿌릴 무렵, 아내는 그제야 조용히 방안에 들어와 낭군 앞에 앉아봅니다.그윽한 눈으로 살펴보고 볼을 쓰다듬으며 서로를 어루만지는 그 기막힌 상봉의 시간을 과연 어떤 필설(筆舌)로 표현할 수 있으리오. 젊은 낭군은 말없이 아내를 으스러지도록 가슴에 지그시 껴안았다가 희미한 불빛에 다시 몇 번이고 각시 얼굴을 들여다보며 손바닥으로 볼을 쓰다듬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가슴 속에 쌓였던 깊은 한이 봄을 맞은 빙하처럼 하염없이 주르르 흘러내립니다. 가시버시는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야속하기만 합니다.밤은 점점 깊어가지만 부부는 상봉의 시간이 아까워서 도무지 잠자리에 들 수가 없습니다. 새벽닭이 울기 전, 낭군은 다시 먼 길을 서둘러 떠나야만 했기 때문이지요. 아내는 낭군께 잠시라도 눈을 붙이라고 권해봅니다. 하지만 낭군은 몇 해만에 만난 사랑하는 아내를 옆에 두고 어찌 잠을 잘 수가 있었을까요. 굴곡도 사연도 많았던 우리현대사에서 이 같은 극적인 장면은 얼마나 많이 빚어졌던 것일까요.바로 이런 기막힌 아픔과 서러움을 애타는 절창으로 담아낸 노래 하나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민요가수 이은파(李銀波, 1917~?)의 '앞 강물 흘러 흘러'입니다. 그 노래는 마치 가슴을 애잔하게 적시는 가을달밤의 창백한 느낌으로 우리 귓전에 아련히 다가옵니다. 가수의 이름 ‘은파’처럼 달빛의 은물결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다시 스르르 쓸려나가는 그런 애처로운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앞 강물 흘러 흘러 넘치는 물로도 떠나는 당신 길을 막을 수 없거늘 이 내 몸 흘리는 두 줄기 눈물이 어떻게 당신을 막으리오

궂은비 흐득이니 내 눈물방울 밤빛은 적막하다 당신의 슬픔 한 많은 이 밤을 새우지 마오 날 새면 이별을 어이하리

홍상을 거듬거듬 님 앞에 와서 불빛에 당신 얼굴 보고 또 보면서 영화로 오실 날을 비옵는 내 마음 대장부 어떻게 믿으리까

밤새 비가 많이 내려 앞강물이 엄청나게 많은 수량으로 불어나서 길 떠날 낭군의 발걸음을 막을 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내는 혼자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그런데 다시 가사의 첫 대목을 찬찬히 음미해보노라면 그 넘치는 앞 강물은 단지 평범한 강물이 아니라 두 사람의 오랜 이별 동안 가슴에 켜켜이 쌓이고 쌓인 사랑과 그리움, 고독과 한탄, 원망과 눈물 따위의 혼합적 구조물로 여겨집니다. 기막힌 상봉의 자리에서 흘리는 눈물의 분량은 앞 강물이나 홍수보다도 한층 더 많은 분량임을 은근히 전해주고 있습니다. 새벽에 떠나고 나면 다시 기약 없는 오랜 이별의 시간으로 이어집니다. 아내는 그것이 애가 타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주저하는 걸음으로 멈칫멈칫 낭군 앞에 다가와서 희미한 호롱불빛에 드러나는 낭군의 얼굴을 흥건한 눈물에 젖은 눈으로 보고 또 보곤 합니다.

이 절절한 페이소스가 담긴 노랫말을 만든 이는 황해도 출신의 작사가 김능인(金陵人, 1911~1937)입니다. 작곡은 진주 출신의 작곡가 문호월(文湖月, 1908~1952)이 맡았지요. 두 분 모두 전국을 다니며 민요발굴과 채록 및 정리에 오랜 경험을 가진 분이었고, 그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민족적 가락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가지며 신민요 장르의 정착과 발전에 헌신했던 시간들은 참으로 고귀합니다. 이 ‘앞 강물 흘러 흘러’는 오케레코드사에서 제작 발표된 가수 이은파의 가장 우뚝한 대표곡일 뿐만 아니라, 1930년대 중반을 대표하는 노래이기도 했습니다.

가수 이은파가 이 노래를 부르게 된 계기는 무엇보다도 작곡가 문호월과의 특별한 인연 때문입니다. 문호월이 관서지방을 돌며 민요수집을 하다가 진남포 지역의 여관에서 잠시 머물던 날, 그곳 권번의 한 기생이 찾아와 가수가 되고 싶다는 고백을 털어놓았습니다. 문호월은 즉석에서 오디션을 보았는데 소리의 여운과 울림이 꽤나 좋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서울로 한번 찾아오라며 주소를 적어주었는데, 그로부터 얼마 뒤 그 기생은 과연 문호월을 찾아왔습니다. 그녀가 바로 이은파였다고 합니다. 문호월은 이은파를 위해 여러 곡의 신민요 작품을 작곡해서 열심히 연습을 시키고 음반을 취입하도록 주선했었는데, 이 과정에서 둘은 기어이 사랑에 빠져 동거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과정을 유추해보면 원래 기생으로서의 이름이 따로 있었을 터이지만 가요계에 데뷔하게 되면서 ‘은파’라는 예명을 애인 문호월이 지어주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해보게 됩니다.

이은파의 출생은 정확하게 알려진 자료가 없습니다. 그러나 1939년 잡지 '삼천리' 기사에서 방년 스물둘이라 했고, 오케에 데뷔한 지 4년이라 한 것으로 짐작해보면 1917년생으로 추정이 됩니다. 극작가이자 작사가였던 이서구(李瑞求, 1899~1981) 선생의 글에서 평안남도 진남포(鎭南浦)에서 권번기생으로 활동하다가 빅타레코드사 직원에게 발탁되어 가수의 길을 걷게 되었고, 빅타에서 오케레코드로 소속을 옮긴 것으로 확인됩니다. 평양기생학교에서 수업을 받아서 진남포권번으로 진출한 것을 보면 이은파의 출생지도 필시 관서지방의 어느 한 곳이 아닐까 합니다.

