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춘 - Park Shi-Choon




Park Shi Choon was a composer and song teacher, who started as a critic/journalist, but generally started to define the Korean early pre-Trot music style.


Only 4 tracks can be found on just one of the compilations of the 23CD box of early gramophone music.


His “Love Composition” shows a few vibrating metallic vibraphone-like sound accents, and mostly acoustic guitar picking to a song, which is like a Korean interpretation of the pre-enka with guitar style from Japan. The second track, with more clever guitar picking continues in this vein of interpretation. The third track also shows wooden block rhyhms and soft humpapa rhythms. The last track is with a female voice, a soft rhythmic accompaniment and also violin, exploring the same a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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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GRAPHIES:

Roughly translated from the Korean Wikipedia page:

° October 28, 1913- June 30, 1996 (83 years old). Active from 1935 ~ 1960.

Known as professional composer, guitar player. He also was a trumpet player, violinist, saxophonist, actor, film director and film producer. Category : trot


Hits/highlights : “Soyagok of melancholy” 1937, “Would have sampalseon” 1946, “Rain gomoryeong” 1948, “Moonlight Silla” 1948, “Sweet eighteen years” 1949, “Saving My Hubby” 1953, “Busan Station departure” 1954


While playing the guitar wearing a bowed tie and a suit he established himself as a major song performer expressing the joys and sorrows of ordinary people under Japanese occupation, singing with a touch of melancholy. Park Shi-choon wrote about 3,000 songs making himself an important part of the format of music expression in Korea. He also acted as a Musical Director for the movie "Korea Strait" in 1943. The Korean war brought of course also forth some war songs. He made a lot of film music in the 1950s and made his debut as a movie actor in 1958. Besides he also was film director and film producer who also played music in the movie, starting off with "daughter chilhyeongje" in 1956. He became the chairman for the Korea Association of the entertainment in 1961. He received the Order of Cultural Merit from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in 1982 and a medal as composer for pop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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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arin.edaily.co.kr/news/NewsRead.edy?newsid=01131606599664384 :

[이데일리 스타in 고규대 기자] 작곡가 박시춘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아 10월9일 오후 7시30분 서울 올림픽홀에서 헌정 음악회 ‘애수의 소야곡 2012’가 열린다. 이번 음악회는 (사)한국싱어송라이터협회가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콘텐츠진흥원이 후원한다. 가수 유열이 사회를 맡고 이미자, 장사익, 주현미, 추가열, 김범수, 보아, 슈퍼주니어 K.R.Y., 윈터플레이, 이미경(소프라노) 등이 출연한다. 모든 출연진은 박시춘 선생에 대한 존경의 마음과 대중음악 발전을 위하여 참여한다는 뜻으로 노게런티로 출연한다. 특별 초대 손님으로 박시춘 선생의 손자인 박창조 군이 무대에 오른다. 미국에서 음악공부를 하고 있는 박창조(17) 군은 할아버지의 곡을 직접 연주하며 노래한다. 박시춘 선생은 ‘애수의 소야곡’·‘신라의 달밤’·‘굳세어라 금순아’·‘이별의 부산정거장’·‘감격시대’·‘낭랑18세’·‘고향초’·등 무려 3,000여 곡을 발표했다. 우리 현대사의 굽이굽이 마다 국민과 함께 울고 웃은 대중가요사의 풍상을 오선지에 담아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번 음악회에서는 박시춘 선생의 음악세계와 생애를 조명하는 영상과 자료 등이 공개될 예정이다. 아울러 이번 공연의 수익금은 향후 ‘박시춘 기념재단’ 설립을 위한 준비자금으로 쓰여진다. 문의 02-706-3570.

http://www.newsmaker.or.kr/news/articleView.html?idxno=4378 :

박성서 평론/박시춘과 함께 하는 한국대중음악사 여행

2013년 08월 02일 (금) 10:54:23뉴스메이커 webmaster@newsmaker.or.kr

탄생1백주년기념 ‘박시춘과 함께 하는 한국대중음악사 여행’특별전시회를 가다

작곡가 박시춘 탄생1백주년 기념 ‘노래박물관’ 특별 전시

-1930년대 유행가에서 2000년대 한류까지, 그 특별한 노래기행

글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올해 2013년은 한국대중음악사에서 특별한 해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에 있어 고유명사가 아니라 대명사 격인 작곡가 박시춘(1913~1996) 선생이 탄생 1백주년을 맞는 해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의 뿌리이자 기둥인 작곡가 박시춘이 남긴 노래와 악상은 근대 한국 대중가요의 초석이자 근간을 이루고 있다. 시대의 격동기를 관통하며 국민들로부터 애창되어온 그의 노래들은 여전히 한국인의 가슴 속에 살아 있다. 이제금 현 한류의 뿌리이기도 하다. 그의 삶과 음악을 돌아본다는 것은 곧 우리나라 대중음악사를 돌아보는 셈이다. 시대의 감성을 가장 잘 표현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는 그의 음악과 삶이 재조명될 예정이다.

탄생 1백주년을 맞아 남이섬 노래박물관에서 펼쳐질 예정인 특별전이 그것으로 전시 타이틀은 ‘박시춘과 함께 돌아보는 한국대중음악사 여행-1930년대 유행가에서 2000년대 한류까지, 그 특별한 노래 여행’. 필자가 전시 책임을 맡아 오는 8월3일부터 12월까지 펼쳐진다. 남이섬에 위치한 ‘노래박물관’에서 펼쳐질 이 특별 전시는 우리네 삶과 대중문화를 함께 되돌아보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그 전시회를 미리 가본다.

탄생 1백주년을 맞는 작곡가 박시춘(1913~1996). 시대의 감성을 가장 잘 표현한 작곡가로 평가받고 있는 그의 노래들은 여전히 국민들로부터 애창되며 한국인의 가슴 속에 살아 있다. 이제금 ‘한류’의 뿌리이기도 하다. 1930년대 그의 등장은 마침내 우리나라에서 민요의 자리에 대중가요가 대신 자리하게 되는 신문화의 새 장(章)이 열렸음을 의미한다. 일제강점기, 그 암울한 시대에 민족의 애환을 달래준 ‘애수의 소야곡’, 40년대 광복의 기쁨을 노래한 ‘신라의 달밤’, ‘럭키 서울’, 남북 분단의 아픔을 그린 ‘가거라 삼팔선’, 그리고 50년대 6.25 한국전쟁 당시에 발표된 ‘전우야 잘 자라’, ‘전선야곡’을 비롯해 당시 피난민들에게 삶에 대한 용기와 희망을 북돋워준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정거장’ ‘봄날은 간다’ 등... 일제 강점기로부터 8.15 광복, 6.25 한국전쟁을 거쳐 전쟁이 휩쓸고 간 잿더미 위에서 그 상흔을 복구하려는 50~60년대 우리네 궁핍했던 삶의 현장에 이르기까지 격동기를 관통, 시대를 함께 했다. 국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노래로 함께 한 박시춘, 특히 어려울 때일수록 힘이 되어준 이 노래들은 지친 국민들에게 전해주는 일종의 응원가였다. 탄생 1백주년을 맞아 남이섬 노래박물관에서 펼쳐질 예정인 특별 전시, ‘박시춘과 함께 돌아보는 한국대중음악사 여행-1930년대 유행가에서 2000년대 한류까지 그 특별한 노래 기행’은 필자가 전시 책임을 맡아 오는 8월3일부터 12월까지 펼쳐질 예정이다. 남이섬에 위치한 ‘노래박물관’에서 펼쳐질 이 특별 전시는 우리네 삶과 대중문화를 함께 되돌아보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그 전시회를 미리 본다.

작곡가 박시춘 탄생1백주년 기념 ‘노래박물관’ 특별 전시를 미리 본다 박시춘과 함께 하는 한국대중음악사 여행 ‘1930년대 유행가에서 2000년대 한류까지’는 연대별 기록전으로 노래박물관 1층 특별전시실에 전시된다. 각각 시대별로 ‘1930년대-대중음악 개화기 저항가요 시대’, ‘1940년대-우리말과 노래도 함께 해방된 8.15 광복, 그리고 남북분단가요 시대’, ‘1950년대-6.25 한국전쟁과 전쟁가요 ‘좋은 군가는 대포소리에도 지지 않는 예술적 무기’, 오향영화사 설립 ‘영화에는 반드시 주제가가 있어야 한다’는 등식 만들어’, ‘1960년대-소리의 혁명, 장르 다양화 시대 한국연예협회 초대 이사장 맡아’, ‘1970년대-대중음악의 선구자, 가요인들의 권익을 위해 앞장’, ‘1980년대~1990년대-리메이크 붐, 다양한 대중가요의 공존시대’, ‘2000년대-온라인 시대에도 여전히 울리는 한류의 뿌리, 박시춘 가락’으로 나뉘어 전시된다.

[1930년대] 대중음악 개화기, 저항가요 시대 1930년대는 대한민국 대중음악이 본격적으로 꽃 피웠던 시기다. 민요, 재즈, 트로트 등 다양한 장르를 선보였던 30년대에 박시춘은 손목인, 김해송과 함께 오케레코드 3대작곡가로 자리하며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도 현재 280 여 곡이 넘는다.

‘애수의 소야곡(남인수, 37년)’의 원곡인 ‘눈물의 해협(36년)’이 등장하는 1937년을 전후해 방송에서 ‘유행가’라는 용어 대신 ‘가요곡’이라 사용했고 레코드 산업 또한 호황을 누렸다. 당시 ‘소리판’으로 불리기도 했던 축음기 음반(SP)시대를 풍미했던 ‘애수의 소야곡’을 비롯해 ‘꼬집힌 풋사랑’, ‘눈 오는 네온가’, ‘항구마다 괄세더라’, ‘울며 헤진 부산항’, ‘서귀포 칠십리’ 등의 서정적인 멜로디부터 ‘왕서방 연서’, ‘총각진정서’, ‘세상은 요지경’ 같은 만요, 그리고 ‘신민요 풋난봉’, ‘산호빛 하소연’ 등 신민요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노래들을 발표했다. 작곡 활동 뿐 아니라 '조선악극단(朝鮮樂劇團)'에서 ‘아리랑보이스’를 결성, 현경섭, 송희선, 김해송, 이복본 등과 함께 중창과 판토마임, 그리고 악기 연주를 겸한 여흥을 무대에서 펼쳐보였던 엔터테이너였다. 아울러 전국 각지는 물론 멀리 만주로까지 이어지는 공연활동을 통해 고향을 잃고 떠도는 민족의 설움을 보듬어 주었다.

[1940년대] 우리말과 노래도 함께 해방된 8.15 광복과 남북분단가요 시대 우리의 말과 노래도 함께 해방된 1945년 8.15 광복. 광복 이후 최초, 최고의 히트곡으로 불리는 ‘신라의 달밤’과 남북 분단의 아픔을 그린 ‘가거라 삼팔선’ ‘고향초’ 등이 이때 만들어진다.

‘신라의 달밤’은 본래 일제 강점기 당시에 처음 만들어진 노래로 원곡의 제목은 ‘인도의 달밤’. 무대에서만 불리어지던 이 노래는 ‘이제 광복도 되었으니까 우리 것을 되찾겠다.’는 의지로 작사가 유호를 통해 제목과 노랫말을 바꾼 뒤 신라를 배경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바로 일제에 의해 잃었던 우리의 역사와 말을 되찾기 위한 의지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이 ‘신라의 달밤’의 빅히트를 계기로 박선생은 직접 럭키레코드사를 설립한다. 럭키 1호 음반인 '신라의 달밤'을 시작으로 '유호-박시춘-현인' 콤비가 탄생하고 '고향 만 리'-'비 나리는 고모령'-'럭키 서울' 등을 잇달아 히트시킨다. ‘고향초(송민도)’, '낭랑18세(백난아)' 등도 모두 이 시기에 발표된 명곡들. 당시 우리나라 음반 산업은 일본 레코드사들이 모두 철수한 뒤라서 이 땅은 말 그대로 불모지였다. 물자 부족으로 인한 열악한 환경 또한 매우 어려웠다. 이때 럭키레코드사직접 설립, 음반을 직접 제작했다. 47년 5월, JODK(이후 중앙방송국, 현 KBS)의 전속악단의 상임 지휘자를 맡아 활동했고 '칠천국(七天國)', ‘은방울쇼' 단체를 구성해 전국 순회공연을 다녔다. 박시춘은 광복과 더불어 비로소 자신의 의지를 한껏 펼쳤다.

