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드 페블즈 - Sand Pebbles (>San Ul Lim)


샌드페블즈 ‎– 화랑 (The 6th)

Daedo Records ‎– DSHR-1001, 20 Mar 1979

A1 달빛속에서(저새) / In the moonlight

A2 그곳으로 / There

A3 오직 그대만을 / Only you

A4 너를 알기 위해 / To know you

B1 달려라 / Run

B2 넌 영원한 소녀 / You are a girl for ever

* B3 겨울과 봄 / Winter and spring

* B4 한 오백년 (강원도 민요) / 500 years (folk song, Gangwon-do)

Tracks with * I consider essential listens or classics from a western point of view of listening, as tracks to check out for sure because for some reason they seem to stand out as unique moments, which makes them also very suitable for western radio show airplay. Tracks that are only underlined can be considered fine tracks you might better check out as well, but I am not sure how essential they are.

Psychefolk radioshow comments: "Enjoyable Psych-(pop)rock with rather nice organ, some fuzz. The eight track is (psych) rock ('n roll) based upon a Korean traditional, a rather original interpretation, and a more original track too. Sand Pebbles were the band before san Ul lim."


The LP is not too expensive or too rare to find.


Bass – 김민수 / Yeo Byeong-Seob

Drums – 김영국 / Lee Young-Deok

Keyboards – 최광석 / Kim Min-Soo

Lead Guitar – 이영득 / Choi Kwang-Seok

Lead Vocals – 여병섭 / Kim Young-Kook

See also http://www.weiv.co.kr/archives/9428

& https://goldkoreavinyl.com/2012/08/09/샌드페블즈-나-어떡해-sand-pebbles-what-should-i-do-1977-2/


샌드페블즈 – 나 어떡해 (1977)

샌드페블즈는 서울대학교 교내 학생들이 결성한 밴드로, 현재까지도 30년 이상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유서 깊은 동아리이다. 후세에 <나 어떡해>로 기억되는 ‘그룹사운드 샌드 페블즈’는 6기이며 그 중에 전업 뮤지션으로 활동한 사람은 없다.

<나 어떡해>는 산울림의 베이시스트이자 샌드페블즈 5기였던 김창훈이 작사/작곡한 곡이다. 샌드페블즈는 이 곡으로 77년도 대학가요제 대상을 수상하여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60년대의 곡들인 ‘California Dreamin’’이나 ‘Happy Together’를 떠올리게 하는 건조하면서도 애상적인 분위기의 기타와 코러스 하모니가 인상적이다. 할 말만하는 가사는 단순하면서도 점층적인 멜로디에 실려 힘을 얻고, 날카로운 기타 솔로로 이어지지만 곡은 결코 감상적인 쪽으로 치우지지 않는다.

김창훈의 곡인만큼 산울림 앨범에도 실린 바 있다. 산울림의 ‘나 어떡해’는 좀 더 빠른 템포에 오르간 사운드가 좀 더 부각되도록 편곡되었다.

" Sand Pebbles-What Should I Do (1977)


Sand Pebbles is a band formed by students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and is a historic club band that has continued its life for more than 30 years. There are six group sound sand pebbles that will be remembered especially for "What should I do?"

<What Should I Do> is a song written and composed by Kim Chang-hoon, a bassist of Sanwoolim and the fifth Sand Pebbles. Sand Pebbles became famous throughout the country with the 77th University Song Festival Grand Prize. The dry and hearty guitar and chorus harmony reminds us of the 60's songs of "California Dreaming" and "Happy Together." Its lyrics are empowered by simple, gradual melodies and lead to sharp guitar solos, but the songs are never sent towards sentimentality.

As the above song is from Kim Chang-hoon, it was also featured on a Sanwoolim album. Sanwoolim's “Na howohae” was arranged differently to accentuate the organ sound at a faster tempo.


1977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나 어떻게>로 대상을 수상했던 샌드페블즈의 유일한 독집인 '화랑'은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지만 3~4만원 정도의 가격에 거래되는 음반입니다. 샌드페블즈는 서울대 농대의 스쿨밴드로 가수 이수만이 2기, 산울림의 김창훈이 5기 멤버였습니다. 이 음반은 수집가들과 평론가들에게는 꼭 구매해야하는 중요한 앨범 중에 하나입니다. 히트곡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추어 스쿨밴드 샌드페블즈의 세련된 연주를 들을 수 있어서 의미 있습니다. . 오늘 교통방송 김갑수의 마이웨이(95.1MHz)에서는 이 음반의 수록곡 <겨울과 봄>을 들어볼 예정입니다. 음원으로 들을 수 없고, CD도 없기 때문에 LP로만 들을 수 있습니다. 또한 나미의 1977년 캐나다 진출작도 '봄비'도 듣습니다. 이 노래는 박인수 버전이 크게 히트했습니다만 해피돌스의 버전도 들어볼만 합니다. 특히 해피돌스 음반은 영어로 취입했지만 <봄비>만이 우리말로 불렀기 때문에 방송에서 함께 들어볼 예정입니다.


Sandpebles' sole solo album 'Gallery', which won the Grand Prize for <Me and How> at the 1977 MBC College Song Festival, is a record that is available for 3 to 40,000 won.


"Sand Pebbles is a school band of Nongdae Univ. Of Seoul National University. This album is one of the important albums that must be purchased by collectors and critics. There's no hit track in it, but it's meaningful to hear the sophisticated performance of amateur school band Sand Pebbles.

On today's traffic broadcast, Kim Gap-soo's 'My Way' (95.1 MHz), you can listen to the song <Winter and Spring>. You can only listen to LPs because there's no CD of it.

You can also listens to Nami's 1977 Spring Break in Canada. The song was a big hit by Park In Soo's version, but it's also worth listening to the version of Happy Dolls. In particular, the Happy Dolls album was taken in English, but only <Spring Rain> was sung in Korean, so we'll listen to it on the show...."

You can find several tracks of the band on these compilations:

친구야 소풍가자 / Friends, let's go on a picnic (C'est Ci Bon 7080)

* CD3-4 나 어떻해 / How am I


This attractive song has a fine "primitive" group sound with harmony vocals and a certain organ drive and some nice fuzz in the end. It is a groovy song. Performed live.