930년대 초반, 서울에 설립된 여러 레코드회사에서는 무엇보다도 여성가수를 구할 길이 막연했습니다. 그 누구도 가수되기를 꺼려했기 때문이지요. 그만큼 가수를 풍각쟁이라며 천시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여건 속에서 가장 만만하게 찾아가 가수후보를 물색했던 곳이 바로 기생들의 합숙소인 권번이었습니다. 이런 과정으로 선발된 가수가 왕수복, 선우일선, 이은파, 박부용, 김복희, 김인숙, 한정옥, 미스코리아(모란봉), 김운선, 왕조선, 김연월, 김춘홍, 이화자 등입니다. 신분이 기생이었던지라 당연히 춤과 민요가창에 익숙했을 터였고, 이를 바탕으로 전통적 가락을 십분 활용하는 노래를 창작해서 부르게 했으니 그게 바로 신민요였던 것입니다.

여러 가수들이 신민요를 취입했지만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발군의 실력으로 대중들의 폭발적 반응을 이끌어낸 가수가 있었으니 그들은 왕수복, 선우일선, 이은파 등 세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이들 3인을 ‘신민요의 트리오’라 불렀습니다. 듣는 사람마다 가수에 대한 취향이 다를 수 있겠지만 이은파의 노래는 가히 신민요의 여왕이라 부를 수가 있을 정도로 당시 대중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았습니다.

1934년 5월, 빅타레코드사에서 '봄거리', '야속한 꿈길' 등 두곡을 발표하며 데뷔한 이래로 이은파는 약 100여곡 가량의 가요작품을 발표했습니다. 빅타레코드와의 인연은 전체적으로 1년 7개월 정도이며 이 기간 동안 도합 13곡을 발표했습니다. 빅타레코드를 떠나던 무렵 태평레코드, 밀리온레코드 등에서도 몇 장의 음반을 발표했습니다. 밀리온레코드사와 관계를 갖게 된 것은 이은파의 단짝 후원자였던 작곡가 문호월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호월은 밀리온레코드에 자신의 애인 이은파를 적극 소개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가수 이은파의 가장 중심적인 활동터전은 오로지 오케레코드입니다. 이곳에서 이은파는 1935년 7월부터 1939년 8월까지 무려 70여곡이 훨씬 넘는 노래를 집중적으로 발표했습니다. 그 작품 중에서도 문호월의 작곡이 단연 으뜸으로 많았습니다.

1935년 '삼천리' 8월호의 ‘삼천리 기밀실(機密室)’이란 기사에는 이은파의 당시 근황이 등장합니다. 거기엔 ‘약혼 도중’이라는 글귀가 눈에 띠지만 구체적인 경과나 내용은 확인할 길 없습니다. 약혼의 상대가 누구인지, 또 그 결혼이 과연 성사가 되었는지는 전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는 이은파와 문호월의 염문(艶聞)에 대하여 아는 사람은 대개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잡지사에서 공연히 두 사람의 염문을 떠올려 세인의 관심을 이끌어내려는 저의가 은연중에 느껴지기도 합니다.

1935년 10월1일 대중잡지 '삼천리'가 주최한 레코드가수 인기투표에서 이은파는 10위권 내에 들지 못하고 나선교(羅仙嬌), 강남향(江南香), 최연연(崔姸姸) 등과 함께 등외로 입선하지만 이 입선은 상당한 수준의 인기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1935년 10월19일부터 이틀간, 강원도 철원의 철원극장에서는 그곳 정화당축음기 후원으로 오케대연주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이 공연의 출연진은 이난영, 고복수, 이은파, 김해송, 강남향, 김연월, 한정옥 등입니다. 연극배우 임생원, 신일선, 차홍녀, 나품심, 김진문, 신은봉도 함께 무대에 올랐습니다. 그야말로 화려한 출연진들이었네요.

1936년 '삼천리' 1월호에 실린 ‘인기가수 좌담회’가 열렸을 때 이은파는 그 좌담회에 참석하여 오직 한 마디 말만 하고 있습니다. 잡지운영자인 시인 김동환(金東煥, 1901~?)이 가수들에게 취입 전 대체로 어떤 것을 먹는 습관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이은파는 “홍차(紅茶) 한 잔쯤 먹는 것도 좋아요”라고 말하면서 뜻밖에도 홍차 음료에 대한 특별한 기호를 나타냅니다.

같은 책에 실린 '유행가집'에는 '앞 강물 흘러 흘러'의 가사가 수록되었습니다. 1936년 '삼천리' 2월호의 특집기사 ‘신춘에는 어떤 노래가 유행할까’에서 작사가 문호월은 신민요가 대중들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실을 소개하며 이은파의 '앞 강물 흘러 흘러'와 박부용의 '노들강변'이 당분간 계속 인기를 유지해갈 것이라고 확신에 찬 전망을 하고 있습니다.

인기가수로서의 이은파는 1936년 8월15일 밤 8시30분 경성방송국(JODK) 라디오프로에 출연해서 고복수와 함께 노래를 부릅니다. 1937년 1월30일부터 이틀 동안 매일신보 주최 ‘재즈와 무용의 밤’에도 출연해서 노래를 부릅니다. 이날 신문에 소개된 이은파 관련 기사는 “민요를 노래할 때 첫손을 꼽게 하는 리은파 양”이라 했고, 그녀의 “곱고 부드러운 합창에는 장내가 사뭇 혼란하기까지 하였다”고 하면서 “재청삼청(再請三請)이 요란하게 물결쳤다”고 매우 특별한 평가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은파의 노래가 조선의 전국을 물결치고 있다”고 하면서 “도화(桃花)빛 두 볼에는 믿음성, 귀염성을 갖추고 있으며 염심(染心)부인의 태가 꼭 백였다”는 표현으로 가수 이은파의 외모를 그립니다. 그러면서 신문기사는 이은파를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조선의 민요가희(民謠歌姬)”라고까지 드높은 평가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은파가 남긴 작품 중 가장 절정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관서천리(關西千里)', '앞 강물 흘러 흘러', '요 핑계 조 핑계', '돈바람 분다', '정한(情恨)의 밤차', '청실홍실', '새날이 밝아오네', '천리춘색(千里春色)', '풍년송(豊年頌)', '덩덕궁타령' 등입니다.