[1950년-1] 6.25 한국전쟁과 전쟁가요, ‘좋은 군가는 대포소리에도 지지 않는 예술적 무기’ 1950년, 한국전쟁 와중에도 박시춘의 창작활동은 멈추지 않는다. '육군 제1훈련소가'를 비롯해 ‘전우야 잘자라', ‘승리의 노래’, ‘임 계신 전선' '전선야곡' 등을 발표, 군의 사기를 높였고 아울러 전쟁터에 가족을 떠나보내야 했던 가족들이 심정을 노래에 담았다. 이러한 노래들은 일선과 후방의 연대감을 고취시키면서 포성소리와 함께 한반도에 넘쳐흘렀다. ‘좋은 군가는 대포소리에도 지지 않는 예술적 무기’임을 증명해보인 이 진중가요들은 전쟁에 상처 입은 국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었다. 전 국토의 4분의 3이 전쟁터로 변하고 전 국민이 전쟁터로, 또 피난민으로 내몰리던 이때 연예인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모두들 군예대에 들어가 ‘군번 없는 용사’로 병사들과 함께 전쟁터를 누볐다. 박시춘은 국방부 정훈국 직속의 문예중대 2소대장과 제주 모슬포에 위치한 육군 제1훈련소 군예대장을 맡아 활동했다. 군 위문을 위해 155마일 전선을 스물일곱번이나 누비는 등 '군번 없는 지휘관'으로써 군사기 고취에 큰 공을 세운 박시춘은 이후 종군연예인공로패, 문화공보부장관 공로상(1967년), 제6회 대한민국 연예대상을 수상했다.

[1950년대-2] 오향영화사 설립, 영화주제가 시대 개막 전쟁의 상흔이 채 가라앉지 않았던 50년대 후반. 1953년 휴전 이후 대중음악은 빠른 속도로 발전해갔다. 서구문화가 본격 상륙하면서 ‘춤바람 열풍’과 함께 맘보 등 경쾌한 리듬의 다양한 곡들이 등장,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샌프란시스코’ ‘봄날은 간다’ 등을 크게 히트시킨 1958년, 박시춘은 직접 오향영화사를 설립한다. 특히 '오향'은 제작하는 영화마다 영화주제가를 삽입, 영화음악의 또 다른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남성 넘버원', '오부자의 노래', '가는 봄 오는 봄' 등이 그 것으로 이를 계기로 ‘영화에는 반드시 주제가가 있어야 한다’는 등식을 제시하기도 했다. 전 가족이 영화에 출연하는 기록을 남긴 '딸 칠형제’를 비롯해, '가는 봄 오는 봄', '청춘쌍곡선' '오부자' ‘육체의 길’ 등으로 승승장구하던 영화사는 '장미의 곡(曲)' 개봉 날 터진 4.19로 인해 관객동원에 실패하면서 촬영소가 부도가 나는 등 악재가 겹쳐 문을 닫는 가슴 아픈 일화도 있었다. 영화주제가 시대의 개막을 알린 이 노래들은 궁핍했던 시절을 이겨낸 소중한 문화유산들이다.

[1960년대]‘소리의 혁명, 장르 다양화’, 한국연예협회 초대 이사장 맡아 4.19로 시작되어 5.16으로 이어지며 시작된 1960년대, 5.16 이후 각종 가요단체들이 한국연예협회로 통합되었고 62년 방송윤리심의위원회가 발족했다.

박시춘은 광복 후 방송국 경음악 단장, 63년 10월에 창립된 연예협회 초대 이사장, 한국가요작가동지회장 등 그는 음악활동 외에도 연예계의 권익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57년부터 레코드가 SP에서 LP(long playing microgrove record)로 대체되고 기기도 축음기에서 전축으로 바뀌는 등 일대 혁신을 몰고 온 60년대 들어 가요계의 가장 큰 변화는 ‘소리의 혁명’. 1963년부터 LP가 10인치 크기에서 앞 뒤 여섯 곡 씩 담을 수 있는 12인치 크기로 제작되었고 64년부터 스테레오 음반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이 무렵 ‘벽오동 심은 뜻은’, ‘피리 불던 모녀고개’ ‘돌지 않는 풍차’, ‘우중의 여인’, ‘고모령을 넘을 때’ 등 영화주제가를 발표하는 등 ‘소리의 혁명, 장르의 다양화’로 대변되는 60년대, 대중음악계를 리드했다.

[1970년대] 대중음악의 선구자, 가요인들의 권익을 위해 앞장 통기타, 청바지, 생맥주로 상징되는 '청년문화'의 전성시대가 펼쳐지던 70년대에 들어서면서 박시춘은 본격적으로 음악저작권협회와 한국가요작가협회 등을 이끌며 대중음악인들의 권익보호 활동에 앞장선다.

'일자상서(김부자)' '너 하나만을(이상열)' ‘사나이가 울고갈 때(배성)’ 등의 히트를 마지막으로 월남공연을 비롯한 각종 공연활동을 활발히 펼치던 1973년. 10월 17일부터 나흘간 ‘작곡생활 42주년 공연-박시춘 Show 대연예제전’이 대한극장에서 펼쳐진다. 당시 42주년 기념공연이라는 자체가 한국대중음악사에 처음 등장했을 정도로 그의 음악생활은 한국 대중음악사와 궤를 같이 한 개척자이자 선구자였다. “나의 이 노래를 기꺼이, 그리고 영원히 사랑했던 이 땅의 국민들께 드립니다.”라는 당시 무대인사는 지금까지도 이 땅의 모든 음악인들이 남기고 싶어 했던 상징적인 명언으로 남아있다. 이 42주년 기념음반을 나훈아와 손잡고 취입한 것과 함께 박시춘 멜로디를 연주한 경음악음반이 붐을 이뤘다. 백설희, 이미자, 패티김, 배호, 조영남, 은방울자매, 조미미, 바니걸스, 정종숙, 박일남 등을 비롯한 많은 가수들의 리메이크 음반을 발표, 러시를 이뤘다. 또한 ‘고향초(홍민)’가 새롭게 리메이크 되어 통기타 세대들에게도 사랑받았고 박시춘의 3남인 박재정은 유익종과 듀엣 ‘그린빈스(산과들)’를 결성, 2세 가요인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1980년대~1990년대] 리메이크 붐, 다양한 대중가요의 공존시대 1982년, 대한민국 대중음악계 인물 최초로 국민문화훈장 보관장 서훈받은 박시춘. 작곡활동 외에도 대중음악의 권익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던 만큼 사회적 영향력과 공헌도가 높았으며 동시에 수많은 대중가요인들의 추앙을 받는 인물이었다.

박시춘이 남긴 노래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활발히 재조명된다. 옛가요 전문 프로그램인 KBS-1TV '가요무대‘에서 8백회 기념으로 펴낸 ‘가요무대 100선집’에는 박시춘의 곡이 무려 15곡이 수록되어 있고 또한 80년대에 mbc가 조사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 20선’에 무려 6곡이 포함되었을 정도였다. 그의 노래들이 조용필, 하춘화, 김정호, 김연자, 주현미, 윤복희 등에 의해 꾸준히 리메이크되는 가운데 '낭랑 18세(한서경)', '세상은 요지경(신신애)', '봄날은 간다(장사익, 한영애 등)' 등등 아날로그 음원이 디지털로 바뀌는 80년대를 지나면서도 꾸준히 사랑받을 정도로 박시춘의 멜로디와 화성, 리듬감은 세대와 시대를 초월한다. 한국인들만의 정서를 묶은 가락을 찾기 위해 평생을 바친 인물, 박시춘은 대중문화의 소중한 유산을 남기고 1996년 6월 30일, 조용히 눈을 감는다. 이제 박시춘이 없는 한국 대중예술, 그의 노래가 없는 우리 한국대중음악사를 말할 수 없다. 이렇듯 시대의 흐름을 국민들과 함께해온 선생이 남긴 노래들은 곧 우리 국민들과 함께 해온 삶, 그 자체였다.

[2000년대] 온라인 시대에도 여전히 울리는 한류의 뿌리, 박시춘 가락 2000년대 대한민국의 대중음악은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통해 또 다른 진화의 길로 들어선다. MP3의 등장으로 음반의 시대에서 음원의 시대로 음악시장이 변하며 동시에 시간 장소의 구애 없이 어디서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아울러 우리 대중음악은 세계화의 물결을 타기 시작, '한류' 붐의 진원지가 되며 전 세계적으로 그 열풍이 이어졌다. 이와 때를 같이해 우리 대중음악의 뿌리에도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박시춘 노래비 또한 지난 90년대 ‘비 내리는 고모령(1991년 대구)’, ‘서귀포 칠십리(1997년 서귀포)’에 이어 2천년대 들어서도 ‘신라의 달밤(2000년 경주)’ ‘고향초(2000년 고성)’ ‘애수의 소야곡(2001년 진주)’ ‘굳세어라 금순아(2003년 영도)’ ‘서귀포 칠십리(2004년 서귀포)’ ‘임 계신 전선(2007년 강화)’ 등 전국 각지에 박시춘 노래비가 건립되고 또한 2002년 밀양에 생가도 복원되었다. 또한 박시춘의 삶과 음악을 재조명하는 학술심포지엄이 2009년에 개최된 데 이어 지난해에는 박시춘 탄생1백주년기념 헌정음악회가 후배들에 의해 펼쳐졌다. 이 헌정음악회에서는 이미자로 부터 보아, 수퍼주니어까지 세대별 가수들이 등장해 성악, 재즈, 포크, 판소리 등으로 박시춘 음악을 새롭게 편곡, 다양한 장르로 재현해 호평을 받았다. 이렇듯 민족의 격동기와 함께 시대의 아픔을 어루만져준 작곡가, 그리고 시대의 감성을 가장 잘 표현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는 박시춘 가락은 지금도 새롭게 편곡되어 여전히 우리 곁에 흐르고 있다.

박시춘과 함께 한 한국대중음악사의 빛나는 얼굴들 100인’ 또한 ‘작곡가 박시춘과 함께 한 한국대중음악사의 빛나는 얼굴들 100인’ 특별전도 노래박물관 1층 호반갤러리에 전시될 예정으로 이 ‘박시춘 명예의 전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동시에 한국대중음악사를 빛낸 인물이기도하다. 그 주인공들은 [1930년대] 고복수 김정구 남인수 박향림 송달협 이난영 이인권 이화자 최병호 [1940년대] 고운봉 백난아 백년설 송민도 원방현 장세정 진방남 현인 [1950년대] 금사향 김시스터즈 도미 박경원 박단마 박재홍 방운아 백설희 손인호 신세영 신카나리아 심연옥 정향 황금심 황정자 [1960년대] 고대원 김용만 남강수 남일해 남상규 남진 문주란 박건 박재란 배호 백야성 안다성 안정애 오기택 유주용 이미자 쟈니브라더스 패티김 조애희 진송남 최숙자 한명숙 [1970년대] 금과은(투에이스) 김부자 김태희 나훈아 바니걸스 박일남 방주연 배성 여운 이상열 이성애 이영숙 조미미 조영남 하춘화 홍민 [1980년대~1990년대] 김도향 김연자 김정호 심수봉 조용필 윤복희 주현미 장사익 전영록 한서경 한영애 [2000년대] 보아 수퍼주니어 김범수, 그리고 길옥윤 김부해 김인배 김해송 김희갑 박춘석 백순진 손로원 손목인 손석우 신중현 심성락 유호 이봉룡 이봉조 이부풍 조명암 등 작가, 연주인도 100인에 포함되어 있다. 아울러 박시춘 유품전과 함께 박시춘이 남긴 음반에 담긴 노래와 영화주제가를 돌아보는 회고전도 노래박물관 야외 회랑에서 펼쳐질 예정이다.