대중가요 Lp 가이드북 / Popular Songs Lp Guidebook

11 나 어떻해 / How am I

원음으로 듣는 7080 통기타 베스트 / 7080 Acoustic Guitar Best

CD2-3 나 어떻게 / How I see it/ How am I

7080을 위한 추억의 그룹 사운드

CD2-1 나 어떡해 / What should I do / How I see it / How am I

See also the solo works of 김영국 / Kim Young-G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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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GRAPHY:

https://www.weiv.co.kr/archives/9428

샌드 페블스(6기)의 이영득 |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아마추어 기타리스트의 후일담 2003.09.26 interview ;

일시: 2003년 9월 18일 장소: 대구대학교 연구실과 [weiv] 상수동 사무실 사이 ; 질문: 신현준 ; 정리: 신현준

1977년 9월 정동에 있던 문화체육관에서는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에 의미심장한 파란이 발생했다. 다름 아니라 ‘제 1회 MBC 대학가요제’가 열린 것이다. 이 대회는 이후 다른 방송국에서 연이어 만든 대학생들의 가요제와 더불어 대마초 파동으로 얼어붙었던 한국 대중음악에 한줄기 빛을 비춘 행사였다. 비록 ‘관제 행사’라는 일부의 비난이 있었지만 초기 몇 년 간 대학가요제는 ‘순수 아마추어의 경연대회’라는 취지에 충실했다. 대학가요제의 ‘이후’와 ‘현재’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말을 할 수도 있지만 그건 다른 자리로 미루기로 하자.

그 점에서 이 대회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한 서울대 농대의 캠퍼스 그룹 사운드인 샌드 페블스는 ‘아마추어의 순수성’의 상징같은 존재다. 이들의 ‘실력’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겠지만 이들을 실력으로 평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무엇보다도 샌드 페블스가 이 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한 “나 어떡해”(김창훈 작사·작곡)는 ‘한 시대의 송가’라고 불러서 손색이 없다. ‘지상파 방송의 위력’에 힘입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아마추어 그룹 사운드가 연주한 곡이 하룻밤 사이에 이 정도의 파란을 일으킨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즉, 샌드 페블스는 ‘캠퍼스 그룹 사운드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대중에게 알린 존재였다. 달리 말해 샌드 페블스라는 이름이 알려지면서 산울림, 런웨이(활주로), 블랙 테트라(열대어), 블루 드래곤(청룡), 휘버스(열기들)도 낯익게 되었다.

현재 대구의 한 대학교에서 ‘교수님’으로 살고 있는 이영득은 ‘1977년 9월 혁명’의 주역이었다. “나 어떡해”에서 ‘생톤’의 깔짝거리는 스트러밍과 정성스러운 아르페지오에 이어 퍼즈 기타의 솔로를 선보였던 인물이다. 스포트라이트는 보컬을 맡은 여병섭에게 맞추어졌지만, 방송에서는 실로 오랜만에 듣는 ‘록 음악다운’ 사운드를 선보인 주역은 이영득이었다. 물론 이렇게 개별 인물이 아니라 그룹 전체가 조명을 받았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샌드 페블스는 대중음악의 관점에서는 ‘원 히트 원더’일 것이다. 대학교 시절, 그것도 1년 동안만 활동하는 원칙으로 인해 그것 이상을 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아마추어적 음악적 실천이 소멸해 버린 듯한 지금 아마추어가 성공했던 희귀한 역사를 다시 한번 조명해 보는 일은 그 자체 흥미롭다. 물론 공식 활동을 그만 둔 뒤 그가 했던 여러 비공식 활동을 통해 이런저런 뒷 이야기들도 들을 수 있었다.

인터뷰는 전화로 이루어졌다. 녹취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친절하면서도 조리있게 답변해 주어서 정리를 쉽게 만들어 주었다. 감사드린다.

“학장회의에 초대받아서 교수님들로부터 박수를 받았죠”: 1977년 MBC 대학가요제에서의 영광

Rather automated translation (with mistakes):


Sand Pebbles (6th) Lee Young Deuk | A later story of the most famous amateur guitarist in Korea ; 2003.09.26 interview; Venue: Between Daegu University Laboratory and Sangsu-dong Office; Questions by Shin Hyun Jun; Theorem: Hyun-jun Shin In September 1977, at the Cultural Gymnasium in Jeong-dong, a significant blue color occurred in the history of Korean popular music. The first MBC College Song Festival was held. The competition was a glimpse of new creative Korean pop music, which was frozen in cannabis waves, along with a series of college students' songs made by other stations. Although there were some criticisms of the “controlled event,” in the early years, college songs were faithful to the idea of ​​“pure amateur competitions.” You can still be skeptical to what is the preset moment, but let's put that off for now. In that sense, Sand Pebbles, as representative of the campus group sound of Seoul National University's Nongdae won the Grand Prix in this competition, as a symbol of "Amateur purity.'' There is some controversy about their "abilities," but nothing is as foolish as evaluating them for that. Above all, Sand Pebble won the grand prize in this contest, with “What Should I Do?” (Composed and composed by Kim Chang-hoon). Even if it's powered by the power of terrestrial broadcasting, it's no surprise that the music played by amateur group sound produced with this amount of blue overnight. In other words, Sand Pebble was the one that informed the public that there was a campus group sound. In other words, as the name Sand Pebbles became known, mountanous forests (San Ul Lim), Runways (runways), Black Tetras (tropical fish), Blue Dragons (blue dragons) and Whivers (heats) became familiar too. Lee Young-deuk, who is currently a professor at Daegu University, was the main actor of the September 1977 Revolution. In "What Do I Do," he performed the solo of Fuzz Guitar, followed by the lingering strumming and attentive arpeggio of Saint-Saint. The spotlight was tailored to the female vocalist Yeo Byung-seop, but it was Lee Young-deuk who showed off the 'rock music' sound that he had been listening to for a long time. Of course, the fact that the entire group was illuminated, not individual figures, would be even more important. Sand Pebbles may be "One Hit Wonder" in terms of popular music. When I was in college, I couldn't do anything more than that because of the principle of working for only a year. Nevertheless, it is interesting to revisit the rare history of amateur success, which seems to have disappeared. Of course, after quitting the formal activities, he was able to listen to these and other stories through various informal activities he did. The interview was by phone. The recording wasn't good, but it was easy and kind.


”77 mbc 제1회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고 난 후. 왼쪽부터 최광석(키보드), 이영득(리드 기타, 리더), 여병섭(싱어), 김영국(드럼), 김민수(베이스 기타).