이 가운데에서 ‘관서천리’는 1930년대 중반의 관서 지방, 즉 평안남북도 일대의 유적지와 산촌 풍경이 그림처럼 잘 담겨져 있습니다. 강원도의 해발 677m의 높은 고개인 철령관(鐵嶺關)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방향을 설정해서 관동, 관서, 관남, 관북 등으로 불렀지요. 그 관서지역의 산골에는 떠돌이 행상, 겹겹이 둘러쳐진 험산준령이 보입니다. 슬픈 멸망의 역사를 머금고 있는 낙랑 유적지와 평양 대동강의 서늘한 가을풍경도 등장합니다. 황해와 용당포까지도 애착으로 껴안고 있네요. 그 깊은 관서지역 산골로 지나가는 화물차 소리도 들리고 목화밭에서 힘겹게 구부리고 일하는 산골처녀의 한숨도 들립니다. 모든 것이 황폐화되어가고 참혹한 붕괴 속으로 떨어져가는 식민지의 애잔한 정경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한 폭의 애달픈 그림이라 하겠습니다. 1930년대의 시작품들이 감당하지 못했던 지역정서 담아내고 갈무리하는 일에 오히려 신민요 작품이 그것을 성공시키며 감동적인 여운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모습은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적셔줍니다.

이은파가 가요계에서 홀연히 사라진 뒤에는 황금심(黃琴心, 1922~2001)이 이은파를 대신하여 그녀의 노래를 여러 곡 불렀고, LP음반으로 취입해서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졌습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관서천리’를 비롯한 여러 노래가 황금심의 고유노래인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원곡가수는 이은파요, 황금심은 이 노래를 세상에 더욱 널리 알린 리바이벌 가수였다

는 분명한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관서천리 두메산골 장사차로 떠난 님 이 가을 낙엽 져도 소식이 감감해 산 넘고 구름 넘어 물과 산이 겹치고 떠난 님 옛 양자만 눈앞에 암암

관서천리 낙랑 옛터 대동강은 가을빛 나그네 모란대에 눈물은 집니다 황해는 푸른 바다 뱃길은 끝이 없고 용당포 여울터에 황혼이 짙으오

관서천리 살진 벌판 지나는 차 소리에 목화밭 축등에는 처녀의 한숨 한양이 어데련가 물과 산이 겹치고 떠난 님 옛 양자만 눈앞에 암암

-‘관서천리’ 전문

한편 1935년 5월 태평레코드사에서 발매된 '정한의 밤차'(박영호 작사, 이기영 작곡)는 시극(詩劇) 음반으로도 제작되어 발매되었는데 이 음반에 들어있는 이은파의 삽입곡이 대중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배우 박세명(朴世明)과 신은봉(申銀鳳)이 격정적으로 엮어가는 대사 틈에서 이은파의 이 노래가 울려 퍼질 즈음 청중들은 식민지백성의 슬프고 서러운 심정을 이기지 못하고 기어이 흐느끼도록 만들었습니다.

'노래:여' 기차는 떠나간다 보슬비를 헤치며 정든 땅 뒤에 두고 떠나는 님이여

'대사:여' 님이여 가지마오 가지마오. 당신 없는 세상은 회오리바람 불어가는 어두운 사막이외다. 그리고 피라도 얼어 떨린다는 모질고 사나운 눈보라 속이외다. 차라리 차라리 가시려면 정은 두어 무엇하오. 정두고 몸만 가시다니 이 아니 서러운가요

'노래:남' 간다고 아주 가며 아주 간들 잊으랴 밤마다 꿈길 속에 울면서 살아요

'대사:남' 기차는 가자고 목메어 우는데, 어찌타 님은 옷소매를 잡고 이리도 슬피 우느뇨. 낭자여 잘 있으소, 마음이 천리 오면 지척도 천리요. 마음이 지척이면 천리도 지척이라오. 달뜨는 밤, 꽃 지는 저녁, 명마구리 소리 처량한 황혼에 만학천봉 굽이굽이 서린 새빨간 안개를 타고 꿈길에서 만나지이다. 오! 낭자.

'대사:여'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당신은 천하의 왼갖 꽃동산을 헤엄쳐 다니는 호랑나비외다. 달디단 말과 슬기 있는 눈빛으로 오늘은 흰 꽃 내일은 붉은 꽃으로 사랑과 맹세를 옮아가는 뜬세상 호랑나비가 아닙니까? 원망스럽소. 밉살머리스럽소, 한번보고 내어버릴 꽃이라면 무슨 억하심정으로 꺾어 놓았단 말이요.

'노래:남' 님이여 술을 들어 아픈 맘을 달래자 공수래공수거가 인생이 아니냐

이은파가 음반을 발표할 때 함께 활동했던 작사가로는 이춘풍, 이하윤, 고마부, 두견화(이상 빅타), 김능인, 염일화, 차몽암, 김연수, 남풍월, 박영호, 민정식, 이노홍, 조명암, 을파소(이상 오케), 박영호, 이품향(이상 태평), 최상기, 춘호, 강성복, 최상수(이상 밀리온) 등입니다. 작곡가로는 전수린, 김교성(이상 빅타), 문호월, 손목인, 고하정남, 김송규, 손희선, 박시춘, 김준영, 김영파(이상 오케), 이기영, 남궁월(이상 태평), 이용준, 문호월(이상 밀리온) 등입니다. 가장 가까운 콤비로 활동한 작사가는 박영호와 김능인이며, 작곡가로는 단연 문호월과 손목인입니다.

어떤 기사는 가수 이은파가 1939년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쓰고 있지만 이는 분명히 착오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1940년 2월2일 밤 8시40분에 가수 송낙천과 함께 당시 방송프로에 출연하여 '청실홍실', '돈바람 분다' 등을 경성방송관현단 연주에 맞춰 노래한다는 기사가 확인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1940년 3월13일에는 김용환이 주재하는 반도악극좌(半島樂劇座) 연기부에 참여해서 한 달간 북조선 일대를 두루 순회하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5월 초순에는 서울에서 중앙공연무대를 갖기도 했습니다. 이은파는 1949년까지 몇 차례 무대에 오른 기사가 확인됩니다만 활동은 차츰 뜸해졌고, 1960년 무렵에는 서울 영등포에 은거해서 살고 있다는 소식이 가요계에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이애리수, 강석연 등 가요사 1세대 가수들이 대개 그러했던 것처럼 이은파도 뒷날 배필을 만나 가정을 꾸린 후 자신의 과거신분을 철저히 감추고 오직 자녀양육과 가정생활에만 충실하며 호젓하게 살아간 것으로 보입니다. 이은파가 땀 흘려 닦아놓은 식민지시절 근대 신민요의 전통은 이후 황금심, 황정자, 최정자, 김세레나, 하춘화 등으로 그 맥을 꾸준히 이어갔습니다.