매달 박성서의 토크콘서트 개최, 시대별 박시춘 음악과 한국대중음악사 재조명 이벤트도 풍성하다. 박시춘 탄생1백주년 탄신일인 10월 28에는 특별 행사로 ‘봄날은 간다’ 노래비 제막 및 ‘박시춘 평전’ 출판기념회와 더불어 오후 네시부터 축하공연이 펼쳐질 예정이다. 이 무대에 나설 초대가수는 원로가수 손인호 금사향을 비롯해 김도향 전영록 그리고 모던풍 음악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색다른 복고를 선보이는 팀인 8인조 무드살롱 외 다수가 출연해 축하무대를 꾸민다. 또한 ‘1930년대 유행가에서 2000년대 한류까지’박시춘의 삶과 음악을 재조명 & 재평가하는 ‘박성서의 토크콘서트’ 또한 매달 한차례 노래박물관 매직홀에서 펼쳐질 예정으로 8월3일 오픈 공연은 금사향(원로가수), 나나(재즈가수), 박창조(박시춘 선생의 손자)가, 그리고 9월14일 ‘신라의 달밤-광복에서 한국전쟁까지’ 편에서는 한국 펑크록계를 대표하는 데뷔 16년차 록밴드 ‘타카피 (김재국, 김태일, 김남규, 이성식)’가 출연, 당시 음악을 재해석해 선보인다. 이어 10월9일(수) ‘봄날은 간다-소리의 혁명, 대중가요의 르네상스 50~60년대를 가다’ 편에서는 기타와 보컬의 조화, 라듀오(기타리스트 하타슈지+보컬리스트 난아진)가 출연할 예정. 이어 11월16일(토) ‘고향초-70년대 통기타시대의 한국대중음악’ 편에서는 지난해 2012년 대한민국연예예술상 여자포크싱어상을 수상한 ‘라나에로스포‘의 마지막 멤버 김희진양이 설 예정이며 12월14일(토) ‘1980년대 이후 2000년대 한류까지’ 편에서는 다양한 색채의 어쿠스틱 팝사운드 구사하는 차여울 밴드가 무대를 장식한다. 이 박성서의 토크콘서트는 해당일 오후 5시부터 노래박물관 매직홀에서 펼쳐질 예정이다. 탄생 1백주년을 맞는 작곡가 박시춘 특별전 ‘박시춘과 함께 하는 한국대중음악사 여행’. 시대의 감성을 가장 잘 표현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는 박시춘 가락, 탄생 1백주년을 맞아 그의 음악이 다시 재조명되고 재평가되길 기대해본다.

http://www.newsmaker.or.kr/news/articleView.html?idxno=3180 :

탄생 100주년을 맞는 작곡가 박시춘, 삶과 음악의 시대별 재조명 & 재평가

우리나라 가요에 있어 고유명사가 아닌 대명사 격인 이름, 박시춘

2012년 04월 02일 (월) 15:17:31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webmaster@newsmaker.or.kr

‘박시춘’이란 이름은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에 있어서 고유명사가 아니라 대명사 격인 이름이다. 작곡가 박시춘, 그리고 가요1세대 작곡가들인 전수린, 손목인, 김해송 등의 등장은 마침내 우리나라에서 민요의 자리에 대중가요가 대신 자리하게 되는 신문화의 새 장(章)이 열렸음을 의미한다.

▲ 민족의 격동기와 함께 시대의 아픔을 어루만져준 작곡가 박시춘 선생

작곡가 박시춘 선생이 남긴 3천 여곡에 달하는 노래와 악상은 근대 한국 대중가요의 초석이자 근간을 이루고 있고 실제로 옛가요 전문 프로그램인 KBS-1TV '가요무대‘에서 8백회 기념으로 펴낸 ‘가요무대 100선집’에는 박시춘 선생의 곡이 무려 15곡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80년대에 mbc가 조사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 20선’에 무려 6곡이 포함되었을 정도였다. 시대의 격동기를 관통하며 국민들로부터 여전히 애창되어온 그의 노래는 이렇듯 여전히 한국인의 가슴 속에 살아 있다. 올해로 탄생 1백주년을 맞는 작곡가 박시춘 선생을 기리는 크고 작은 사업이 현재 진행 중이다. 작곡가 박시춘 선생의 시대별 삶과 음악을 재조명해본다.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우리나라 가요에 있어 고유명사가 아닌 대명사 격인 이름, 박시춘 ‘한 나라의 문화를 가장 빠르게 이해하려면 먼저 그 나라 국민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를 배우라’는 말이 있다. 그러한 점에서 박시춘 선생, 그리고 그가 남긴 노래는 바로 우리나라를 알리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이기도 한 셈이다. 박시춘 선생의 첫 작곡 데뷔곡은 1935년 8월에 발표한 '희망의 노래(홍개명 사/김창배 노래)'다. 시춘(是春), 이 이름의 의미가 '늘 봄'이라는 뜻. 작곡 데뷔작 ‘희망의 노래’ 제목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기도 하다. 이어 일제시대, 그 암울한 시대에 민족의 애환을 달래준 ‘애수의 소야곡’, 광복의 기쁨을 노래한 ‘럭키 서울’, 남북 분단의 아픔을 그린 ‘가거라 삼팔선’, 그리고 6.25 한국전쟁 당시에 발표된 ‘전우야 잘 자라’를 비롯해 당시 피난민들에게 삶에 대한 용기와 희망을 북돋워준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 일제 강점기로부터 8.15 광복, 6.25 한국전쟁을 거쳐 전쟁이 휩쓸고 간 잿더미 위에서 그 상흔을 복구하려는 50, 60년대 우리네 궁핍했던 삶의 현장에 이르는 격동기에 이 노래들은 격동기를 관통, 시대의 아픔을 함께 했다. 특히 어려울 때일수록 힘이 되어준 이 노래들은 지친 국민들에게 전해주는 일종의 응원가였다. 박시춘 선생은 대중가요의 힘이 얼마나 큰 지를 잘 알려주신 인물이기도 하다.

2. 유년시절, 풍류 속에서 자라며 예인 기질 눈떠

박시춘 선생은 1913년 10월 28일, 경남 밀양에서 출생했다. 본명 순동(順東). 선친 ‘남포’는 밀양에서 5백 섬지기 지주이자 가무(歌舞)를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권번(券番)'을 운영했던 분으로 특히 당대의 명창 송만갑, 이화중선, 이동백 등과 어울릴 만큼 국악에 조예가 깊은 인물이었다. 특히 구전으로 불리던 '밀양아리랑'의 가락을 채보, 지금의 형태로 정리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이렇듯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았음직한 음악적 유전 인자, 그리고 철나기 전부터 풍류 속에 자랐던 성장 배경이 그의 예인 기질을 일찌감치 눈 뜨게 했을 것임이 충분히 짐작된다. 이것이 그의 멜로디 속에 우리의 민요가락이 지속적으로 발견되는 이유이고 또 우리 전래의 전통가락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해 ‘한국적 트로트’라는 박시춘만의 멜로디를 완성한 단초이기도 하다.

어린 순동, 즉 박시춘 선생이 보통학교 1학년 때 부친이 타계, 한순간 가세가 기운다. 그러나 이후 우리 가요계에 대명사로 우뚝 선 선생의 위치가 그러하듯 이 소년은 유년시절부터 남달랐다. 어느 날 어린 순동은 한 카페에서 들려오는 유성기 소리에 발을 멈춘다. 처음 듣는 이 신기한 소리에 매료된 소년은 결국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매일 듣기 위해 카페에서 잔심부름을 거들기 시작했고 또 공짜로 영화구경을 하기위해 영화전단지를 뿌리고 다니는 등 음악광, 영화광이었다. 훗날 박선생은 이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통해서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가난의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결국 이 소년은 불과 열두 살 때 카페 주인을 따라 어머니 몰래 고향을 떠나면서 험하고 긴 음악여정을 시작한다. 열네 살 되던 해부터는 전국을 돌며 영화를 상영하는 순업대를 따라 다니며 낮에는 북을 치고 밤에는 영사기를 돌렸고 또 쉬는 동안을 이용해 나팔, 바이얼린 등 악기를 익히며 유랑극단에 적응해나갔다. 떠돌이 순업대 생활 중 많은 가요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당시 시에론레코드사에서 문예부장을 맡고 있던 이서구, 강사랑, 이봉룡 선생 그리고 박영호 선생 등을 알게 되면서 결국 작곡가로 입문, 당시 조선 최대 음반사인 오케레코드 전속작곡가로 발탁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대표곡 ‘애수의 소야곡’을 비롯해 ‘꼬집힌 풋사랑’, ‘눈 오는 네온가’, ‘항구마다 괄세더라’, ‘울며 헤진 부산항’, ‘서귀포 칠십리’ 등의 서정적인 멜로디부터 ‘왕서방 연서’, ‘총각진정서’, ‘세상은 요지경’ 같은 만요, 그리고 ‘신민요 풋난봉’, ‘산호빛 하소연’ 등 신민요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노래들을 발표, 손목인, 김해송과 함께 오케레코드 3대 작곡가로 자리매김, 달러박스로 부상하며 전성기를 구가한다.

▲ 애수의 소야곡’의 원곡, ‘눈물의 해협’ 가사지

이 무렵 오케레코드를 통해 음반으로 발표한 곡은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도 현재 280 여 곡이 넘는다. 당시 열악한 환경을 감안한다면 대단히 왕성한 활동을 펼친 것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또한 당시 무대에서만 불리어지던 노래들까지 합친다면 곡수는 그보다 훨씬 많아질 것이다. 이러한 우리 가요 초창기의 소중한 자료들도 더 늦기 전에 발굴, 채보해서 우리 가요사를 제대로 복원해야 함도 중요한 연구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점에서 결국 우리 가요사 연구의 끝은 ‘박시춘 작곡 총 목록집’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특히 박시춘 선생의 대표곡으로 사랑받고 있는 노래, 나라 잃은 슬픔을 탄한 명곡 ‘애수의 소야곡’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참고로 이 노래의 원곡은 ‘눈물의 해협’으로 처음 발표된 노래다. 이 노래 역시 당시 나라 잃은 슬픔을 극명하게 노래하고 있다. 참고로 ‘눈물의 해협’의 가사는 이렇다.

현해탄 초록물에 밤이 나리면 임 잃고 고향 잃고 헤매는 배야 서글픈 파도 소리 꿈을 깨우는 외로운 수평선에 깊어 가는 밤

임 찾어 고향 찾어 흐른 지 십년 몸이야 시들어도 꿈은 새롭다 아득한 그 옛날이 차마 그리워 물 우에 아롱아롱 님 생각이다

꿈길을 울며 도는 파랑새 하나 님 그려 헤매이는 짝사랑인가 내일을 묻지 말고 흘러만 가랴 님 없는 이 세상에 기약 풀어라 (김상화 작사, 박시춘 작곡, 1936년, 시에론레코드사)

선생은 작곡 활동 뿐 아니라 '조선악극단(朝鮮樂劇團-Okeh레코드사의 직영 단체)'에서 ‘아리랑보이스’를 결성, 현경섭, 송희선, 김해송 (玄警燮 宋熙善 金海松), 이복본 등과 함께 중창과 판토마임, 그리고 악기 연주를 겸한 여흥을 무대에서 펼쳐 보일 정도로 만능엔터테이너였다. 아울러 전국 각지는 물론 멀리 만주로까지 이어지는 공연활동을 통해 고향을 잃고 떠도는 민족의 설움을 보다듬어 주었다. 이러한 박선생의 활동은 이후 더욱 빛을 발한다.

▲ 열악한 시대에 펼쳐보였던 음반 취입광경. 지휘자는 박시춘 선생

3. 광복, 그리고 이념의 혼란기 우리의 말과 노래도 함께 해방된 1945년 광복. 광복 이후 최초의 히트가요라 불리는 ‘신라의 달밤’, 그리고 남북 분단의 아픔을 그린 ‘가거라 삼팔선’, ‘고향초’ 등이 이때 만들어진다. ‘신라의 달밤’은 본래 일제 강점기 당시에 처음 만들어진 노래로 원곡의 제목은 ‘인도의 달밤’이었다. 무대에서만 불리어지던 이 노래는 박시춘 선생으로부터 ‘이제 광복도 되었으니까 우리 것을 되찾겠다.’는 의지로 작사가 유호 선생을 통해 가사와 노랫말을 바꾼 뒤 신라를 배경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바로 일제에 의해 잃었던 우리의 역사와 말을 되찾기 위한 의지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 열악한 시대에 펼쳐보였던 음반 취입광경. 지휘자는 박시춘 선생

이 ‘신라의 달밤’의 빅히트를 계기로 박선생은 직접 럭키레코드사를 설립한다. 럭키 1호 음반인 '신라의 달밤'을 시작으로 '유호-박시춘-현인' 콤비가 탄생하고 '고향 만 리'-'비 나리는 고모령'-'럭키 서울' 등을 잇달아 히트시킨다. ‘고향초(송민도)’, '낭랑18세(백난아)' 등도 모두 이 시기에 발표된 명곡들이다.