Q: 시간 순서대로 질문하지 않고 샌드 페블스(6기)를 기념비적 존재로 만든 사건인 1977 제 1회 MBC 대학가요제(이하 ‘1977 대학가요제’로 약에 대해 먼저 여쭈어 보겠습니다. 어떻게 정보를 얻고 참여하게 된 것인가요? – 제 1년 선배인 김창훈 형이 대학가요제가 열린다는 정보를 가지고 저희(샌드 페블기 6기)에게 참가를 권유했습니다. 아마 그때 김창완 형님이나 김창훈 형은 만들어 놓은 곡이 100여곡 있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한 곡인 “나 어떡해”를 우리들에게 한 번 해 보라고 준 것이죠. 그때 (김)창훈 형이 샌드 페블스의 대표(주: ‘대표’란 한 학년 위의 선배가 맡는 ‘매니저’같은 역할이다)를 맡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죠.

Q: 1977년 당시 예심은 어떻게 보았던 것인지요? 또 참가한 팀 가운데 그룹 사운드(록 밴드)의 비중은 어느 정도였는지요? 그리고 참가 팀 가운데 창작곡을 연주한 비중은 어느 정도였는지요? –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일곱 팀이나 여덟 팀 정도는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대학가요제 참가자격이 창작곡이었습니다. (1977년에는 기성곡으로 참여한 팀도 꽤 있었는데요?) 그런가요? 아무튼 저희는 창작곡으로 참여하겠다는 생각 이외에는 없었습니다.

Q: 김창완 님과 김창훈 님에 의하면 산울림이 대학가요제 예선 때 무이(無二)라는 이름으로 참가하여 “문 좀 열어줘”를 연주했다고 하고, 예선에서 무이가 1등, 샌드 페블스가 2등을 차지했다고 들었습니다. 단, 김창완 님이 이미 대학을 졸업한 신분 때문에 본선에 나가지 못했다고 증언했습니다만… – 제가 알기로는 산울림의 전신인 무이는 예선에서 떨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좀 열어줘”를 연주할 때 예선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사람들이 피식 웃었습니다.(주: 산울림의 음악을 제대로 이해 못하는 사람이라면 웃을 수도 있었다는 뜻이다).

Q: 1977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뒤 학교측의 대우가 달라진 게 있다면 어떤 것인지요? – 일단 대상을 차지한 뒤 저희 기수의 멤버 전체가 전체 교수회의에 초대받아서 교수님들로부터 박수를 받았습니다. 둘째는 대학가요제 참여하느라고 결석했던 것을 모두 출석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써클룸(연습실)에 방음장치를 해 주더군요. 그전까지 ‘시끄럽다’는 평을 들었던 샌드 페블스가 학내 써클로 정착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겠죠.

Q: 대학가요제가 열린 것이 9월이니까 그러면 그 뒤의 활동은 어떠셨나요? – 10월 경에 남산 드라마 센터(현 서울예대 자리)에서 단독 공연, 그때 말로 리싸이틀을 했습니다. 한 700석 정도 되는 곳이었죠. 이 공연도 ‘기획사’같은 것을 끼고 한 것이 아니라 저희가 드라마 센터를 대관해서 독립적으로 추진한 것이었죠. 포스터도 직접 우리가 부쳤고…. 공연 때 사람이 미어터졌습니다. 대학가요제에 참가하기 전에 했던 학교(서울대 농대) 대강당(1,400석 정도인 곳인데)에서 가졌던 리싸이틀과 함께 이 두 번이 샌드 페블스의 단독 공연이었던 셈이죠. 1977년 한 해 동안 크고 작은 무대를 76회 섰습니다. 대학가요제 대상을 차지한 다음에는 방송 출연 요청도 많아서 방송에도 자주 나갔었고… 1978년부터는 저희 기수(6기)의 공식적 활동은 없었습니다. 물론 비공식적 활동은 몇 번 더 있었지만.

Q: 그렇다면 1979년 3월에 ‘화랑(花郞)’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샌드 페블스 6기 독집’은 비공식적 활동이었다는 말씀이신지요? – 예, 그렇습니다. 샌드 페블스는 기본적으로 ‘2학년 때 1년 동안’ 활동하는 것이 내부의 원칙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 세대들이 C.C.R. 세대라면 우리는 딥 퍼플 세대죠”: ‘팝송 세대’의 성장기

Q; 샌드 페블스(화랑)의 독집 음반을 포함해서 ‘1978년 이후’에 대해서는 마지막에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더 과거로 돌아가서 이영득 님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먼저 성장기에 어떤 음악을 듣고 즐기셨는지요? – 제가 중학교 ‘또뽑기 1세대'(주: 무시험 추첨으로 진학할 학교를 배정하는 것을 말한다)라서 중학교는 명문이라고 말하기 힘든 학교를 나왔고, 고등학교는 경기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그때 유행했던 팝송은 빽판이나 라디오로 많이 들었죠. 우리 바로 앞 세대들이 C.C.R.이나 산타나(Santana) 세대라고 한다면, 우리는 ‘딥 퍼플 세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딥 퍼플(Deep Purple)이나 그랜드 훵크 레일로드(Grandfunk Railroad)같은 하드 록을 많이 들었죠. 그리고 하드 록과는 좀 다르지만, 아메리카(America)의 “Sister Golden Hair”같은 음악도 많이 좋아했습니다.

Q: 음악을 들은 것 외에 직접 음악 활동을 하신 경험은 어떤 것이 있었는지요? 특히 기타를 치게 된 것은 언제부터 어떤 계기였는지요? – 고등학교 음악 시간에 한 사람에 악기 하나씩 연주할 줄 알아야 했던 일이 있습니다. 그때 피아노는 자신이 없으니까 기타를 잡게 되었죠. 클래식 기타와 통기타(어쿠스틱 기타)를 치다가 결국은 그룹 사운드를 만들었습니다. 그 때 물망초(Forget-me-not)이라는 이름으로 경기고와 경기여고 연합 써클을 만들어서 정동에 있는 젠센(Jensen) 기념관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때 모임의 하나로 음악발표회를 했는데 그때 그룹 사운드를 만들어서 연주했습니다. 그때도 팝송을 연주하고 노래했습니다.

Q: 하드 록을 포함한 ‘팝송’ 외에 국내 대중음악은 어떤 것을 좋아하셨는지요? 예를 들어 신중현의 그룹들이나 키 보이스, 히 식스, 트리퍼스, 템페스트같은 그룹 사운드의 음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했는지요? 당시 이 그룹들도 어느 정도 인기를 누렸던 시기인데요? – 국내 그룹 사운드에는 그리 큰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히트곡으로 알려진 곡들을 들어 보면 외국의 하드 록 음악에 나오는 기타 솔로같은 부분도 없어서 흥미가 없었습니다. 그때는 왠지 국내 그룹 사운드는 ‘트로트와 비슷한 음악’으로 간주했던 것 같습니다.