이동순

시인. 문학평론가.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1973),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1989).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등 15권 발간. 분단 이후 최초로 백석 시인의 작품을 정리하여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 1987)을 발간하고 민족문학사에 복원시킴. 평론집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등 각종 저서 53권 발간. 신동엽창작기금,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받음.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계명문화대학교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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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gh !! basic Google translation, with still lots of mistakes in it)

Even with flowing water in front of the river

I can't stop your way

These two shedding tears in my body ; How will you stop

It's a dirty rain, my tears are falling

Night light is quiet (before) my sadness

(I) Don't eat so much this night

Leaving me will break me up

I come to you in front of my heart

Looking at your face in the light

My heart illuminates the day to come to the movies (??)

How do you believe in a breaking up (???) ?

How nice would it be if it rained so much all night and the river flowed in so much quantity that it would prevent someone to leave? The overflowing river is not just an ordinary river but a mixture of love and longing, loneliness and lament, resentment and tears that have accumulated in the heart after a long breakup. The amount of tears that shed in the reunion is quieter than that of the river or the flood. Leaving early at dawn leads to a long breakup. My wife can't stand it because it feels like being burned. With a hesitant step, she comes to the front of him and sees and sees the face of him, who is exposed to a faint glow, with wet eyes.


The author of the song with the delectable pesos is Kim Neon-in (金陵 人, 1911 ~ 1937) from Hwanghae. Composer Mun Ho-wol (文 湖 月, 1908 ~ 1952) was born in Jinju. Both of them traveled around the country and had long experiences in folk songs, collections and arrangements, and based on such activities, they had a special attachment to national rhythms and devoted their time to the settlement and development of new genres. This “flowing river in front of the river” was not only the most representative song of singer Lee Eun-pa produced and released by O'Record, but also a song representing the mid-1930s in general.


The singer Lee Eun-pa came to sing this song because of his special relationship with the composer Moon Ho-wol. When Munhowol made a folk song while walking around Kwanseo, he stayed at a ryokan in Jinnampo area for a while. Moon Howol had an audition on the spot, and it immediately sounded quite good. So, later, he gave me an address to come to Seoul, and after a while, Gisaeng came to Munhowol. This is Lee Eun-pa. Moon Ho-wol composed several pieces of Shin Min-yo's works for Lee Eun-pa to practice and to record. In the process, they fell in love and started living together. Moon Ho Wol made the name 'Eun-Pa' as a stage name.


The birth of Lee Eunpa has no known data. However, in the 1939 magazine Samchully, one said that she was twenty-two years old and that it was four years since her debut. In the writings of the playwright and writer, Lee Seo-gu (李瑞 求, 1899-1981), it was mentioned that she worked as a number-ranking student in Jinnampo, Pyongan-nam-do. Taking a class at Pyongyang School and in advance of her move to Jinnampo area, it seems that Lee Eun-pa's birth is probably one of the places in Kansai.


In the early 930s, many record companies founded in Seoul had random ways to find women singers. This was Because nobody was really reluctant to be a singer. Under these circumstances, I visited Kwon-Ban, the place to be for such occasion, to find the best candidate for the singer. The singers selected in this way were Wang Soo-bok, Sun-woo Il-sun, Lee Eun-pa, Park Bu-yong, Kim Bok-hee, Kim In-sook, Han Jeong-ok, Miss Korea (Moranbong), Kim Un-sun, Wang Jo-sun, Kim Yeon-wol, Kim Chun-hong, and Ewha-ja. Since she was a kind of outlaw , she would have been accustomed to dancing and folk songs, and based on this, she created a song that harnessed the traditional melodies, so it was 'Shin Min-yo' (new folk song) styled.


Several singers tried Shin Min-yo (new folk song), but not all were successful. Among them, there were three singers who drew explosive reactions from the public with their outstanding skills, such as Wang Shou Bok, Sun Woo Il Sun, and Lee Eun Pa. In the world, these three people were called the “trio of Shin-minyo.” Different listeners may have different tastes for the singer, but Lee Eun-pa's song was so popular with the public that it could be called the Queen of Min-min.


Since her debut in May 1934, when she released her two songs, "Spring Street" and "Night Dream Road", Eunpa had already recorded about 100 songs. The relationship with VICTA RECORD is about 1 year and 7 months in total, and 13 songs were released during this period. At the time of leaving Victor Record, Taepyung Records and Million Records also released several records. The relationship with Million Records was due to the help of composer Moon Ho-wol, who was a supporter of Lee Eun-pa. Moon Howol seems to have actively introduced his lover, Lee, to Million Records. However, singer Lee Eun-pa's most important activity site is only to OK Records. Here Eunpa focused on releasing more than 70 songs from July 1935 to August 1939. Among them, Munhowol's compositions were by far the best.


The article, “Samcheonri Confidential Room,” in the August issue of Samchully in 1935, reveals Lee's recent situation. There's a phrase that says “during the engagement,” but there's no way to find out what's going on. There is no way to determine who is engaged and whether the marriage is fulfilled. In the world, however, most people who knew about Lee Eun & Mun for them Mun Ho-wol's side was unknown. It may be concealed that the magazine's intention was to draw the attention to the two people as being the performance of the thoughts of two people.


On October 1, 1935, Lee Eun-pa fell in the top 10 in the popular record singers hosted by the popular magazine Samcheon-ri, together with Naseon Bridge ??), Gangnam-hyang, and Choi Yeon-yeon. This reveals a great deal of popularity.


Two days from October 19, 1935, an Okedae Concert was held at Cheorwon Theater in Cheorwon, Gangwon-do. The cast included Lee Nan-young, Go Bok-soo, Lee Eun-pa, Kim Hae-song, Gang Nam-hyang, Kim Yeon-wol, and Han Jeong-ok. Theater actress Lim Sae-won, Shin Il-sun, Cha Hong-nyeo, Napsimsim, Kim Jin-moon, and Shin Eun-bong also went on stage together. It was a gorgeous cast.