▲ 민요, 재즈, 트로트 등 다양한 장르를 선보였던 30년대 활동기록들

당시 우리나라 음반 산업은 일본 레코드사들이 모두 철수한 뒤라서 이 땅은 말 그대로 불모지였다. 물자 부족으로 인한 열악한 환경 또한 매우 어려웠지요. 당시 함께 럭키레코드사 문예부장으로 계시던 작사가 유호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박선생은 심지어 참기름 짜던 압축기에 일본인이 버리고 간 음반을 고물상에서 수집해 판을 찍었다고 한다. 일본SP음반 위에 압축기를 눌러 판을 찍어냈기 때문에 바늘이 몇 바퀴 돌다보면 그루브, 즉 홈이 닳아 노래 도중에 갑자기 일본노래가 튀어나오기도 했다는 우스갯소리도 생생히 전한다. 보통 사람들이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이러한 땀과 열정은 지금의 한류로 성장하게 된 우리 가요의 원동력이 되어준 것이리라. 광복 이후 47년 5월, JODK (이후 중앙방송국, 현 KBS)의 전속악단의 상임 지휘자를 맡기도 했고 가수 남인수와 함께 만든 '칠천국(七天國)', 그리고 ‘은방울쇼' 단체를 구성해 전국 순회공연을 다닌 것도 이 무렵으로 박선생은 광복과 더불어 비로소 자신의 의지를 한껏 펼쳤다. 보통 박시춘 선생은 한 시대에 걸쳐 1인 몇 역, 그 이상의 활발한 활동을 펼친 것이다.

4. 진중가요로 전환, 전, 후방에 함께 울려 퍼진 노래들

▲ 당시 음반광고 전단지

‘좋은 군가는 대포소리에도 지지 않는 예술적 무기’ 1950년, 한국전쟁 와중에도 그의 창작열은 불꽃처럼 빛을 발한다. 전 국토의 4분의 3이 전쟁터로 변하고 전 국민이 전쟁터로, 또 피난민으로 내몰리던 이때 연예인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모두들 군예대에 들어가 ‘군번 없는 용사’로 병사들과 함께 전쟁터를 누볐다. 박시춘 선생은 이때 국방부 정훈국 직속의 문예중대 2소대장과 제주도 모슬포에 위치한 육군 제1훈련소 군예대장을 맡아 활동했다. 전쟁 중에도 그의 창작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육군 제1훈련소가'를 비롯해 ‘전우야 잘자라', ’승리의 노래‘, ’님 계신 전선' '전선야곡' 등을 발표, 군의 사기를 높였고 아울러 전쟁터에 가족을 떠나보내야 했던 가족들이 심정을 노래에 담았다. 이러한 노래들은 일선과 후방의 연대감을 고취시키면서 포성소리와 함께 한반도에 넘쳐흘렀다. ‘좋은 군가는 대포소리에도 지지 않는 예술적 무기’임을 증명해보인 이 진중가요들은 전쟁에 상처 입은 국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이전 박시춘 선생의 가락은 매우 서정적이고 또 만요적인 요소가 가득했다면 이 무렵은 진중가요를 통해 힘차고 남성적인 변화한다. 불과 몇 년 차이로 박시춘 음악은 시대상황에 따라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박시춘 선생은 노래를 만드는 데 늘 의미를 부여했다. 광복을 기념해 복고풍으로 만든 노래 '신라의 달밤', 해방의 기쁨을 노래한 '럭키 서울', 그리고 한국전쟁 중에 만들어진 ‘전우야 잘자라’ 등이 그렇듯 제주 모슬포의 육군제1훈련소 시절에는 '제주도 온 김에 이곳에 노래하나 떨어뜨리고 가자'고 작사가 유호선생과 의기투합해 만든 노래가 ‘삼다도 소식’, 그리고 잿더미 위에서 삶에 대한 위지를 심어준 ‘굳세어라 금순아’, 피난 수도 부산을 떠나며 만든 노래가 '이별의 부산 정거장'이다. 이 노래들은 모두 역사의 현장에서 생생히 기록된 문화유산들이다. 한국사의 비극을 노래로 증언한 우리 근대사의 소중한 유산이기도 합니다. 이 노래들은 당시 어느 신문해설이나 삐라 문구보다도 현장이 살아 숨 쉬는 빛나는 대중문화의 산물인 것이다. 군 위문을 위해 155마일 전선을 스물일곱번이나 누비는 등 '군번 없는 지휘관'으로써 군사기 고취에 큰 공헌을 세웠던 박시춘 선생은 이후 종군연예인공로패, 문화공보부장관 공로상(1967년), 제6회 대한민국 연예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5. 영화에는 반드시 주제가가 있어야 한다는 등식 만들어

▲ 70년대 월남위문공연 중 한 컷. 우측은 음악과 함께 평생 반려자가 되어주었던 부인 김예비(영화배우 당시 예명 김현숙) 여사

전쟁의 상흔이 채 가라앉지 않았던 50년대 후반. 1958년에는 오향영화사를 설립한다. 특히 '오향'은 제작하는 영화마다 영화주제가를 삽입, 영화음악의 또 다른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남성 넘버원', '오부자의 노래', '가는 봄 오는 봄' 등이 그 것으로 이를 계기로 영화에는 반드시 주제가가 있어야 한다는 등식을 제시하기도 했다.

전 가족이 영화에 출연하는 기록을 남긴 '딸 칠형제’를 비롯해, '가는 봄 오는 봄', '청춘쌍곡선' '오부자' ‘육체의 길’ 등으로 승승장구하던 영화사는 '장미의 곡(曲)' 개봉 날 터진 4.19로 인해 관객동원에 실패하면서 촬영소가 부도가 나는 등 악재가 겹치면서 몰락, 장충동 집을 팔아 빚을 갚아야 했고 급기야 연탄불을 피워 유서를 쓰는 소동까지 벌어지는 가슴 아픈 일화도 있었다. 70년대 들어 이후 산업화와 세태 변화를 잘 묘사한 대중문화의 기록자로 남을 업적은 영화주제가 '돌지 않는 풍차' 그리고 '일자상서' '너 하나만을' 등의 히트곡을 마지막으로 그는 이후 본격적으로 창작인들을 위한 권익보호 활동에 앞장 선다.

6. 음악적 선구자, 가요인들의 권익을 위해 앞장

▲ 회갑기념, ‘작곡생활 42주년 공연, 박시춘 Show 대연예제전’ 프로그램. (1973. 10. 17~20, 대한극장)

광복 후 방송국 경음악 단장, 63년 10월에 창립된 연예협회 초대 이사장, 한국가요작가동지회장 등 그는 음악활동 외에도 연예계의 권익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또한 1982년에는 대한민국 대중가요계 인물로는 처음으로 문화훈장 보관장을 수여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만큼 음악 실력이 탁월했고 사회적 영향력과 공헌도가 높았으며 동시에 수많은 대중가요인들의 추앙을 받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만년에는 녹내장으로 시력을 잃고 4년의 세월을 보냈는데 자연히 바깥출입이 부자유스러웠지만 원로작사가, 작곡가들의 모임인 '한국가요작가동지회'에 참석하면 특유의 해박한 '풍류 적 객담'으로 모든 이들을 즐겁게 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대중들, 특히 작가들과 얼마나 따뜻한 교류를 갖고 지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는 아무리 간단한 가락이라도 되씹어보고 다시 다듬고 하는 진지한 태도로 작품에 임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특징 중 하나는 노래의 멜로디, 물론 노래의 전주나 간주에도 세심하게 신경을 쓴다는 것. 노래가 주는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 전주곡이라고 늘 강조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전해진다. 아버지에 길을 따라 버클리음대에서 작곡을 전공한 막내아들 박재정씨는 ‘아버지 노래의 특징은 완벽하고 짜임새 있는 곡 구성’이라며 ‘전주나 간주에까지 완벽하게 형식을 갖췄기 때문에 편곡이 특히 어렵다’는 점을 토로하기도 했다. 실제로 박시춘 선생은 편곡을 제3자에게 맡기더라도 반드시 세심한 부분까지 본인이 마지막 손질하고 다듬는 작곡가였던 그는 96년 6월30일 저녁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영결식은 '사단법인 한국연예인장'으로 치러졌다.

7. 우리 민족의 가슴에 영원히 울려 퍼질 박시춘 가락 온 국민에게 사랑받는 그의 노래들은 비교적 최근에 와서도 '낭랑 18세', '세상은 요지경', '봄날은 간다', '신라의 달밤’, ‘굳세어라 금순아’ 등이 꾸준히 리메이크, 또다시 히트될 정도로 박시춘 선생의 멜로디와 화성, 리듬감에서 보여준 탁월한 재능은 세대와 시대를 초월한다. 사회적 관심에서 멀어진 적이 없을 정도로 시대의 아픔과 함께 해온 그의 노래, 한국인들만의 정서를 묶은 가락을 찾기 위해 평생을 바친 인물, 그가 남긴 주옥같은 노래들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대중예술의 소중한 유산이기도 하다. 그가 없는 한국 대중예술, 그리고 그의 노래가 없는 우리 가요사를 말할 수 없다. 이렇듯 시대의 흐름을 국민들과 함께해온 선생의 업적이 결코 헛되지 않게 평가되어지길 바란다. 아니 평가, 그 이전에 그가 남긴 노래들은 곧 우리 국민들과 함께 해온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 한국작가동지회 회원들과의 한 때

선생은 73년10월 17일부터 나흘간 대한극장에서 가진 ‘회갑기념, 작곡생활 42주년 공연-박시춘 Show 대연예제전’ 무대에서 이러한 말을 남겼다. “나의 이 노래를 기꺼이, 그리고 영원히 사랑했던 이 땅의 국민들께 드립니다.”라고. 박시춘 선생은 우리 가슴에 영원히 남을, 국민작곡가다.

http://dbs.donga.com/comm/view.php?r_id=04937&r_serial=01 :