Q: 국내 그룹 사운드는 대단치 않게 생각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포크송’ 계열의 음악은 좋아하셨는지요? – 오히려 포크송은 좋아했었죠. 이장희, 송창식, 김민기같은… 그래서 친구와 둘이서 송창식의 곡을 한 명은 코드 잡고 반주하고, 한 명은 좀 어려운 프레이즈를 연주하는 식으로 기타 두 대로 치면서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Q: 이영득 님이 고등학교를 다닌 시절(1973~1975)이면 이장희, 송창식 등이 전성기를 누린 시기이고 이들의 음반에서 연주를 해준 동방의 빛(강근식, 조원익, 이호준, 유영수)의 사운드가 자주 울려나왔던 시기입니다. 혹시 강근식 님의 기타 연주가 당시 고등학생 기타 키즈에게 영향을 미친 것도 있나요? – 강근식 씨는 물론 그때 알고 있었죠. 기타를 참 잘 친 분입니다. 그렇지만 그 분은 스튜디오 세션 뮤지션의 이미지가 강해서 그룹을 만들어서 기타를 치던 고등학생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여담이지만 나중에 서울 스튜디오에 샌드 페블스의 음반을 녹음하러 가 보았더니 기타를 엄청 잘 치는 세션맨이 계시더군요. 아티스트는 아니고 테크니션이지만 그거 보고 저는 프로페셔널로 활동할 생각을 접었죠(웃음). 아무튼 1976년 봄에 서울대 농대에 입학해서 신입생 환영회 때 친구 한 명과 함께 부른 곡도 송창식의 곡(지금 갑자기 생각하려니 곡 제목이 기억나지 않네요)이었습니다. 그게 샌드 페블스 선배들의 눈에 띄어서 ‘야, 저 놈 불러와’ 이런 식으로 된 것이죠.

Q: 그 당시 음악 좋아하는 젊은 사람들은 음악감상실 같은 곳에 놀러 다니던 일은 없는지요? 그런 곳에서 함께 어울려 놀던 사람이 있다면 누구였는지요? – 고등학교 때까지는 음악감상실 같은 곳에 다닌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 곳에 다닐 수가 없었던 것 같네요. 단, 대학교에 들어간 뒤 수원의 팔달문(보통 남문이라고 부릅니다.) 근처에 있는 ‘아카데미 다방’이라는 좋은 음악감상실이 있었습니다. JBL 스피커가 있는 음향장비가 굉장히 좋았던 곳이었어요. 그래서 수원에서 음악 좋아하는 젊은 사람들은 그곳에 많이 찾아가서 음반으로 틀어주는 음악을 들었습니다. 하도 볼륨을 크게 트니까 30살이 넘은 사람들은 감히 찾아오지 못하고 젊은 사람들만 찾아오는 곳이었죠. 저도 그곳에 자주 갔었습니다.

“그때 대학생들이 놀 때는 생음악이 필수적이었습니다”: 1977년 샌드 페블스의 공식 활동 시절

"I was invited to the dean's meeting and applauded by the professors”: honor at the 1977 MBC Song Festival. After receiving the grand prize at the “77 mbc 1st College Song Festival”.


From left, Choi Kwang-seok (keyboard), Lee Young-deuk (lead guitar, leader), Yeo Byeong-seop (singer), Kim Young-uk (drums), Kim Min-su (bass guitar).


Q: Let me first ask you about the 1977 1st MBC College Music Festival ('1977 College Music Festival'), the event that made Sand Pebbles (Sixth) a monumental presence without asking questions in time order.


Kim Chang-hoon, a first-year senior, invited us to participate in the 6th Sand Pebble. Maybe Kim Chang-wan or Kim Chang-hoon had about 100 songs they made. One of them is "What should I do?" At that time, (Chang) Chang Hun was the president of Sand Pebble (note: 'representative' is a 'manager' role for senior).


Q: How did the trial look in 1977? What was the proportion of group sound (rock band) among the teams participating? How much of the team played the original piece?–


I don't remember exactly, but it seems to be about seven or eight teams. And as far as I know, the participation in the college song festival was a creative song. (In 1977, there were quite a few teams that participated as ready-made songs.) Anyway, we had no idea but to participate as a creative song.


Q: According to Kim Chang-wan and Kim Chang-hoon, Sanwoolim participated in the name of the music festival and played "Please open the door". I heard it. However, I testified that Kim Chang-wan did not go to the finals because he already graduated from university.– I know that Mui, the predecessor of the forest (San Ul Lim), fell away from the qualifiers. When playing “Please open the door,” the judges in the preliminary laughter grinned (note: if you didn't really understand the music of Sanwoolim, you could laugh).


Q: What is the difference in treatment after receiving the grand prize at the 1977 Song Festival?–


Once we got the grand prize, all of our jockey members were invited to the whole faculty meeting and applauded by the professors. Second, students who were absent from participating in the college song were recognized as attendance. Lastly, they gave me a soundproofing in the circle room. Sand Pebbles, which had been said to be noisy until then, settled as a circle in the school.


Q: Since it was September when the University Song Festival was held, how was the activities after that?

In October, they performed a solo performance at the Namsan Drama Center (currently Seoul Arts University). It was a place of about 700 seats. It wasn't done with something like “planner,” but we did it independently. We also sent posters directly… . The person was muttered during the performance. These two were the only performances of Sand Pebble, along with the recitals we had at the school (Seoul National Univ. College of Agriculture), the auditorium before the university song festival. In 1977, he made 76 big and small stages. After I won the grand prize at the University Song Festival, there were a lot of requests for appearances, so I often went to broadcast. Since 1978 there has been no official activity for our rider. Of course there were a few more informal activities.


Q: So did you mean that the “Sand Pebble Sixth Solomon” released in March 1979 under the name “Hwarang (花 郞)” was an informal activity?-


Yes that's right. Sand Pebbles is basically because it was an internal principle to be active in the second year.“The generations ahead of us are C.C.R. If we are generations, we are deep purple generations ”: The growth period of the“ pop song generation ”


Q; I will ask you last about ‘after 1978’, including Sand Pebble's solo album. I want to go back to hear more of Lee Young Deuk's personal story. What kind of music did you enjoy listening to during the first years?–


Because I am a middle school ‘1st generation’ (note: assigning a school to go to a no-lottery draw), junior high school came out of a prestigious school, and high school left Gyeonggi High School. Pop songs that were popular at that time were heard on the board or radio. If the generations ahead of us are C.C.R. or Santana generations, we can say that it is a deep purple generation. I heard a lot of hard rocks like Deep Purple and Grandfunk Railroad. And although it's a bit different from hard rock, I also liked music like America's “Sister Golden Hair”.