When the popular talks were held in the January issue of Samcheonri in 1936, Lee Eun-Pa attended the talks and said just one small word. When the magazine poet Kim Dong-hwan (1986 ~?) Asked the singers what habits they usually eat before they were performing, Lee said, “It's good to have a cup of black tea.” End of quote.


In the same book, 'Trendy House', the lyrics were written down for "Front River Flows." In the 1936 February issue of Samcheonri, 'Which Song Will Be Popular in New Year', the lyricist Mun Ho-wol introduces the fact that 'Shin Min-yo' (the new modern folk-pop song style) was specially loved by the masses. We are confident that "the Nodeul River" will remain popular for the time being.


Lee Eun-pa, as a popular singer, plays on Gosung's radio show on August 15, 1936, at 8:30 pm and she sings with Koh. For two days starting January 30, 1937, she also appeared and sings at the Jazz and Dance Night. In Lee Eun-pa's article, as being introduced in the newspaper, she was called as "Lee Eun-pa who takes the lead when singing a folk song." This kind of introduction was something special.


The newspaper article gave a high praise to Lee Eun-pa as being "the only folk singer in the Joseon Dynasty."

The most famous representative works of Lee Eun-pa's works are 'Kwanseo Cheon-ri', 'Flowing the river in front of him', 'Yo Ping-gi Jo Ping-gye', 'Dawn Wind Blow', 'Jung Han (情 恨) ) 'S night tea', 'Cheongsil Hongsil', 'New Day is Bright', 'Cheonrichun Color', 'Pungnyeonsong (豊 年 頌)', 'Dungdeokgung Palace', etc.


Among these, 'Gwanseocheonri' is a description of the ruins and mountain villages of the Kansai region of the mid-1930s, namely, North and South Pyongan. It was called East Kanto, Kwanseo, Kwannam, Kwanbuk by setting the direction of north, south, east and west centered around the ancient Cheolnyeonggwan, which is 677m above sea level in Gangwon-do. In the valley of the Kansai region, you can see the floating Humsan Jun-Ryung surrounded by layers. You can also find the ruined ruins that contain the sad history of destruction and the cool autumn scenery of Pyeongyang Daedong River. "Even the Yellow Sea and the Dragon Pawn are hugging me." You can hear the sound of a truck passing through the deep Kansai region and the sighs of a maiden working hard in the cotton field. This is a a sad picture of the colonial apocalyptic scene where everything is devastated and falls into a devastating collapse. Rather than capturing and capturing local emotions that the prototypes of the 1930's could not handle, Shin Min-yo's work succeeds in sublimating it into a touching sensation that soaks our heart.


After Lee Eun-pa disappeared from the music world, Keum-Sim (黄 922 心, 1922 ~ 2001) sang her songs on behalf of Lee Eun-pa. For this reason, many people mistakenly think that various songs including 'Kwan-seo-cheon-ri' are unique songs of Keum Sim. The singer however is Eunpa Lee, and Keum Sim was more the revival singer who made the song more widely known to the world. .

Gwanseocheon-ri Dumesangol Departed by Jangsacha

Even where one leaves one is falling

Over the mountains, clouds and water overlaps

The old quantum bay in front of decay

Kwanseocheonri Falls with its Ancient Ruins of the Daedong River in Autumn

Tears on the wayfarer

The Yellow Sea shows no end

Dark twilight upon the Yongpangpo Fortress

With the sound of cars passing through the open space

The sigh of the maiden upon the cotton field

Hanyang has overlaps of water and mountains

The old quantum bay in front in decay

-'Gwanseocheonri'

Meanwhile, "Jeonghan's Night Tea" (composed by Park Young-ho and Lee Ki-young), was released by Taepyeong Records in May 1935; it was also produced and released as a poem record. As Lee Se-eun's song rang out in the dialogue between actor Park Se-myeong and Shin Eun-bong, the audience made the gears weeping instead of overcoming the sad and sad feeling of the colonial people.

"The train is leaving. Leave me behind on the ground"

"Please don't go. The world without you is nothing more than a whirlwind and a dark desert. My blood is freezing and trembling and is like a wild blizzard. Tell me, what are you going to do by leaving? Isn't it sad to leave you alone?"

"Are you going to go? I live crying in my dreams every night"

"The train cries for a while, but how about you get dressed and sad?

You're a good man, if you're in love with him.

If your heart is too close, your heart is too.

Moonlit nights, evening flowers, at the dusk

Manhakcheonbong bends the red fog and meets on the dream road. Oh! Sac.

"Lies, Red lies. You are like a swallowtail butterfly swimming around the world's left garden. With the words of Dalidan and wise eyes, today's white flowers, and tomorrow's red flowers. Isn't it a swallowtail butterfly that carries love and oaths?

I'm resentful. If you're a flower that you'll see and that is throw away

I've broken it up for some reason."

"Lord, let's lift up a drink to t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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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Eun-pa (??) with (??) Innohong, Lighting Am, Eupaso (Lee Sang-ke), Park Young-ho, Lee Sang-hyang (Lee Tae-pyeong), Choi Sang-gi, Chun-ho, Kang Seong-bok, Sang-su Million (ideal Million).


Composers involved include Jeon Soo-rin, Kim Kyo-sung (Lee Sang-ta), Moon Ho-wol, Wrist-in, Ko Ha-jeongnam, Kim Song-kyu, Son Hee-sun, Park Si-chun, Kim Joon-young, Kim Young-pa (Lee Sang-ke), Lee Ki-young, Nam Gung-wol (Lee Sang-pyeong), Lee Yong-jun, Moon Ho-wol (Lee Sang-il) Came). The most common composers are Park Young-ho and Kim Neung-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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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e articles say that singer Lee Eun-pa passed away in 1939, but this seems to be a mistake. Because on February 2, 1940, at 8:40 pm, she appeared on the broadcast program with singer Song Nak-cheon and was singing 'Chungsil Hongsil' and 'Dawn Wind Bunda' along with the performance of Kyungsung Broadcasting Hall. On March 13, 1940, she participated inside the Peninsula Achievement Theater presided over by Kim Yong-hwan, returning to North Korea after a month. In early May, she had a central performance stage in Seoul. Lee Eun-pa was confirmed to have performed on several occasions until 1949, but the activity gradually slowed down. In 1960, the news came that she was living in Yeongdeungpo, Seoul, became known.