- 추억의 스타 앨범. 이제는 영원히 가버린 세월. 청춘의 화려한 낭만과 감상이 번져있는 그리운 추억. 세월은 흘러 갔지만은 아직도 가슴속에 남아있는 정다운 노래와 함께 그 시절 그 사람의 얘기를 돌이켜 보는 추억의 스타 앨범. 오늘은 작곡가 박시춘 편 입니다. - 세월은 덧없이 흘러 연륜만이 쌓이고 추억이 묻혀있는 강가에 새 봄이 올 적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빛처럼 잊혀지지 않고 들려오는 정다운 노래. 그 정다운 노래를 수도 헤일수 없을 만큼 작곡해 주었던 박시춘. 작곡가 박시춘은 `애수의소야곡`, `총각 지정서`, `항구의 선술집`, `꼬집힌 풋사랑`, `감격시대` 등 잊혀지지 않는 수많은 가요를 만들어 낸 작곡가임과 동시에 남인수, 이난영, 황금심, 고복수, 장수영, 이화자 등 기라성 같은 가수를 길러낸 가요계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1세기 동안에 한 사람 나오기도 힘들다고 하리만큼 총애를 받았던 가수 남인수가 이직 강문수라는 이름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시에른 레코드에서 출반한 `눈물의 해협` 이라는 노래를 만들어 작곡가로서 데뷰한 박시춘. 이 `눈물의 해협`은 다음에 오케 레코드에서 `애수의 소야곡`으로 이름을 바꾸어 히트를 날림으로서 박시춘의 대표곡이 되기도 한 노래 입니다. 박시춘이 처음 작곡했던 `애수의 소야곡` 남인수의 목소리로 들어 봅니다. ♬ 애수의 소야곡 - 남인수 - 일본에서 유명했던 여배우 토도로키 유키코가 아이슈우노우 세레나데로 번역해 부르면서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일본까지 휩쓸었던 이 `애수의 소야곡`을 작곡한 박시춘은 경상남도 밀양이 그의 고향으로 1912년생 4형제 중 둘째로 태어난 박시춘의 본명은 박순동. 박순동은 어렸을 때 부모님을 여위었기 때문에 밀양에 있는 보통학교에 다닌 것이 그의 학력 전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통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음악을 좋아했던 박순동은 7살때 청년회 브라스 밴드에서 드럼을 쳐 갈채를 받기도 했으며,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정든고향을 등지고 드럼을 치며 돌아다니는 유랑극단의 나그네가 됐습니다. - 제가 7살 때 우리 고장의 청년들이 악기를 구입 해가지고 보통학교 그때는 보통학교 입니다. 보통학교 운동회에 연주를 하게 됐는데 북 칠 사람이 없었어요. 어떻게 됐는지 그때부터 리듬은 7살때 부터 알았습니다. 알아가지고 제가 가서 북을 쳤는데 북을 치기는 치는데 저쪽 관중이 멀리서 보니 북소리는 나는데 사람이 안보인단 말이야, 사람이. 그래서 하도 신기해서 어째서 북소리가 나나 하고 와보니 뒤에 앉아가지고 조그만 애기가 앉아가지고 치고 있는걸로 하나도 보이지 않았어요. 그래서요 귀엽다고 해서 모두 그 시골 사람들이 와서 업고 가서 그때 그 노점 장국밥집 비빔밥집이 있습니다. 거기서 점심을 사주고 그런 일이 있습니다. 아마 그래서 제가 그때부터 음악을 좋아하고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14살 때 가출을 했습니다. 가출을 해가지고 쭉 방랑 생활을 하다시피 해서 무슨 영화 활동사진 순업대에 편입해서 영사 기사도 하고 또 음악도 배우고 이렇게 해서 몇번 일본도 수차례 왕래하고 해서 지금까지 이르렀다고 생각 됩니다. - 쓸쓸하고 외로운 유랑생활 5년 후에 소년 박순동은 스무살이 됐고, 뜻밖에도 일본으로 건너 갈 기회가 생겨서 전격적으로 연애 활동의 기반을 닦기 시작 했습니다. 일본 오사카에 있는 중앙음악학원에서 상설 공부를 한 다음 상설관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던 박순동은 예명을 박시춘으로 고치고 처음 내 놓은 것이 `애수의 소야곡`. 거푸 히트곡을 날린 다음 이어서 내 놓은 것이 `왕서방 연서`. 1934년 박시춘 작곡으로 김정구가 불러줬던 노랩니다. ♬ 왕서방 연서 - 김정구 - 나일로니아 레일론 이라는 옷감은 꿈에도 생각을 못하고 모처단이나 호박단 양단 같은 비단이 판을치던 시절. 음식 장사가 아니면은 비단장사로 재미를 톡톡히 보았던 화교들의 탈선을 풍자하는 가사에 코믹한 곡을 붙여 삼척동자까지도 불러 그야말로 히트곡 중의 히트곡이 된 `왕서방 연서`는 오케 레코드와 함께 박시춘, 김정구의 이름을 정상에 올려 놓았으며 박시춘의 전성시대가 막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그때 작곡가 박시춘은 나이 불과 20남짓한 애숭이로 너무나도 어려서 만나는 사람을 실망케 하기도 했으며 역시 18살 밖에 안되는 남인수와 명콤비가 되어 가요계의 군림을 하기 시작 했습니다. 어렸을 때 부터 드럼을 치고 나중에는 바이올린을 켰으며 작곡가로서 대성을 한 박시춘은 일이 끝나면은 반야월, 조춘영 씨 들과 함께 회현동에 있는 낙양집에 들러서 정종 다섯톱을 예사 마시는 애주가이기도 했으며 술에 취하면은 노래를 한 곡조 뽑아 가수들을 무색케 하기도 했습니다. 다재다능하여 팔방미인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하였던 박시춘. 해방 후 상해에서 돌아 온 현인의 히트곡이었던 `신라의 달밤`도 박시춘이 작곡해 주었었습니다. - 초창기의 가요계에 혜성처럼 등장 하면서 `애수의소야곡`, `감격시대`, `왕서방 연서`, `항구의 선술집`, `꼬집힌 풋사랑`, `신라의 달밤`, `비내리는 고모령`, `럭키 서울`, `센프란시스코`, `가거라 삼팔선`, `애정 산맥`, `이별의 부산 정거장`, `삼다도 소식`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히트곡만 300여곡을 작곡하고, 그동안 길러 낸 유명한 가수만도 남인수를 비롯해서 이난영, 황금심, 고복수, 장세정, 이화자, 박향림, 송달협, 김정구, 백설희, 이미자 등 헤일수가 없는 박시춘은 싱그러운 5월의 하늘처럼 파란색을 좋아하며 밤 낚시를 무척 좋아하는 낭만을 가진 사람이기도 합니다. 28세 때 18세의 부인과 결혼해서 지금은 3남 3녀의 아버지요 벌써 두 사위의 장인영감님이기도 한 박시춘은 지구 레코드 전속으로 아직도 노익장을 자랑하고 있으며 한국 연예협회 이사장으로 연예인들의 상호 친목과 권익을 위해서 힘을 기울이는 정열의 사람이기도 합니다. 1953년 수복된 서울에서 히트했던 박시춘 작곡의 `센프란시스코` 백설희가 불러 줍니다. ♬ 센프란시스코 - 백설희 - 1미터 65센치의 자그마한 키에 언제든지 단정하게 빗어 넘긴 앞가르마가 인상적인 작곡가 박시춘은 술을 매우 좋아하지만은 그러나 그 술 보다도 후배를 더욱 사랑하고 애들이 엄마를 더 좋아 한다고 용돈을 주어 가면서 인심을 사기도 하는 로맨스 파파 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이제 늙어서 후배들이 좋은 노래 만들어 내는 것을 지켜나 보아야겠다고 겸손해 하는 박시춘은 정중동의 자세로 작곡 활동을 쉬고있는 중이지만은 그러나 머지않아 그는 또 한번 가요 팬들이 놀랄만한 히트곡을 작곡해 줄 것입니다. - 이제는 영원히 가버린 세월 청춘의 화려한 낭만과 감상이 번져있는 그리운 추억. 세월은 흘러 갔지만은 아직도 가슴속에 남아있는 정다운 노래와 함께 그 시절 그 사람의 얘기를 돌이켜 본 추억의 스타 앨범. 오늘은 박시춘 편으로 지금까지 구성 최호영, 아나운서 원창우 였습니다. (입력일 : 2008.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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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lated with the help of Google Translate:

[I Daily Star in Go Kyu-dae Reporter]


Composer Park Si-chun celebrates his 100th birthday on October 9 at 7:30 pm in Seoul Olympic Hall, the dedication concert “Soya Soya Song 2012” will be held.


The concert is hosted by Korea Singer-Songwriters Association and sponsored by the Ministry of Culture, Sports and Tourism, the Korea Culture and Arts Committee, and the Korea Creative Content Agency. Singer Yoo-yeol takes on the role of Lee Mi-ja, Jang Sa-ik, Joo Hyun-mi, Da Yu-yeol, Kim Bum-soo, Boa, Super Junior K.R.Y., Winterplay and Lee Mi-kyung (Soprano). All the cast members appear as novices to show respect for Park Si-chun and participate in the development of popular music.


Park Chang-jo, the grandson of Park Si-chun, is on the stage as a special guest. Park Chang-jo (17), who is studying music in the United States, sings and plays his grandfather's song.


Park Si-chun has released more than 3,000 songs including Soya's Soya Song, Silla's Moonlit Night, Goodbye Geum Soon-ah, Goodbye Busan Station, Emotional Era, 18-year-old, Hometown Cho, etc. did. Every twist of our modern history has been criticized for capturing the image of a pop song that wept and laughed with the people.


At the concert, videos and materials that show Park Si-chun's music world and life will be released. In addition, the proceeds from this performance will be used to prepare for the establishment of the Park Si-chun Memorial Foundation. Contact 02-706-3570.


http://www.newsmaker.or.kr/news/articleView.html?idxno=4378:


Korean Pop Music History Trip with Park Sung-seo

Friday, August 02, 2013 10:54:23 Newsmaker webmaster@newsmaker.or.kr


A Special Exhibition of “The Journey of Korean Pop Music History with Park Si-chun”

Special Exhibition of Song Museum, Composer Park Si-chun's 100th Birthday

-From the popular songs in the 1930s to the Korean wave in the 2000s

Written by Sung-seo Park (popular critic and journalist)


This year 2013 is also a special year in Korean popular music history. This is because the composer Park Si-chun (1913 ~ 1996), a pronoun rather than a proper pronoun in Korean pop music history, celebrates its 100th birthday. The song and music left by composer Park Si-chun, the root and pillar of Korean popular music history, are the cornerstone and foundation of modern Korean pop songs. His songs, which have been admired by the people through the turbulent times of the times, are still alive in Korean hearts. It is now the root of the current Korean wave. To look back at his life and music is to look back at Korean pop music history. His music and life, which is regarded as the best artist to express the emotions of the times, will be re-examined.


The special exhibition, which is scheduled to be held at the Nami Island Song Museum for the 100th anniversary of its birth, is the exhibition titled “Travel of Korean Pop Music History with Park Si-chun from 1930s to the Korean Wave in 2000s.” I will be in charge of the exhibition from August 3rd to December. This special exhibition at the “Song Museum” on Nami Island will be a valuable opportunity to reflect on our lives and popular culture. Preview the exhibition.


Composer Park Si-chun (1913 ~ 1996) celebrates her 100th birthday.


Recognized as the best composer of the emotions of the times, his songs are still loved by the people and live in the hearts of Koreans. It is now the root of the Korean Wave. His appearance in the 1930s meant that a new chapter of newspaperization was finally opened in which the pop song was replaced by popular songs in Korea.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Soya's Soya Goku' that soothes the nation's love in the gloomy period, 'Silla's Moon Night', 'Lucky Seoul', which sang the joy of independence in the 40s, In addition, 'Jeongwooya's Good Night' and 'Jeongya Gook' announced during the Korean War in the 50s in the 50s, 'Goodbye Geumsunah', 'Busan Station of Goodbye' and 'Spring Day is Going' Etc ... We went through the turbulent period from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o the August 15th Liberation, the Korean War and the Korean War to recover the scars from the ashes that swept through the war.


Park Si-chun, who cried, laughed, and sang with the people, was a kind of cheering song to the tired people. On the 3rd anniversary of the birth, the special exhibition, which is scheduled to be held at the Namiseom Song Museum, 'Travel of Korean pop music history with Park Si-Chun-1 It will be held until December. This special exhibition at the “Song Museum” on Nami Island will be a valuable opportunity to reflect on our lives and popular culture. Preview the exhibition.


A tour of Korean pop music history with Park Si-chun, “From the 1930s to the 2000 Korean Wave,” is a chronicled exhibition that will be displayed in the special exhibition room on the 1st floor of the Song Museum. The era of the 1930s-popular music insurgent song, the 1940s- 8.15 independence liberating Korean and Korean songs, and the inter-Korean division and the 1950s-June 25 Korean War and War Song Artistic weapons that can't be beaten by cannon sound, Established Ohhyang Film History 'Make a theme song must have a theme song', '1960s-Revolution of sound, the first chairman of Korea Entertainment Association in genre diversification', '1970s- Pioneers of popular music, leading the way for the interests of the pop music artists, '1980s-1990s-remake boom, the age of the coexistence of various pop songs', '2000s- the root of the Korean wave that still sounds in the online era, Park Si-chun rhythm' Are exhibited.


[1930s] Pop music period, the age of resistance


The 1930s was a time when Korean popular music began to blossom in earnest. In the 30s, when he introduced various genres such as folk songs, jazz, and trot, Park Si-chun, along with his companion, Kim Hae-song, became one of the three major composers of the Ore Record. So far, more than 280 songs have been confirmed.


Around 1937, when the song `` Soul Water Strait (36 years) '', which was the original song of "Soo So Gok" (Nam In Soo, 37 Years), was used in the broadcast, instead of the term ``fashionable song'' used by the song industry. Enjoyed In addition to the music of sorrow, which was also known as the 'sound board' at the time, 'Powder Love', 'Snowy Neon Street', 'Gunsaeda for each port', 'Crying Hejin Busan Port', ' Songs ranging from lyrical melodies such as Seogwipo Chilsimni, to Wang Wangbang series, Bachelor's Statement, and the world's many composers, and Shin Min-yo including Shin Min-yo Funanbong and San-ho-Bae Ha-yeon did. In addition to composing activities, he was an entertainer who formed 'Arirang Voice' at the Chosun Musical Troupe (,), Hyun-seop Hyun, Song Hee-sun, Kim Hae-song, Lee Bok-bon, along with a midsole, pantomime, and musical performance on stage. In addition, the concerts helped people from all walks of life lost their homeland through performances that continued to Manchuria.


[1940s] The Korean Independence Day and the Seperation of North and South Songs Freed from Korean and Songs


August 15, 1945, liberation of our words and songs. For the first time since the independence, the best hit songs, "Silla's moonlit night" and "Gagara Sampalseon" and "Gohyangcho", which depict the pain of the division of the two Koreas, are produced.