Q: What other experiences did you have in your music activity besides listening to music? When did you start playing guitar, especially when?– There was a need to know how to play one instrument at a time during high school music. At that time, the piano wasn't confident enough to catch the guitar. After playing classical and acoustic guitars, I finally made a group sound. At that time, we formed a Gyeonggi High School and Gyeonggi High School Circle under the name of forget-me-not, and met at the Jensen Memorial Hall in Jeong-dong. At that time, I had a music presentation as a group and I made a group sound and played it. At that time I also played pop songs and sang.


Q: What did you like about Korean pop music besides ‘pop song’ including hard rock? For example, what did you think of Shin Ji-hyun's groups or group sound music such as key voices (Key Boys), hiss (He5), trippers, and tempests? How popular were these groups at the time?–


I didn't care much about domestic group sounds. Listening to songs known as hits, I wasn't interested because there were no guitar solos in foreign hard rock music. It seems that at that time, Korean group sound was considered “trot-like music.”


Q: The sound of a group sound in Korea is not that great. If so, did you like "Fork Song" music?– I rather liked folk songs. Lee Jang-hee, Song Chang-sik, Kim Min-ki… So I sang Song Chang-sik along with a friend, accompanied by a chord, and one sang two guitars, playing a more difficult phrase.


Q: When Lee Young-duk was in high school (1973 ~ 1975), Lee Jang-hee and Song Chang-sik enjoyed their heyday, and the sounds of the east light (Kang Keun-sik, Jo Won-ik, Lee Ho-jun, Yoo Young-soo), who played on their albums, often sounded It's time. Is there any influence of Kang Geun Sik's guitar playing on high school guitar kids?–


Geun-sik of course knew at that time. He is a good guitarist. However, it is hard to say that the image of the studio session musician was so strong that it influenced the high school students who played the guitar by making a group. Aside from that, I later went to the recording of Sand Pebble's record in a studio in Seoul and there was a sessionman who played the guitar very well. I'm not an artist but a technician, but after seeing it I decided to go professional (laughs). Anyway, it was Song Chang-sik's song (I don't remember the title of the song right now) when I entered Seoul National University Nongdae in spring 1976 and sang it with a friend at the welcome party of freshmen. That's what caught up with Sand Pebbles seniors, 'Hey, get that guy.'


Q: At that time, did music-loving young people go to places like music room? Who were the people who played together in such places?– I never went to a music room until high school. I guess I couldn't go there. However, after entering the university, there was a good music room called 'Academy Cafe' near Paldalmun Gate (usually called South Gate) in Suwon. The sound equipment with the JBL speakers was very good. So, young people who love music in Suwon went there a lot and listened to the music. It's a place where people over 30 years old don't dare to visit, but only young people. I went there often.“Live music was essential when college students played then”


Sand Pebbles in 1977.

Q: 그러면 이제 자연스럽게 샌드 페블스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먼저 그 당시 서울대 농대의 전반적 문화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 저희 뒤부터는 서울대 농대에 입학하면 1학년 때는 관악 캠퍼스에서 교양과정을 이수한 다음에 2학년 때 수원 캠퍼스로 왔는데 저희 때는 1학년 때부터 수원 캠퍼스에서 대학 생활을 했습니다. 수원 캠퍼스에 와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조용하고 폐쇄적인 분위기이고 때로 심심하기도 한 분위기이죠. 그대신 단합이 잘 이루어졌습니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사람도 많았던 것도 한 이유가 되겠죠. 샌드 페블스가 팀웍이 좋고 선후배간 관계가 돈독한 것도 이런 이유일 것입니다.

Q: 샌드 페블스의 선배들에 대해 여쭈어 보겠습니다. 특히 2기의 멤버가 눈에 띄는데 이수만 씨야 워낙 많이 알려진 분이라서 별도의 질문이 필요없겠지만, 김영민 씨 같은 경우 캠퍼스 출신 그룹 사운드의 효시라고 할 만한 스푸키스에서도 활동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김영민 선배는 72학번이고 샌드 페블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분입니다. 그 분이 스푸키스에서 활동했던 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스푸키스는 여러 대학에서 멤버를 모아 구성했기 때문에 샌드 페블스같은 캠퍼스 그룹 사운드와는 조금 다르죠. 그리고 스푸키스는 아마추어 그룹라기보다는 준(準) 프로 그룹이라는 점도 우리와는 다른 점이겠죠. 알고 계시지만 스푸키스는 기본적으로는 박성원의 백 밴드였으니까요.

Q: 스푸키스가 1973년 여름 TBC에서 주최하고 연포에서 열린 ‘캠퍼스 보컬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샌드 페블스는 참여하지 않은 것인지요? 이 대회 외에도 ‘1977년 대학가요제’ 이전에 샌드 페블스가 참여했던 경연대회 형식의 대회는 없었는지요? – 제가 샌드 페블스 활동을 할 때는 아니지만 그 대회에는 참가하지 않았던 게 확실합니다. 그 대회도 순수 아마추어들의 경연대회라기보다는 준프로급 그룹들이 나온 대회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 대신 1976년 서울대학교 관악 캠퍼스에서 열린 캠퍼스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에 샌드 페블스가 나가서 대상을 차지했습니다. 저희보다 한 기수 위의 선배들인 샌드 페블스 5기가 나갔었죠. 이 대회는 서울대학교의 단과대학별로 그룹 사운드가 출전했는데 에코스나 엑스타스같은 이름의 그룹들이 모두 나왔습니다. 다른 그룹들은 멤버 수가 9명에 육박했던 게 기억납니다. 뭐 그리 멤버가 많이 필요했는지…(웃음)

Q: 샌드 페블스의 일상적인 활동에 대해 묘사해 주십시오. 먼저 ‘연습’을 하기 위해서는 악보나 교본같은 것이 필요했을 텐데 어떻게 구했는지요? – 저희 6기 멤버들 가운데 악보의 콩나물 대가리를 볼 줄 아는 사람은 키보드를 치던 최광석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나머지 멤버들은 음반을 듣고 직접 ‘따서’ 연주하는 식이었습니다. 특별히 무엇을 ‘가르쳐 준’ 사람은 없었고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합주를 했습니다.