As Lee Soo-soo and Kang Suk-yeon's first generation singers usually did, Lee Eun-pa met with Bae-pil in a later time again and made a family, after which she completely concealed her past status, and only lived to perform child care and family life. The tradition of modern neo-minyo that Lee Eun-Pa wiped out of memory continued with the reworks of Keum Sim, Hwang Jungja, Choi Jeong Ja, Kim Serena, and Ha Chun H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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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nongaek.com/news/articleView.html?idxno=51703


[논객닷컴=이동순] 지난 시기 민족사의 험한 세월은 사랑하는 가족이 함께 한곳에서 편안히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식민지가 그러했고, 좌우익 이념갈등시기도 그러했습니다.

여러 해 전 쫓기듯 도망치듯 집을 나간 낭군이 어느 날 밤 불현듯 돌아온 정황을 짐짓 떠올려봅니다. 몇 해만에 돌아온 집이지만 이웃에게 알려지는 것이 두려운 낭군은 주변을 흘끔거리며 불안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워낙 수상한 시절이라 아내는 먼저 대문부터 꼭꼭 닫아걸고 이웃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주변을 빈틈없이 단속합니다. 오후부터 잔뜩 찌푸리던 하늘이 기어이 밤비를 뿌릴 무렵, 아내는 그제야 조용히 방안에 들어와 낭군 앞에 앉아봅니다.

그윽한 눈으로 살펴보고 볼을 쓰다듬으며 서로를 어루만지는 그 기막힌 상봉의 시간을 과연 어떤 필설(筆舌)로 표현할 수 있으리오. 젊은 낭군은 말없이 아내를 으스러지도록 가슴에 지그시 껴안았다가 희미한 불빛에 다시 몇 번이고 각시 얼굴을 들여다보며 손바닥으로 볼을 쓰다듬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가슴 속에 쌓였던 깊은 한이 봄을 맞은 빙하처럼 하염없이 주르르 흘러내립니다. 가시버시는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밤은 점점 깊어가지만 부부는 상봉의 시간이 아까워서 도무지 잠자리에 들 수가 없습니다. 새벽닭이 울기 전, 낭군은 다시 먼 길을 서둘러 떠나야만 했기 때문이지요. 아내는 낭군께 잠시라도 눈을 붙이라고 권해봅니다. 하지만 낭군은 몇 해만에 만난 사랑하는 아내를 옆에 두고 어찌 잠을 잘 수가 있었을까요. 굴곡도 사연도 많았던 우리현대사에서 이 같은 극적인 장면은 얼마나 많이 빚어졌던 것일까요.

바로 이런 기막힌 아픔과 서러움을 애타는 절창으로 담아낸 노래 하나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민요가수 이은파(李銀波, 1917~?)의 '앞 강물 흘러 흘러'입니다. 그 노래는 마치 가슴을 애잔하게 적시는 가을달밤의 창백한 느낌으로 우리 귓전에 아련히 다가옵니다. 가수의 이름 ‘은파’처럼 달빛의 은물결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다시 스르르 쓸려나가는 그런 애처로운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사랑 郎君' (1939) 조명암 작사/김영파 작곡/박시춘 편곡/ 노래 이은파

(1939년 8월 오케레코드)

< 1 >

달이 떴네 별이 떴네 내 가슴에 님이 떴네 왈랑절렁 왈랑절렁 왈랑절렁 왈랑절렁 청노새는(를) 물어물어 물어~ 흥- 성황당에 절을 하고 고개 고개 고개 넘어 넘어 넘어 갑니다.

< 2 > 가며 십리 오며 백리 꿈 속에는 지척일세 왈랑절렁 왈랑절렁 왈랑절렁 왈랑절렁 청노새야 가자가자 가자~ 흥- 안장머리 술병 달고 고개 고개 고개 넘어 넘어 넘어 갑니다.

< 3 >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정(병)이 들면 갈 수 없네 왈랑절렁 왈랑절렁 왈랑절렁 왈랑절렁 청노새는(를) 갈래갈래 갈래~ 흥- 방울 걸어 포승 달고 고개 고개 고개 넘어 넘어 넘어 갑니다.

<사랑郎君>은 가수 李銀波님이 1939년 8월에 오케레코드에서 발표한 新民謠입니다. 신민요 <파랑치마; OK-12260/ 이은파 노래>와 같이 발매된 이 노래는 신민요 <關西千里 1935.8>, <지는 夕陽>을 취입하며 오케에서 활동을 시작한 이은파님이 거의 활동을 접을 시기에 나온 곡입니다. <雲水納子>

관서천리 두메산골 장사차로 떠난 님 이 가을 낙엽져도 소식이 감감해 산 넘고 구름 넘어 꿈길은 오락가락 옛날엔 푸른 새가 한숨에 날렀소 관서천리 낙랑 옛터 대동강은 가을빛 나그네 모란대에 눈물은 집니다 황해는 푸른 바다 뱃길은 끝이 없고 용당포 여울터에 황혼이 짙으오 관서천리 살진 벌판 지나는 차소리에 목화밭 축등에는 처녀의 한숨 한양이 어데련가 물과 산이 겹치고 떠난 님 옛양자만 눈앞에 암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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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kyobostory.co.kr/contents.do?seq=262

1934년 다동(茶洞) 다방골 조선권번 앞 한 주점.

빅타, 콜럼비아, 폴리돌 등 대형 음반사 관계자들은 신민요(新民謠) 가수 발굴을 위해 기생양성소인 권번(券番)을 수시로 들락거렸다. 특히 초일류로 손꼽히던 평양 출신 기생들이 기거하던 조선권번 앞 주점과 다방에서는 이들 기생을 필사적으로 잡으려는 음반사와 호조건을 내세운 기생 간 밀당이 낮밤으로 계속되기도 했다.

신민요는 전통적인 민요 선율에 일본의 요나누키 음계나 서양의 왈츠 등을 입혀 새롭게 선보인 대표적인 근대 음악으로 1910년대 중후반 일본에 유학했던 작곡가들이 20년대 중후반 대거 귀국해 활동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고, 1930년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대중화 물살을 탔다.