'Silla's Moonlight' was originally created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its original title is 'Indian Moonlight'. The song, which was sung only on stage, was reborn in the background of Silla after the songwriter changed the title and song through Yuho with the will of 'because it is now independence.' It was the product of our history and the will to reclaim the words lost by Japanese imperialism. With the big hit of Silla's moonlit night, Park founded Lucky Records. Beginning with 'Lucky Moon Night', Lucky # 1 album, 'Yuho-Park Si-chun-Hyeon-in' combination is born, and 'Hometown Man Li'-'Ra Na-ri Gomoryeong'-'Lucky Seoul' will be hit one after another. 'Hometown-cho (Songmin-do)' and 'Nangrang 18-year-old (Baek-nan)' are all famous songs released during this period. At the time, the record industry in Korea was withdrawn by all Japanese record companies, so the land was literally barren. The harsh environment due to lack of material was also very difficult. At this time, Lucky Records Co., Ltd. was directly established and produced records. In May 47, he served as the permanent conductor of the exclusive orchestra of JODK (later known as the Central Broadcasting Station, now KBS), and toured nationwide by organizing groups 'Cheoncheonguk' and 'Silver Drop Show'. Park Si-chun finally showed his will with his independence.


[1950-1] 6.25 Korean War and War :

'Good Gunga is an artistic weapon that can't be beaten by cannons'


In 1950, Park Si-chun's creative activities did not stop during the Korean War. Families who had to raise their morale and released their families on the battlefield by releasing the 'Army's First Training Center', 'Well-being Good Night', 'Song of Victory', 'The Pregnancy Front' and 'Front Night Track'. I put my feelings in a song. These songs overflowed the Korean peninsula with the sound of roaring sound, inspiring solidarity between front and back. Proving that "a good ganga is an art weapon that can't be beaten by cannons," these serious songs gave courage and hope to the war-wounded people. When three-fourths of the country turned into a battlefield and the entire nation was driven to battle and refugees, entertainers were no exception, and everyone went to the military and went to the battlefield with soldiers as military soldiers. Park Si-chun served as the 2nd platoon commander of the Liberal Arts Company under the Ministry of Defense Chung Hoon-guk and the military captain of the Army's 1st Training Center located in Jeju Musulpo. Park Si-chun, who has made great strides in encouraging military aircraft as a commander without army numbers, has twenty-seven times the 155-mile front for military exile, and later won the Celebrity Medal of the Arts, Minister of Culture and Information (1967) Won the grand prize.

[1950's-2] Established Ohhyang Film History, Film Theme Begins

The late fifties, when the scars of war did not subside. Since the 1953 armistice, popular music has developed rapidly. With the arrival of Western culture in full swing, a variety of songs with light rhythms such as Mambo and Mambo appeared. To be established. In particular, 'Ohyang' inserted a film theme song into every movie produced to create an opportunity to prepare another biography of film music. 'Men's Number One', 'Obuja's Song', 'Spring Spring,' etc., and this suggests that 'the movie must have a theme song'. In addition to the 'Daughter Seven Brothers' who recorded the appearance of the whole family in the movie, the film companies that were victorious with 'Spring coming spring', 'Youth hyperbolic curve', 'Obuza' and 'Road of the flesh', etc. There were also heartbreaking anecdotes that closed the doors due to bad news, such as the failure of mobilizing the audience due to the 4.19 bursting day. These songs, which the film theme announced the opening of the era, are valuable cultural heritage that survived the time of need.


[1960s] “Revolution of Sound, Diversifying Genre”, First Chairman of Korea Entertainment Association


Since the 1960s and 5.16, which started with 4.19 and continued to 5.16, various music groups were integrated into the Korea Entertainment Association, and the Broadcasting Ethics Review Committee was launched in 1968.


Park Si-chun, the head of the instrumental music station after the independence of Korea, the first president of the Entertainment Association, founded in October 63, and the President of the Korean Music Association, also performed various activities for the interests of the entertainment industry. The biggest change in the music industry in the 1960s, when records were replaced from the SP to the long playing microgrove record (LP) and the instrument changed from the gramophone to the front axis, was the revolution of sound. Since 1963, the LP has been produced in 10-inch and 12-inch sizes that can hold six songs before and after, and from 64, stereo recordings began. Around this time, 'The Revolution of Sounds and Diversification of Genres', such as 'The Wall-Winter Planting Meaning', 'The Fluorescent Mother and Daughter', 'The Windmill Not Spinning', 'The Woman in the Rain', and 'When Gomoryeong Beyond' was announced. In the sixties, represented by, led the pop music scene.


[1970s] Pioneer in Popular Music, Leading the Way for Musicians


Entering the 70s, when the era of youth culture, symbolized by a guitar, jeans, and draft beer, began, Park Si-chun led the Music Copyright Association and the Korean Music Artists Association to take the lead in protecting the interests of popular musicians.

Lastly, he performed hit performances such as 'The Date Letter (Kim Bu-ja)', 'You Only One (Lee Sang-yeol)', 'When the Man Crying (Baesung)', etc.

Park Si-chun was born on October 28, 1913 in Milyang, Gyeongnam. Real name Sundong.

His best friend, Nampo, was a 500-year-old landowner in Milyang, and he ran 'Kwon-Ban', who trains Kamu and trains parasitics. He is especially accustomed to national music such as Song Man-gap, Ewha Jung-jung and Lee Dong-baek. Was a deep figure. In particular, it is also known as a figure that summarizes the rhythm of Miryang Arirang, which was called oral.

It is well understood that the musical inheritance factor inherited from the father and the growth background that grew up in the wind before the season had already opened his toe temperament early.

This is the reason why our folk songs are continuously found in his melody, and it is also the beginning of Park's own melody called “Korean Trot” by reconstructing our traditional traditional songs.


Young Soon-dong, or Park Si-chun, passed away when his father passed away when he was in the first year of regular school.

Since then, however, this boy has been different since childhood, as is the position of the prominent pronoun in our music scene.

One day, young Sundong stops by the sound of a meteor coming from a cafe. Fascinated by this mysterious sound for the first time, the boy finally started to chore at the cafe to listen to the song from the meteor every day, and was a music buff and movie buff, sprinkling a movie leaflet to watch the movie for free.

Later, Park recalled that the song emanated from this meteor period freed him from the shock of his father's sudden death and poverty. Eventually, when he is only 12 years old, he follows the owner of the café and secretly leaves his hometown.

From the age of fourteen, he traveled around the country, following a tour of the film, playing drums during the day, turning the projector at night, and using the breaks to learn musical instruments such as trumpets and violins to adapt to the wandering theater.

During the wandering sundae, many of the characters are met. After learning about Lee Seo-gu, lecturer, Lee Bong-ryong, and Park Young-ho, who were heads of literature at Siron Records, he finally started his career as a composer.

From the lyrical melodies of representative song `` A Soya's Soya '', `` Twisted Foot Love '', `` Near Snowy Neon '', `` Gwangseedera for Every Port '', `` Crownful Busan Port '', `` Seogwipo Chilsimni '' and `` Wangseobang Series '' He released a variety of songs ranging from Bachelor's certificate, 'The world is Yojikyung', and Shin Min-yo including 'Shin Min-yo Punnanbong' and 'Sanho-Bit Ha So-yeon'. Emerges as a dollar box and booms.


▲ Original song of Soo-soo's Soya Song, Lyrics of “Strait of Tears”

At this time, more than 280 songs have been released on the record through the okrecord.

Considering the poor environment at that time, it can be regarded as a very active activity. Also, if you add songs that were only on stage at the time, the number would be much higher. It is also an important research task to discover and collect valuable materials from the early days of our song before it is too late to restore our songs.

In that sense, it may be considered that the end of our song research is 'Park Si-chun's complete catalog.'

In particular, the song loved as a representative song of Park Si-chun's teacher, and the song “Soo Soya's Song”, which is a song of sadness lost in the country, still continues to be heard.


For reference, the original song of this song was first released as 'Strait of Tears'. This song also sings sorrowfully for the lost country. For reference, the lyrics of 'Sea Water Strait' are as follows.


When night falls on the green sea of ​​Hyunhaetan

Im lost, lost home, lost ship

Waking waves and waking dreams

Deep night on a lonely horizon

Im looking for my hometown for 10 years

Even with my body, my dream is new

I miss the faraway days

I think it's Along Along

One blue bird that turns and dreams

I'm drawn to you

Don't ask tomorrow, just flow

Pledge to this world without you

(Written by Sanghwa Kim, composed by Park Si-chun, 1936, Sierra Records)


In addition to composing activities, the teacher formed 'Arirang Voice' at the Chosun Orchestra (directly managed by 朝鮮 樂 劇團 -Okeh Records), along with Hyun-Kyung Hyun, Song Hee-Sun, Kim Hae-Song and Lee Bok-Bon. And it was an all-round entertainer that showed entertainment on the stage.

In addition, through the performances that spread all over the country as well as Manchuria, it relieved the excitement of people who lost their hometowns. Mr. Park's activities shine even more after the ceremony.


▲ The music scene that was unfolded in poor times. The conductor is Park Si-chun


3. Liberation and the Confusion of Ideology

Independence in 1945 when our words and songs were released.

After the independence, the first hit song called "Silla Moonlight" and "Gagara Sampalseon" and "Gohyangcho" depicting the pain of the division of North and South were created.

'Silla's Moonlight' was originally created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its original title was 'Indian Moonlight'. The song, which was only singed on stage, was reborn in the background of Silla after the songwriter changed lyrics and lyrics through Mr. Yoo Ho, with the will of Park Si-chun, 'I'm now indebted. It was the product of our history and the will to reclaim the words lost by Japanese imperialism.


▲ The music scene that was unfolded in poor times. The conductor is Park Si-chun


With the big hit of Silla's moonlit night, Park founded Lucky Records.

Beginning with 'Lucky Moon Night', Lucky # 1 album, 'Yuho-Park Si-chun-Hyeon-in' combination is born, and 'Hometown Man Li'-'Ra Na-ri Gomoryeong'-'Lucky Seoul' will be hit one after another. 'Hometown Cho (Song Min-do)' and 'Nang Rang 18-year-old (Baek Nan Ah)' are all famous songs released during this period.



▲ Activity records from the 30s that showed various genres such as folk songs, jazz and trot

At the time, the record industry in Korea was withdrawn by all Japanese record companies, so the land was literally barren. The harsh environment caused by the shortage of supplies was also very difficult. According to Yu-ho's testimony, the lyricist who was the head of the literary department of Lucky Records at the time, Park even collected the records that the Japanese discarded in the sesame oil-compressor from the junk. As the needle was pressed onto the Japanese SP record, the needle was rotated a few times, and the groove, that is, the groove, was worn out, and the joke of Japanese songs popped out suddenly during the song.

This sweat and passion that ordinary people cannot easily imagine would be the driving force of our song that has grown into the current Korean Wave.

In May 47, after the liberation, he served as the permanent conductor of the exclusive orchestra of JODK (later the Central Broadcasting Station, now KBS), and organized the 'Cheoncheonguk' and 'Silver Drop Show' groups created by singer Nam In-soo It was around this time that Park attended the performance and finally showed his will with his independence.

Usually, Park Si-chun has been active in several roles, more than one person, over a period of time.


4. Songs that resonate together in the front and back


▲ Music album leaflet at that time

'Good Gunga is an artistic weapon that can't be beaten by cannons'

In 1950, during the Korean War, his creative passion shined like fireworks. Celebrities were no exception when three-quarters of the country turned into a battlefield and the entire nation was driven into battle and refugees. Everybody went to the military and went to the battlefield with soldiers as "uncounted warriors."

Park Si-chun Park acted as the 2nd platoon of Liberal Arts Company under the Ministry of Defense Chung Hoon-kuk and the military captain of the Army's 1st Training Center located in Mosselpo, Jeju.

During the war his creative activities did not stop. Families who had to raise their morale and released their families on the battlefield, including `` Army's First Training Center, '' `` Well-being Good Night '', `` Song of Victory '', `` Song of Victory '', `` Wire of the Front ''. I put my feelings in a song. These songs overflowed the Korean peninsula with the sound of roaring sound, inspiring solidarity between front and back.

Proving that “a good folk song is an art weapon that can't be beaten by cannons,” these serious songs gave courage and hope to war-torn people.

If Park Si-chun's rhythm was full of lyrical and pervasive elements, then this time is a powerful and masculine change. In just a few years, Park Si-chun's music is changing with the times.