Q: ‘서클룸’이자 ‘연습실’의 위치나 규모는 어땠는지요? 아울러 악기나 장비 수준은 어땠습니까? – 써클룸이자 연습실이었죠. 처음에는 학교 캠퍼스에서 제일 외진 곳에 콘센트라고 부르는 미군들이 쓰다 버린 양철로 된 간이 막사에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학교 측에서 건물을 지어 주었습니다. 악기나 장비는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희 때 ‘대표’를 맡은 (김)창훈 형이 참 짠돌이였습니다. 그때 교외에서 연주를 하면 한 5만원 정도를 받았고, 교내에서 연주를 하면 1만 5천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김)창훈 형이 저희한테는 5천원 쯤밖에 안 주고 그걸 다 모으더군요. 그래서 저희가 시작할 때는 앰프가 세 개 정도밖에 없었는데, 저희가 다음 기(7기)에 물려줄 때는 앰프가 7개로 늘어나더군요.

Q: 교외에서 연주했다는 것은 주로 어떤 무대였나요? 혹시 ‘업소’에서 연주하신 일도 있었는지요? – 주로 다른 대학교의 축제 때 초대받아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판(음반)을 틀어 놓고 노는 게 참 낯설 때였습니다. 대학생들이 놀 때는 생음악이 필수적이었던 때였죠. 그렇다고 대학생 축제 때 프로페셔널 그룹을 부르면 분위기가 영 맞지 않으니까 저희같은 캠퍼스 그룹들이 많이 초대를 받았던 것이죠. 그때는 강한 사운드로 팝송(주로 하드 록)을 연주해야 잘 놀던 때였습니다. ‘업소’에서 연주했던 일요? 한번 있습니다(웃음). 그런데 저희 기수(6기)의 공식적 활동이 끝난 다음의 일입니다. 성남에 있는 한 나이트클럽에서 3일 정도 연주한 적이 있는데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습니다.

Q: 샌드 페블스의 경우 ‘정기발표회’ 형식의 공연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정기발표회는 어디서 했는지요? 또 공연을 보러온 청중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요? – 정기발표회는 1년에 한 번 했습니다. 서울대 농대의 대강당에서 했는데 그곳이 정확히 1,442석인 곳인데, 객석이 꽉 찼습니다. 사실 이 강당이 꽉 차는 때는 1년에 단 한번, 샌드페블즈 공연때뿐이었습니다. 본교생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자유롭게 보러올 수 있는 공연이었습니다.

Q: 발표회나 기타 무대에서 어떤 레퍼토리를 연주했는지요? 김창훈 님의 기수(5기)에서는 “We’re an American Band”, “Black Diamond”, “Sun Rise”, “Who’ll Stop the Rain” 등을 했다고 합니다만… – 그랜드훵크 레일로드의 “We’re an American Band”와 키스(Kiss)의 “Black Diamond”는 저희 기수에서도 많이 했습니다. C.C.R.의 “Who’ll Stop the Rain”같은 곡은 저희 기수에서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 외에 레너드 스키너드(Lynyrd Skynyrd)의 “Simple Man”, 유라이어 힙(Uriah Heep)의 “Easy Living”같은 곡을 즐겨 연주했고, 나자레쓰(Nazareth)의 “Love Hurts”나 레인보우(Rainbow)의 “Temple of the King”같은 느린 곡도 몇 개 연주했습니다. 산타나의 “Evil Ways”도 한번 연습해 보았는데 중간에 키보드가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포기했습니다(웃음).

Q: 기타 모델은 어떤 걸 사용했나요? 그리 값비싼 모델을 사용하기는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만… – 실버톤(Silvertone)이라는 일제 모델을 사용했습니다. 대학가요제에도 그걸 들고 나갔고 음반을 녹음할 때도 그 모델로 연주했습니다.. 나중에 펜더 스트래토캐스터를 장만해서 찬조 출연을 할 때는 펜더를 썼죠.

Q: 1977년 대학가요제에서 “나 어떡해”를 연주할 때도 그랬고, 뒤에 화랑의 음반에서도 “달려라”같은 곡에서는 퍼즈 이펙트를 사용한 것 같습니다. 특히 기타 솔로가 있는 부분에서 많이 사용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당시 캠퍼스 그룹들에서 이펙트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전반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 그때는 요즘처럼 페달을 몇 개 이어 놓고 이펙트를 구사한 것도 아니고 한 두개를 사용했습니다. 퍼즈와 와와(주: 이영득 님은 당시 발음하던 대로 ‘와우’라고 발음했다)를 많이 사용했죠. 그런데 저는 와와는 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퍼즈의 경우는 그걸 써야 기타를 잘 못 치는 티가 나지 않기 때문이었죠 하하.

Q: 화랑의 음반에 수록된 “오직 그대만을”이나 “난 영원한 소녀”에서는 당시로서는 듣기 힘든 이펙트 소리가 들리는데 플랜저나 코러스를 이용한 것인가요? – 아, 그건 플랜저나 코러스가 아니라 페이저입니다. 1977년에 샌드 페블스 활동하면서 조금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장만한 것이었죠. 당시로서는 페이저 같은 이펙트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습니다.

Q: ‘기타리스트’로서 외국의 기타리스들 가운데 특별히 좋아했던 사람이 있다면 어떤 사람이었나요? – 저희가 활동할 때가 ‘빨리 치는’ 것이 잘 치는 것으로 인정받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딥 퍼플의 리치 블랙모어(Ritchie Blackmore)가 그때 기타 치던 사람들의 목표였으니까요. 저희는 아마추어 그룹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프로페셔널하게 빨리 치는 것에 목숨을 걸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좋아했던 기타리스트는 윙스(Wings)의 데니 레인(Denny Laine)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비틀스의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의 기타도 좋아했구요. (주: 윙스는 1970~80년대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의 그룹이었고, 이 곳의 기타리스트 데니 레인은 1960년대 후반 무디 블루스(The Moody Blues)의 기타리스트였다). 기타 연주에 멜로디감이 뛰어난 사람들이었죠.

Q: 샌드 페블스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당시의 사회상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그 당시가 ‘유신체제’라서 캠퍼스의 분위기가 그리 밝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특히 1975년 긴급조치 9호 발표 이후 학도호국단이 만들어지면서 모든 써클(동아리)을 ‘학도호국단’ 산하에 두게 되었는데, 샌드 페블스의 경우 학도호국단 산하에 있다는 게 불편한 점은 없으셨는지요? – 글쎄요. 우리가 학도호국단 산하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런 사실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룹 사운드를 한다는 자체가 반항적인 것으로 간주되던 시대였고 저희도 (그때 기준으로) 장발을 하고 다니는 등 반항했던 면도 있지만, 그때 저희 세대는 한편으로 반항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순종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Q: 제가 대학교를 다닌 1980년대는 캠퍼스 그룹 사운드에 대한 ‘운동권 대학생’의 시각이 그리 곱지 않았습니다. 그때와 비해서 1970년대 후반 일반 대학생들의 캠퍼스 그룹에 대한 시각은 어땠다고 생각합니다. – 그랬다고 하더군요. 후배들에게 이야기 듣기로는 1980년대는 우리 때와는 많이 달랐다고 합니다. 반면 제가 대학교를 다닐 때는 학생들이 캠퍼스 그룹 사운드가 연주할 때는 함께 즐기는 분위기였습니다.