특성상 전문적인 국악 교육을 받은 음악인들에게 유리했으며, 따라서 각 권번의 얼굴 예쁘고 소리 잘 하는 기생들의 전유물처럼 인식되었다. 평양 기성권번의 왕수복, 선우일선, 김추월, 조백오, 김복희나 인천 용동권번의 이화자, 인천권번의 장일타홍 등이 이 시기 신민요계에 발을 내디딘 대표적인 기생 출신 소리꾼이었다.

폴리돌레코드가 기생 왕수복으로 쏠쏠한 재미를 보며, 음반시장을 위협하자 이에 자극받은 콜럼비아는 왕수복을 능가하는 민요가수 발굴에 혈안이 돼 있었다. 콜럼비아 음악부장은 조선권번 소속의 한 평양기생을 며칠째 찾아와 집요한 설득전에 들어갔다. 강홍식을 대스타로 키운 유명한 작곡가 김준영이 곡을 쓰고, 일본의 스타 작곡가 스기타 료죠(杉田良造)가 편곡자로 참여한다고 꼬드긴다.

하지만 그 기생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수심가나 배따라기를 녹음하라믄 하갔지만 신민요 기거 왠지 남사스럽슴네다"며 손사래를 친다. 음악부장은 비장의 카드를 꺼낸다. 폴리돌이 왕수복에 이어, 선우일선을 가수로 데뷔시킨다고 경쟁심을 부추긴 것이다. 기생은 즉시 입장을 바꾼다. "노래만큼은 일선이보다 자신있다"며 득달같이 계약서에 사인한다.

음악부장은 두둑한 돈 봉투를 쥐어주고는 두 가지 조건을 던진다. '추월'이라는 기명이 촌스러우니, 새로운 예명을 사용하자는 것과 신비감을 주기 위해 광고할 때 얼굴을 가리겠다는 것. 예명은 새로운 사조의 음악임을 감안해 '미스코리아'로 작명했다며 잘 외우라 한다. 화들짝 놀란 기생은 아연실색하지만, 음악부장은 계약서를 주머니에 챙겨 넣고는 총총히 자리를 뜬다.

몇 달 후.

'격찬! 환호! 미스코리아', '일류 가수만 망라한 콜럼비아템 우승은 확실'이라는 콜럼비아사 광고가 방송과 신문을 도배한다. 일본에서조차 미스코리아에 대한 관심이 높아 경성방송국 라디오 방송을 중계하는 현상까지 빚어진다.

특히 눈 부분을 가린, 요즘으로 치면 티저광고가 대성공을 거둬, 미스코리아는 금세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며 유명세를 탔다.

한낱 평범한 소리기생에 지나지 않던 김추월은 이제 '추월'이라는 촌스런 기생딱지를 떼고, 대신 '미스코리아'라는 글로벌한 이름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그것도 국제적인 연예인으로 말이다.

이처럼 전통음악을 학습한 국악인들 특히 기생들이 음반사들로부터 호조건의 러브콜을 받으며, 신민요와 대중가요 취입에 열을 올리는 이른바 '갈아타기'가 대호황을 이루는 시기가 급격히 도래했다.

음반사 입장에서는 별도의 학습이 필요 없는 데 따른 비용절감 효과 외에도 이름 있는 기생은 최소한 기존의 명성을 유지하므로 시장 개척에 대한 부담이 적다는 장점 때문에 '기생모시기'에 사활을 걸었고, 기생들은 국악과 양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간극이 너무나도 큰 시절, 이미지 개선 및 신분 상승의 효과를 꾀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갈아타기에 열을 올렸다. 미스코리아 역시 이러한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탄생한 경우였다.

특히 미스코리아가 데뷔한 1934년은 들불처럼 퍼져나간 '신민요'가 유행의 정점에 서 있던 해였다. 오늘날 퓨전국악의 효시로 손꼽히는 신민요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고, 이에 호응이라도 하듯 불후의 명곡과 명가수들이 대거 쏟아져 나왔다. 기생 박부용의 《노들강변》을 필두로, 강홍식의 《처녀총각》, 선우일선의 《꽃을 잡고》, 이난영의 《봄맞이》 등이 이 즈음 발표되었다. 신민요계의 빅3로 꼽히는 선우일선, 이은파가 이 해에 데뷔했으며, 3대 아리랑 중 하나인 《진도아리랑》도 이 시기에 선보였다.

하지만 국악전승의 대표적인 음악집단이었던 기생을 앞세운 신민요의 활황은 반대급부로 전통음악의 위기를 초래했다. 양악화의 대세를 따르지 않는 국악은 매우 저급한 음악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확대재생산 되었고, 전통음악인의 입지는 더욱 좁아져, 조그만 요리집이나 잔치집으로 내몰리는 신세가 되었다. 그나마 잔치집에서 소리할 수 있는 요행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실력이 월등한 국악인들이었고, 그렇지 못한 국악인들은 주린 배를 걱정하며 거리로 나앉아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이제 갈아탈 것이냐, 버틸 것이냐는 단지 예술장르의 선택에 한정되는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었기에 신민요 유행 초기 국악계는 새로운 사조를 수용하려는 분위기가 강했다. 심지어 대중가수조차도 신민요로 갈아타거나 아예 데뷔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난영, 황금심, 박단마, 김용환, 고복수 같은 스타급 대중가수들이 대표적이다. 1930년대 중반 일본에서 커다란 인기를 누린 조선악극단(朝鮮樂劇團)의 주요 레퍼토리가 《새날이 밝아오네》, 《돈타령》 같은 신민요였다는 점도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국악계에도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해 원곡에 관현악을 입히는 작업이 유행을 하면서 '新'자가 붙은 국악곡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新作판소리》, 《新作민요》처럼 '신작'(新作)이라는 접두어를 붙이거나 '신조'(新調), '신'(新)'자 가 붙은 많은 국악곡들이 기악, 성악을 따지지 않고 우후죽순으로 녹음되고, 방송을 탔지만 정작 신민요처럼 대중들로부터 크게 호응 받지는 못했다.