Park Si-chun always gave meaning to making songs. Like the retro song `` Silla Moonlight Night '' to celebrate Liberation, 'Lucky Seoul' singing the joy of liberation, and `` Jewooya Goodnight '' made during the Korean War, Jeju Jeju's Army 1st Training Center The song that was written in the song by the song `` Let's go and drop it here, '' was written by Yoo Ho. Busan Station. All of these songs are cultural heritages that are vividly recorded in the historical scene. It is also a precious legacy of our modern history, which testifies to the tragedy of Korean history. These songs are the product of the shining pop culture where the scene lives and breathes more than any newspaper commentary or leaflet phrase at the time.

Park Si-chun, who made great contributions to the military's inauguration as a `` military commander, '' twenty-seven times over the 155-mile front for military excellence, later won the Confession of Arts Awards, Minister of Culture and Public Affairs (1967), the 6th Korea He also won the entertainment award.


5. Make an equation that a movie must have a theme song


The late fifties, when the scars of war did not subside. In 1958 he founded Five Hyang Film History. In particular, 'Ohyang' inserted a film theme song into every movie produced to create an opportunity to prepare another biography of film music. 'Men's Number One', 'Obuza's Song', 'Autumn Spring,' etc., which led to the suggestion that there must be a theme song in the film.


In addition to the 'Daughter Seven Brothers' who recorded the appearance of the whole family in the movie, the film companies that were victorious with 'Spring coming spring', 'Youth hyperbolic curve', 'Obuza' and 'Road of the flesh', etc. Due to the failure of mobilization of the audience due to the 4.19 bursting day, the shooting studio went bankrupt, and the downfall, the Jangchung-dong, had to sell the house and pay off the debts.


Since the 1970s, his achievements as a record of popular culture that well depicted industrialization and changes in the post-modern world have been hit songs such as 'Winds not spinning' and 'Date of the Day' and 'You Only One'. Take the lead in protecting the rights of people.


6. Forerunner of Musical Pioneers and Musicians


After the liberation, he headed the instrumental instrumental music station, the first chairman of the Entertainment Association, which was founded in October 63, and the Korean Music Artists Association. He also performed various activities for the interests of the entertainment industry.

In 1982, he was also honored to receive the Order of Cultural Merit for the first time in Korea.


The music performance was excellent, the social influence and contribution was high, and at the same time, it was a testimony to being praised by many popular singers.


In my later years, I had lost my sight with glaucoma and spent four years. I was inconvenient to go outside, but when I attended the Korean Songwriters' Association, a group of composers, I was able to entertain everyone with a distinctive 'style flow'. It is said that. It is possible to guess how warm he has been with the public, especially the writers.


He is said to have come to the work with a serious attitude of chewing and refining even the simplest melodies. One of his characteristics is that he pays close attention to the melody of the song and, of course, to the prelude and consideration of the song. A famous anecdote is said to always emphasize that the most important part is the prelude to preserve the image of the song. Park Jae-jeong, the youngest son who studied composition at the Berkeley College along the way with his father, said, 'The characteristics of the father's song are the perfect and structured composition of the song.' I was also throwing up.


In fact, even though Park Si-chun had to arrange the arrangement to a third party, he had to close his eyes quietly on the evening of June 30, 96. His ceremony was held as a Korean celebrity corporation.


7. Park Si-chun, who will ring forever in the hearts of our people


His songs, loved by all nations, have recently been remakes and hits again and again, including '18 -year-old ',' the world is Yoji-kyung ',' the spring day is gone ',' the moon night of Silla ', and' the strongest Kum Soon-ah '. To this extent, Park's melodies, mars, and rhythms show him unparalleled talents that transcend generations and generations.

His songs, which have accompanied the pain of the times so far as to be far from social interests, those who have devoted their lives to finding the rhythm of Korean emotions, and the gems he left behind are also a precious legacy of our proud popular art. I can't say Korean pop art without him, and our song without his songs.

I hope that the achievements of teachers who have shared the trends of the times with the people will never be evaluated in vain.

No evaluation, because the songs he left before are life itself, which has been with our people.


The teacher left these words at the stage of 'The Sixtieth Anniversary Performance-Park Si Choon Show Show Festival' held at the Korean Theater for four days from October 17, 1987.

"I give this song to the people of this land who are willing and forever loved."


Park Si-chun Park is a national composer who will remain in our hearts forever.


http://dbs.donga.com/comm/view.php?r_id=04937&r_serial=01:


-Star album of memories. It's been gone forever now. The nostalgic memories of youthful romance and appreciation. Years have passed, but still with the kind of song that still remains in my heart, the star album of memories to look back on the stories of those days. Today is composer Park Si-chun.


-The song flows through the river where only old rings are piled up and memories are buried. Every spring comes, the song is not forgotten like a starlight shining in the night sky. Park Si-chun composed the song so much that he couldn't haul it. The composer Park Si-chun is a composer who has created many memorable songs such as 'Sosoo's Soya', 'Bachelor's Appointment', 'Port Tavern', 'Twisted Foot Love', and 'Emotion Period', while Nam In-soo, Lee Nan-young, Golden Sim, Go Bok-soo, He is also the father of the music industry who has raised singers such as Jang Soo-young and Ewha-hwa. Park Si-chun debuted as a composer by creating a song called 'Strait of the Tears' released from the record of Singer, when singer Nam In-soo, who had been so enthusiastic that it was hard to come out for a century. This 'Strait of Tears' is the representative song of Park Si-chun by changing the name from Oke Record to Soya's Soya Song.


Listen to the voice of Nam In-soo, 'Soya's Soya', which was first composed by Park Si-chun.

♬ Soya's Soya Song-Nam In Soo


-Park Si-chun, the actress Todoki Yukiko who was famous in Japan and translated it as Aishunou Serenade, wrote the song "Soo Soh's Love" which swept not only Korea but also all over Japan, is the second of four brothers born in 1912 by Milyang, Gyeongsangnam-do. Park Si-chun's real name was Park Soon-dong. Park Soon-dong was a parent of his parents when he was young, so he attended ordinary school in Miryang. However, Park Sun-dong, who liked music before entering normal school, was struck with drums at the youth group brass band when she was 7 years old, and after graduating from regular school, she became a wandering troupe of drummers walking around with her hometown.


-When I was 7 years old, my local youth bought a musical instrument. I was going to play at a regular school athletic meet, but there were no drummers. Since then, the rhythm has been known since the age of seven. I went and beat the drums, but I beat the drums, but the crowd over there saw a drum sound but I can't see people, people. So it's so amazing that I can't see why there's a drumbeat and I'm sitting behind and a little baby sitting and playing. So all of the cute people in the countryside come and carry it, and then there is the stall Janggukbap Bibimbap. I bought lunch there and it happened. Perhaps that's why I love music from then on, so I don't know if I did, but when I was 14 I ran away. After running away from home, I've been wandering all the time, I've been involved in a movie filming business, I'm a consul, I'm learning music, and I've been to Japan several times.


After five years of lonely and lonely wandering, Park Soon-Dong became 20 years old, and unexpectedly had a chance to cross into Japan, and began to lay the groundwork for romance. Park Soon-dong, who studied permanently at the Central Music Academy in Osaka, Japan, and then played the violin at the Permanent Hall, changed his name to Park Si-chun and first released it. After releasing a big hit, he released 'Wangseobang Series'. The song was written by Park Jung-chun in 1934.


♬ Wang Seobang Yeonseo-Kim Jung Gu


-A cloth called Nilonia Raylon was not dreamed of, and silks such as mother-in-law and taffeta-ends were played. If it is not a food business, Wang Seobang Yeonseo, which became a hit song among the hit songs, was also called Samcheok Dongja by adding a comic song to the satirical lyrics of the Chinese people who had a lot of fun as silk business. It was put on top and Park Si-chun's heyday was over. At that time, however, composer Park Si-chun was so young that he was so young that he disappointed the people he met. He also became a singer with Nam In-soo, who was only 18 years old. Park Si-chun, who played drums from a young age and later played a violin and sang as a composer, stopped working at Banyangwol and Cho Chun-young at Luoyang House in Hoehyeon-dong when he was finished. Often sang one song and overshadowed the singers. Park Si-chun, who was so versatile and nicknamed the all-round beauty.


Park Si-chun also composed 'Silla's Moonlight Night', a hit song by sage who returned from Shanghai after liberation.


Appeared as a comet in the early days of music, 'Soosoo Soya', 'Inspirational Time', 'Wangseobang Series', 'Port of Tavern', 'Twisted Foot Love', 'Silla Moonlight', 'Raining Gomoryeong', ` The famous singer who composed and cultivated over 300 hit songs including Lucky Seoul, Sen Francisco, Gagara Sampala, Affection Mountains, Busan Station of Parting, and News of Samdado In addition to Nam Man-soo, Lee Nan-young, Golden Sim, Go Bok-soo, Jang Se-jeong, Ewha-ja, Park Hyang-rim, Song Dal-hyeop, Kim Jung-gu, Baek Sul-hee and Mi-Ja Park, Park Si-chun has a romantic romance that likes blue fishing and likes night fishing like the fresh May sky. It is a person. Park Si-chun, who was married to his 18-year-old wife at the age of 28 and is now the father of three sons and three daughters, is also the father-in-law of two sons-in-law. He's also a passionate person who works hard for that purpose.

The song “Peace Francisco” Baek Seol-hee, composed by Park Si-chun, who was hit in Seoul, restored in 1953.


♬ San Francisco-Baek Sul Hee


-Although the composer Park Si-chun, who impresses him with a small height of 1 meter 65 centimeters, is very fond of alcohol, but he loves alcohol more than the alcohol, and buys his heart by giving his children more money. It is also a romance papa. Park Si-chun, who is now too old and humbled to watch her juniors make good songs, is taking a rest in Jung Joong-dong's posture, but soon he's going to compose an amazing hit song. .


-The nostalgic memories of the youthful and romantic romance and sentiment of youth. Years have passed, but still with the song that still remains in the heart, the star album of memories that looked back at the people of those days. Today is Park Si-chun, Choi Ho-young and announcer Won Chang-woo.


(written: 2008.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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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100주년을 맞는 작곡가 박시춘, 삶과 음악의 시대별 재조명 & 재평가

우리나라 가요에 있어 고유명사가 아닌 대명사 격인 이름, 박시춘

2012년 04월 02일 (월) 15:17:31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webmaster@newsmaker.or.kr

‘박시춘’이란 이름은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에 있어서 고유명사가 아니라 대명사 격인 이름이다. 작곡가 박시춘, 그리고 가요1세대 작곡가들인 전수린, 손목인, 김해송 등의 등장은 마침내 우리나라에서 민요의 자리에 대중가요가 대신 자리하게 되는 신문화의 새 장(章)이 열렸음을 의미한다.

▲ 민족의 격동기와 함께 시대의 아픔을 어루만져준 작곡가 박시춘 선생

작곡가 박시춘 선생이 남긴 3천 여곡에 달하는 노래와 악상은 근대 한국 대중가요의 초석이자 근간을 이루고 있고 실제로 옛가요 전문 프로그램인 KBS-1TV '가요무대‘에서 8백회 기념으로 펴낸 ‘가요무대 100선집’에는 박시춘 선생의 곡이 무려 15곡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80년대에 mbc가 조사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 20선’에 무려 6곡이 포함되었을 정도였다. 시대의 격동기를 관통하며 국민들로부터 여전히 애창되어온 그의 노래는 이렇듯 여전히 한국인의 가슴 속에 살아 있다. 올해로 탄생 1백주년을 맞는 작곡가 박시춘 선생을 기리는 크고 작은 사업이 현재 진행 중이다. 작곡가 박시춘 선생의 시대별 삶과 음악을 재조명해본다.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우리나라 가요에 있어 고유명사가 아닌 대명사 격인 이름, 박시춘 ‘한 나라의 문화를 가장 빠르게 이해하려면 먼저 그 나라 국민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를 배우라’는 말이 있다. 그러한 점에서 박시춘 선생, 그리고 그가 남긴 노래는 바로 우리나라를 알리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이기도 한 셈이다. 박시춘 선생의 첫 작곡 데뷔곡은 1935년 8월에 발표한 '희망의 노래(홍개명 사/김창배 노래)'다. 시춘(是春), 이 이름의 의미가 '늘 봄'이라는 뜻. 작곡 데뷔작 ‘희망의 노래’ 제목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기도 하다. 이어 일제시대, 그 암울한 시대에 민족의 애환을 달래준 ‘애수의 소야곡’, 광복의 기쁨을 노래한 ‘럭키 서울’, 남북 분단의 아픔을 그린 ‘가거라 삼팔선’, 그리고 6.25 한국전쟁 당시에 발표된 ‘전우야 잘 자라’를 비롯해 당시 피난민들에게 삶에 대한 용기와 희망을 북돋워준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 일제 강점기로부터 8.15 광복, 6.25 한국전쟁을 거쳐 전쟁이 휩쓸고 간 잿더미 위에서 그 상흔을 복구하려는 50, 60년대 우리네 궁핍했던 삶의 현장에 이르는 격동기에 이 노래들은 격동기를 관통, 시대의 아픔을 함께 했다. 특히 어려울 때일수록 힘이 되어준 이 노래들은 지친 국민들에게 전해주는 일종의 응원가였다. 박시춘 선생은 대중가요의 힘이 얼마나 큰 지를 잘 알려주신 인물이기도 하다.