“음악을 하지 않으니까 근질근질하고 미련이 생겼습니다”: 화랑(花郞)의 독집 앨범

Q: Then, naturally, we will move on to the sand pebbles story. First of all, tell me about the overall culture of SNU.


– After we entered Seoul National University, we went to Gwanak Campus in the first year and then came to Suwon Campus in the second year. As you may have noticed at Suwon Campus, it is quiet, closed and sometimes boring. Instead unity worked well. One reason is that many people lived in dormitories. That's why Sand Pebbles has good teamwork and good relationships between seniors and juniors.


Q: I'd like to ask about the seniors of Sand Pebbles. In particular, there are two members who are prominent, and I'm Soo-man Lee, so I don't need a separate question, but Kim Young-min is also known as a spooky lover of group sound.


– Kim Young-min is a 1972-year-old student and played an important role in Sand Pebbles. It is true that he was active in Spooky's. But Spookys is a bit different from campus group sounds like Sand Pebble, because they've assembled members from different universities. And the difference between us is that Spooky's is a semi-professional group rather than an amateur group. As you know, Spookys was basically Park's back band.


Q: Spookys was awarded the Grand Prize at the Campus Vocal Contest hosted by TBC in the summer of 1973 and held in Yeonpo. Didn't Sand Pebbles join here? In addition to this contest, were there any competitions in the form of a contest in which Sand Pebbles participated before the 1977 College Song Festival?


– I wasn't in the Sand Pebbles, but I certainly didn't participate in the competition. I understand that it is not a contest of pure amateurs but rather a semi-professional group. Instead, Sand Pebbles went on to win the Campus Group Sound Contest at the Seoul National University Gwanak Campus in 1976. Five Sand Pebbles, seniors above us, went out. The contest featured group sounds by colleges of Seoul National University, with groups such as Echos and Extas. I remember that the other groups had nine members. What did you need so many members? (laugh)


Q: Please describe the daily activities of Sand Pebbles. First of all, to practice, you would need a sheet music or textbook. How did you get it?


– The only members of our sixth member who could see the bean sprouts of sheet music were only Choi Kwang-suk who played the keyboard. The rest of the members listened to the album and played ‘phat’. In particular, there was no one who “taught you” something and joined them head-to-head.


Q: What was the location and size of the 'circle room' and the 'practice room'? What was the instrument or equipment level?


– It was a circle room and a practice room. At first, I started in a tin barn that was used by American soldiers, called the outlets, in the remotest part of the school campus, and later built by the school. The instrument or equipment was not very good. However, our brother, Kim, who was in charge of 'representative' was really salty. At that time, I got about 50,000 won when I played in the suburbs and 15,000 won when I played in the suburbs. But (Kim) Changhoon gave us only about 5,000 won and collected them all. So when we started, there were only three amps, but when we passed on to the next (7th) we got seven amps.


Q: What kind of stage did you play in the suburbs? Have you ever played in a business?


– Mainly invited to go to festivals at other universities. At that time, it was very strange to play with the plates (?). When college students played, live music was essential. However, when I call a professional group at the University Student Festival, the atmosphere doesn't really change, so many campus groups like us were invited. It was a good time to play pop songs (usually hard rock) with strong sounds. Did you play at the business? (Laughs) By the way, after the official activity of our rider (sixth) is over. I played for three days at a nightclub in Seongnam, but I'll talk about it later.


Q: I heard that Sand Pebble performed a regular presentation. Where did you have a regular presentation? What kind of people did you come to see the performance?


– Regular presentations were held once a year. I did it at the grand auditorium of SNU and it was exactly 1,442 seats, and the seats were full. In fact, the auditorium filled up only once a year, during the Sand Pebbles. It was a performance that not only our students but also other people could see freely.


Q: What repertoire did you play on the recital or guitar stage? Kim Chang-hoon's rider (the fifth) said “We ’re an American Band,” “Black Diamond,” “Sun Rise,” “Who'll Stop the Rain.”


– “We ’re an American Band” by Grand Shank Rail Road and “Black Diamond” by Keith have done a lot in our riders. Songs like “Who ’ll Stop the Rain” by C.C.R. In addition, I enjoyed songs such as Lynyrd Skynyrd's “Simple Man” and Uriah Heep's “Easy Living”, as well as Nazareth's “Love Hurts” and Rainbow's “ I also played some slow songs like “Temple of the King”. I also practiced Santana's "Evil Ways" and gave up because of a difficult keyboard in the middle (laughs).


Q: What other models did you use? It would have been difficult to use such expensive models…


– A Japanese model called Silververtone was used. I took it out to the college song and played it as a model when I recorded it.


Q: I did it when I played “What Do I Do” at the 1977 College Song Festival, and later I used the fuzz effect in a song like “Run” on a gallery album. I used it a lot especially in the part where there was a guitar solo. In this regard, tell us the overall story of how the campus groups at that time used the effect.


– At that time, I didn't use a couple of pedals like these days, and used one or two. I used a lot of fuzz and wawa (note: Lee Youngdeuk pronounced 'wow' as I pronounced at the time). But I did not use it very well. In the case of fuzz, you didn't get to play the guitar so badly.


Q: Did you use a flanger or a chorus to hear the effects of "Only You" and "I'm an Eternal Girl" on the gallery?


– Oh, it's not a flanger or a chorus, but a pager. In 1977, I made a little money by working with the Sand Pebbles, which was great. At the time, there were not a lot of effects like pagers.


Q: If you were a guitarist and especially liked one of your foreign guitarists?


– When we were active, the “quick hitting” was when we started to be recognized as good hits. Deep Purple's Ritchie Blackmore was the goal of the others. Because we were an amateur group, we didn't risk our lives playing so professionally. My favorite guitarist was someone like Wings's Denny Laine. I also liked the guitar of the Beatles' George Harrison. (Note: Wings was a group of Paul McCartney in the 1970s and '80s, and guitarist Danny Lane was a guitarist in The Moody Blues in the late 1960s.) They were great melodies for playing guitar.