신민요의 영향으로 갈아타기가 대세로 굳어가는 분위기 속에서도 의외로 많은 국악인들이 갈아타기를 거부하고 강단 있게 버티며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몇몇은 세를 규합해 사설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하고, 유행가 문화에서 조금은 벗어나 있는 시골을 찾는 틈새 전략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특히 유랑극단을 통해 다양한 전통예술, 예를 들면 줄타기, 판소리, 재인청 춤 등 고급국악이 지역에 소개되고 또 수요가 증가하면서 '향제'(鄕制)라는 이름으로 전통예술이 다시 활성화되었다. 이들 예술집단은 그 지역의 전통예술을 발굴해 공연을 통해 소개하기도 하며, 새로운 형태의 공연물로 재창조해 보급하기도 하는데, 오늘날 널리 알려진 《정선아리랑》이나 '탈춤' 등이 이런 방식으로 살아남은 대표적인 전통물이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했던가?

기생이라는 예인 집단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신민요의 열풍은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말처럼 1940년대 들어서면서 급격히 시들해지고, 양악계나 국악계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일본이 대동아전쟁에 집중함에 따라 모든 음악이 '군국찬양' 일색이었고, 이러한 분위기가 해방 직전까지 지속되면서 신민요의 실체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만 것이다. 하지만 지역을 중심으로 단단하게 뿌리내리며 '갈아타기'의 유혹을 거부하던 국악인들 대부분은 해방과 함께 대한국악원 등 대규모 조직을 통해 활동을 강화하게 되고, 이들 대부분은 1962년 제정된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그 예능을 국가적으로 보호받는, 이른바 초기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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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ghly translated :


"A whole new era of music started at a bar in Dadong around 1934. Large record labels such as Vikta (Victor), Columbia, and Polydor frequently visited Kwon Burn, to discover new folk songs. In particular, in pubs and coffee shops in front of Chosun Kwonban, where people originating from Pyongyang, once the top class, lived, gathered there was a record night to desperately discover cover artists.


'Shin Minyo' is a representative modern music form that was applying traditional Japanese folk songs into Japanese Yonanuki scale or Western waltz, a style which became known to composers who studied in Japan in the mid to late 20's. As a starting point, it was an idea that made it work well.


It was favored by musicians who used to be professional Korean traditional musicians. like Wang Soo-bok of the Pyongyang Kisaeng-seon, Sun Woo Il-sun, Kim Chu-wol, Cho Baek-oh, Kim Bok-hee, Ewha-ja of Incheon Yong-dong-gu, and Jang Il-tahong of Incheon-gu, who were the representatives of the first origins of this period.


When Polydor record had started some court cases with (traditional) folk songs, threatening the music market this way, Columbia was keen to find (new) folk singers who surpassed the copyrights of existing songs. Columbia's music director visited a Pyongyang meeting. The famous composer Kim Joon-young, who raised Kang Hong-sik as a big star, writes a song, and Japanese star composer Ryogiga Sugita complies.


Polydor encouraged the competition to debut Sunwoo Sun as a singer. She signed a contract. The music manager drew two conditions. She must use a new stage name and cover her face thus turning her face into a mystery. The stage name became 'Miss Korea' presenting with it the music of the new movement. The director of the music puts the contract in his pocket and leaves. A few months later. Miss Korea was so much a succes, even in Japan there was a high demand iso that a broadcast was happening. Especially the teaser advertisement was a huge success, keeping the eyes closed, and Miss Korea quickly became famous as it climbed up and down.


Being tired of cover songs, this new image of Miss Korea, too, was born out of a conflict of interests."



"When Miss Korea in 1934 debuted, with 'Shin Min-yo', it spread like wildfire. 'Shin Min-yo' was one of the new fusions of music. In response to this, immensely famous songs and singers were pulling out their own ideas. We can name Park Bu-yong's `` "The Nodeul Riverside '', Kang Hong-sik's "Virgin Bachelor'', Sunwoo Il-sun's `` "Catching Flowers'' and Lee Nan-young's "Spring of the Spring'' which were all announced around this time. Sunwoo Il-sun and Lee Eun-pa, who were considered being among the big three representatives of the new folk songs, made their debut this year, and 'Jindo Arirang', one of the three major Arirang, was also released during this period.


However, 'Shin Min-yo' 's boom, which was the representative music group of Korean traditional music, led also to a crisis of traditional music at the same time. The negative perception that Korean traditional music does not follow the trend out made it so that it had narrowed the position of traditional musicians, who hardly had anything to eat.


This musical change was not just a matter of choice to create a new genre of art, but had been a matter of survival. Even the popular singers sometimes changed to new folk songs or even made their debut that way. Star-class singers such as Lee Nan-young, Keum-Sim, Park Dan-ma, Kim Yong-hwan and Go Bok-soo are of this kind. This is also supported by the fact that the main repertoire of the Chosun Orchestra, which was very popular in Japan in the mid 1930s, played a new folk song such as ``New Day is Brightening'' and ``Donta-Ryeong''. In the Korean traditional music industry, the work of applying the orchestra to an original song was popular, and the Korean traditional songs with 'New' arrangements were also popping out. Many Korean traditional songs with prefixes such as ``New Work '' or "New'' like 《New Work Pansori》 and 《New Work Folk Songs】 They were recorded and broadcasted, but it was not as well received by the public as the 'Shin Min-yo' (or new folk) style.


Even in the atmosphere of change in the new folk songs, many Korean musicians refused to (adapt to) change, and endured steadfastly and took the crisis as an opportunity. Some have combined the three together to form private groups and overcome the crisis with a niche strategy to find a country that is a bit out of fashion. In particular, through the wandering troupe, various traditional arts such as tightrope, pansori, and Jaeincheong dance were introduced to the region, and as demand increased, traditional art was revived. These art groups discover traditional arts of the region through performances and recreate and disseminate them into new forms of performances.


The 'Shin-min-yo' 's craze, which was popular among groups, but was suddenly withered in the 1940's as the term 'Kwon Bul-byeong' years (權 不 十年) this made them look bad. As Japan now concentrated on the Great East Asian War, all music had become military praise, and as the atmosphere continued this way until the liberation, 'Shin Min-yo' 's substance would disappear like a mirage. However, most of the Korean traditional musicians, who were firmly rooted in the region and refused the temptation of 'changing', strengthened their activities through large organizations such as the Korean Traditional Music Center and through liberation. As a result, it became the so-called 'human cultural asset', which was protected nationally."


lyrics of 'Front River Flows'

See also 30s V.A.: "Pork S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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