2. 유년시절, 풍류 속에서 자라며 예인 기질 눈떠

박시춘 선생은 1913년 10월 28일, 경남 밀양에서 출생했다. 본명 순동(順東). 선친 ‘남포’는 밀양에서 5백 섬지기 지주이자 가무(歌舞)를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권번(券番)'을 운영했던 분으로 특히 당대의 명창 송만갑, 이화중선, 이동백 등과 어울릴 만큼 국악에 조예가 깊은 인물이었다. 특히 구전으로 불리던 '밀양아리랑'의 가락을 채보, 지금의 형태로 정리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이렇듯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았음직한 음악적 유전 인자, 그리고 철나기 전부터 풍류 속에 자랐던 성장 배경이 그의 예인 기질을 일찌감치 눈 뜨게 했을 것임이 충분히 짐작된다. 이것이 그의 멜로디 속에 우리의 민요가락이 지속적으로 발견되는 이유이고 또 우리 전래의 전통가락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해 ‘한국적 트로트’라는 박시춘만의 멜로디를 완성한 단초이기도 하다.

어린 순동, 즉 박시춘 선생이 보통학교 1학년 때 부친이 타계, 한순간 가세가 기운다. 그러나 이후 우리 가요계에 대명사로 우뚝 선 선생의 위치가 그러하듯 이 소년은 유년시절부터 남달랐다. 어느 날 어린 순동은 한 카페에서 들려오는 유성기 소리에 발을 멈춘다. 처음 듣는 이 신기한 소리에 매료된 소년은 결국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매일 듣기 위해 카페에서 잔심부름을 거들기 시작했고 또 공짜로 영화구경을 하기위해 영화전단지를 뿌리고 다니는 등 음악광, 영화광이었다. 훗날 박선생은 이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통해서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가난의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결국 이 소년은 불과 열두 살 때 카페 주인을 따라 어머니 몰래 고향을 떠나면서 험하고 긴 음악여정을 시작한다. 열네 살 되던 해부터는 전국을 돌며 영화를 상영하는 순업대를 따라 다니며 낮에는 북을 치고 밤에는 영사기를 돌렸고 또 쉬는 동안을 이용해 나팔, 바이얼린 등 악기를 익히며 유랑극단에 적응해나갔다. 떠돌이 순업대 생활 중 많은 가요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당시 시에론레코드사에서 문예부장을 맡고 있던 이서구, 강사랑, 이봉룡 선생 그리고 박영호 선생 등을 알게 되면서 결국 작곡가로 입문, 당시 조선 최대 음반사인 오케레코드 전속작곡가로 발탁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대표곡 ‘애수의 소야곡’을 비롯해 ‘꼬집힌 풋사랑’, ‘눈 오는 네온가’, ‘항구마다 괄세더라’, ‘울며 헤진 부산항’, ‘서귀포 칠십리’ 등의 서정적인 멜로디부터 ‘왕서방 연서’, ‘총각진정서’, ‘세상은 요지경’ 같은 만요, 그리고 ‘신민요 풋난봉’, ‘산호빛 하소연’ 등 신민요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노래들을 발표, 손목인, 김해송과 함께 오케레코드 3대 작곡가로 자리매김, 달러박스로 부상하며 전성기를 구가한다.

▲ 애수의 소야곡’의 원곡, ‘눈물의 해협’ 가사지

이 무렵 오케레코드를 통해 음반으로 발표한 곡은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도 현재 280 여 곡이 넘는다. 당시 열악한 환경을 감안한다면 대단히 왕성한 활동을 펼친 것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또한 당시 무대에서만 불리어지던 노래들까지 합친다면 곡수는 그보다 훨씬 많아질 것이다. 이러한 우리 가요 초창기의 소중한 자료들도 더 늦기 전에 발굴, 채보해서 우리 가요사를 제대로 복원해야 함도 중요한 연구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점에서 결국 우리 가요사 연구의 끝은 ‘박시춘 작곡 총 목록집’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특히 박시춘 선생의 대표곡으로 사랑받고 있는 노래, 나라 잃은 슬픔을 탄한 명곡 ‘애수의 소야곡’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참고로 이 노래의 원곡은 ‘눈물의 해협’으로 처음 발표된 노래다. 이 노래 역시 당시 나라 잃은 슬픔을 극명하게 노래하고 있다. 참고로 ‘눈물의 해협’의 가사는 이렇다.

현해탄 초록물에 밤이 나리면 임 잃고 고향 잃고 헤매는 배야 서글픈 파도 소리 꿈을 깨우는 외로운 수평선에 깊어 가는 밤

임 찾어 고향 찾어 흐른 지 십년 몸이야 시들어도 꿈은 새롭다 아득한 그 옛날이 차마 그리워 물 우에 아롱아롱 님 생각이다

꿈길을 울며 도는 파랑새 하나 님 그려 헤매이는 짝사랑인가 내일을 묻지 말고 흘러만 가랴 님 없는 이 세상에 기약 풀어라 (김상화 작사, 박시춘 작곡, 1936년, 시에론레코드사)

선생은 작곡 활동 뿐 아니라 '조선악극단(朝鮮樂劇團-Okeh레코드사의 직영 단체)'에서 ‘아리랑보이스’를 결성, 현경섭, 송희선, 김해송 (玄警燮 宋熙善 金海松), 이복본 등과 함께 중창과 판토마임, 그리고 악기 연주를 겸한 여흥을 무대에서 펼쳐 보일 정도로 만능엔터테이너였다. 아울러 전국 각지는 물론 멀리 만주로까지 이어지는 공연활동을 통해 고향을 잃고 떠도는 민족의 설움을 보다듬어 주었다. 이러한 박선생의 활동은 이후 더욱 빛을 발한다.

▲ 열악한 시대에 펼쳐보였던 음반 취입광경. 지휘자는 박시춘 선생

3. 광복, 그리고 이념의 혼란기 우리의 말과 노래도 함께 해방된 1945년 광복. 광복 이후 최초의 히트가요라 불리는 ‘신라의 달밤’, 그리고 남북 분단의 아픔을 그린 ‘가거라 삼팔선’, ‘고향초’ 등이 이때 만들어진다. ‘신라의 달밤’은 본래 일제 강점기 당시에 처음 만들어진 노래로 원곡의 제목은 ‘인도의 달밤’이었다. 무대에서만 불리어지던 이 노래는 박시춘 선생으로부터 ‘이제 광복도 되었으니까 우리 것을 되찾겠다.’는 의지로 작사가 유호 선생을 통해 가사와 노랫말을 바꾼 뒤 신라를 배경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바로 일제에 의해 잃었던 우리의 역사와 말을 되찾기 위한 의지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 열악한 시대에 펼쳐보였던 음반 취입광경. 지휘자는 박시춘 선생

이 ‘신라의 달밤’의 빅히트를 계기로 박선생은 직접 럭키레코드사를 설립한다. 럭키 1호 음반인 '신라의 달밤'을 시작으로 '유호-박시춘-현인' 콤비가 탄생하고 '고향 만 리'-'비 나리는 고모령'-'럭키 서울' 등을 잇달아 히트시킨다. ‘고향초(송민도)’, '낭랑18세(백난아)' 등도 모두 이 시기에 발표된 명곡들이다.

▲ 민요, 재즈, 트로트 등 다양한 장르를 선보였던 30년대 활동기록들

당시 우리나라 음반 산업은 일본 레코드사들이 모두 철수한 뒤라서 이 땅은 말 그대로 불모지였다. 물자 부족으로 인한 열악한 환경 또한 매우 어려웠지요. 당시 함께 럭키레코드사 문예부장으로 계시던 작사가 유호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박선생은 심지어 참기름 짜던 압축기에 일본인이 버리고 간 음반을 고물상에서 수집해 판을 찍었다고 한다. 일본SP음반 위에 압축기를 눌러 판을 찍어냈기 때문에 바늘이 몇 바퀴 돌다보면 그루브, 즉 홈이 닳아 노래 도중에 갑자기 일본노래가 튀어나오기도 했다는 우스갯소리도 생생히 전한다. 보통 사람들이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이러한 땀과 열정은 지금의 한류로 성장하게 된 우리 가요의 원동력이 되어준 것이리라. 광복 이후 47년 5월, JODK (이후 중앙방송국, 현 KBS)의 전속악단의 상임 지휘자를 맡기도 했고 가수 남인수와 함께 만든 '칠천국(七天國)', 그리고 ‘은방울쇼' 단체를 구성해 전국 순회공연을 다닌 것도 이 무렵으로 박선생은 광복과 더불어 비로소 자신의 의지를 한껏 펼쳤다. 보통 박시춘 선생은 한 시대에 걸쳐 1인 몇 역, 그 이상의 활발한 활동을 펼친 것이다.

4. 진중가요로 전환, 전, 후방에 함께 울려 퍼진 노래들

▲ 당시 음반광고 전단지

‘좋은 군가는 대포소리에도 지지 않는 예술적 무기’ 1950년, 한국전쟁 와중에도 그의 창작열은 불꽃처럼 빛을 발한다. 전 국토의 4분의 3이 전쟁터로 변하고 전 국민이 전쟁터로, 또 피난민으로 내몰리던 이때 연예인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모두들 군예대에 들어가 ‘군번 없는 용사’로 병사들과 함께 전쟁터를 누볐다. 박시춘 선생은 이때 국방부 정훈국 직속의 문예중대 2소대장과 제주도 모슬포에 위치한 육군 제1훈련소 군예대장을 맡아 활동했다. 전쟁 중에도 그의 창작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육군 제1훈련소가'를 비롯해 ‘전우야 잘자라', ’승리의 노래‘, ’님 계신 전선' '전선야곡' 등을 발표, 군의 사기를 높였고 아울러 전쟁터에 가족을 떠나보내야 했던 가족들이 심정을 노래에 담았다. 이러한 노래들은 일선과 후방의 연대감을 고취시키면서 포성소리와 함께 한반도에 넘쳐흘렀다. ‘좋은 군가는 대포소리에도 지지 않는 예술적 무기’임을 증명해보인 이 진중가요들은 전쟁에 상처 입은 국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이전 박시춘 선생의 가락은 매우 서정적이고 또 만요적인 요소가 가득했다면 이 무렵은 진중가요를 통해 힘차고 남성적인 변화한다. 불과 몇 년 차이로 박시춘 음악은 시대상황에 따라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박시춘 선생은 노래를 만드는 데 늘 의미를 부여했다. 광복을 기념해 복고풍으로 만든 노래 '신라의 달밤', 해방의 기쁨을 노래한 '럭키 서울', 그리고 한국전쟁 중에 만들어진 ‘전우야 잘자라’ 등이 그렇듯 제주 모슬포의 육군제1훈련소 시절에는 '제주도 온 김에 이곳에 노래하나 떨어뜨리고 가자'고 작사가 유호선생과 의기투합해 만든 노래가 ‘삼다도 소식’, 그리고 잿더미 위에서 삶에 대한 위지를 심어준 ‘굳세어라 금순아’, 피난 수도 부산을 떠나며 만든 노래가 '이별의 부산 정거장'이다. 이 노래들은 모두 역사의 현장에서 생생히 기록된 문화유산들이다. 한국사의 비극을 노래로 증언한 우리 근대사의 소중한 유산이기도 합니다. 이 노래들은 당시 어느 신문해설이나 삐라 문구보다도 현장이 살아 숨 쉬는 빛나는 대중문화의 산물인 것이다. 군 위문을 위해 155마일 전선을 스물일곱번이나 누비는 등 '군번 없는 지휘관'으로써 군사기 고취에 큰 공헌을 세웠던 박시춘 선생은 이후 종군연예인공로패, 문화공보부장관 공로상(1967년), 제6회 대한민국 연예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