Q: At the end of the Sand Pebble story, I would like to ask you a question about the society at that time. At that time, it was a “body system,” so the atmosphere on campus was not so bright. In particular, after the announcement of the 9th Emergency Measure No. 9, the HKDO was created, and all circles (clubs) were placed under the HKDO.


- I do not know. I knew we were under the HKDO, but I didn't seem to care about that. It was a time when group sounds themselves were considered rebellious and we were rebellious (by then) long hair, but our generation was rebellious on the one hand and obedient on the other.


Q: In the 1980s, when I was in college, I wasn't very multiplying with the “college student” view of campus group sound. Compared to that, what was your view of campus groups in the late 1970s?


– I told you. According to my juniors, the 1980s were very different from ours. On the other hand, when I was in college, it was an atmosphere that the students enjoyed when the campus group sounded. “I din't listen to other music, I was tired”

샌드 페블스(화랑)의 데뷔 음반 뒷면에 실린 멤버들의 모습

Q: 1977년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차지한 후 6기 샌드 페블스는 공식적으로 활동을 중단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가끔씩은 방송같은 곳에서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요. 특히 대학가요제가 해마다 개최될 때 ‘축하무대’에 올라서 연주하는 모습을 종종 보았는데요… 아무래도 방송 전파를 탔기 때문에 유명세를 탔기 때문인 듯합니다만… – 맞습니다. 일단 대상을 차지하다 보니 방송에서 자주 저희들을 불렀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저희 다음 기인 7기가 공식 활동을 하던 때인데 KBS-TV에서 저희 6기와 7기를 함께 불렀습니다. 그래서 연주하는 것을 녹화했는데 PD가 ‘너희(6기)가 연주하는 것만 방송에 내 보내고 7기가 연주하는 것은 내 보내지 않으면 안 되느냐’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우리는 ‘절대 안 된다. 그러려면 둘 다 내 보내지 말라’고 강하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했는데도 결국은 우리가 연주하는 장면만 방송에 내 보내었습니다. 그래서 후배들이 우리한테 항의를 많이 했죠. 그런데 왠 걸, 그 방송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보더니 “쟤들 뭔데 저렇게 장발을 하고 TV에 나오느냐”고 노발대발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방송국 PD가 징계를 당했다고 합니다. 이른바 ‘장발 사건’이라고 우리 샌드 페블스 내에서는 유명한 에피소드입니다.

Q: 방송 출연과 관련해서 또 다른 에피소드가 있으면 소개해 주십시오. – 아, 제가 대학원에 다닐 때입니다. 일단 음악 활동을 모두 포기하고 ‘개과천선’해서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교수님들이 저를 보는 눈치가 영 이상하더군요. ‘딴따라’가 뭐하러 대학원까지 와서 공부한다고 그러느냐는 눈치였습니다. 그런데 그 해 가을에 대학가요제가 또 한 번 열렸고 저희 기수보고 참여해 달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어쩌겠습니까. 나가야죠. 그래서 제가 방송에 나간 것을 교수님들이 혹시라도 볼까 봐 선 글라스를 끼고 나갔습니다(웃음). 다행히 별 일은 없었지만… 그때가 아마 1980년일 것입니다.

Q: 1980년에 접어 들면 비공식 활동도 모두 접고 ‘음악인’으로 나아가려는 계획은 포기했다는 말로 들립니다. 그렇다면 1979년 3월에 ‘화랑’이라는 이름으로 음반을 발표할 때는 아직은 비공식적으로 활동을 계속했다는 이야기인가요? – 맞습니다. 참고로 저는 3학년 재학 중이던 1978년에 (김)창훈 형에 이어 샌드 페블스의 ‘대표’를 맡아서 후배들과 계속 교류하고 있었습니다. 음악을 하지 않으니까 몸이 근질근질하더군요. 그때 이런저런 미련과 욕심이 생겼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저희 기수 멤버들 가운데 여병섭과 김영국의 경우 저보다도 음악을 계속하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농교육과를 다니던 친구의 경우 졸업 후에 농고(농업고등학교)의 교사를 해야 하는데, 그룹 사운드를 했던 사람으로서는 재미없고 따분한 삶이라서 다른 길을 걷겠다는 욕망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길을 모색하던 중 음반까지 발매하게 된 것이죠.

Q: 일단 확인해 둘 것 하나가 있습니다. ‘화랑’이 그룹 이름인가요, 아니면 앨범 제목인가요? 그룹 이름으로 짐작됩니다만 ‘샌드 페블스 6기’라는 부제도 붙어 있어서 혼란스럽습니다. 1978년 대학가요제의 축하 무대에 참여했을 때는 ‘모래와 자갈’로 소개된 일이 있는데 새 이름을 지은 것인가요? – 화랑은 그룹의 이름입니다. 그때는 저희가 이미 활동을 끝낸 상태라서 샌드 페블스라는 이름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새 이름을 만든 것이죠. 그런데 아무래도 화랑이라는 이름은 생소하니까 ‘샌드 페블스 6기’라는 것을 적어 놓았죠. 편법을 사용한 셈이죠.

Q: 앨범 발매를 기획하고 주선한 사람은 누구신지요? ‘예맥기획’이라는 프로덕션 이름과 대도레코드라는 음반사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만… – 앨범을 기획해 준 사람은 저희 기수의 보컬을 맡은 여병섭의 매형입니다. 그분이 대도레코드에 계셨던 분인지 대도레코드와 관계를 갖고 있었는지는 잘 모릅니다만 그 분이 모든 일을 기획하고 주선했습니다.

Q: 화랑의 음반은 1978년에 열린 해변가요제와 대학가요제에 입상한 항공대학교의 활주로나 홍익대학교의 블랙 테트라의 음반과 거의 비슷한 시점에 발매되었습니다. 오히려 조금 늦은 것 같습니다. 활주로나 블랙 테트라의 음반이 나온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보아도 될런지요? –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활주로와 블랙 테트라, 즉 배철수 씨나 구창모 씨는 대학가요제와 해변가요제에 참가할 때부터 연예계에 진출할 생각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입상 직후 곧바로 앨범도 발표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저희는 순수 아마추어리즘을 가지고 있었고, 계속 음악을 할 수 있을지 어떨지 타진하는 정도였습니다.

Q: 이 앨범에는 대학가요제의 입상곡인 “나 어떡해”가 실리지 않았는데 특별한 사정이 있는 건지요? 김창훈 형이 곡을 주지 않으려 했다든가?(농담입니다^^) – 그게 아니라 MBC 대학가요제에 출전한 곡은 서라벌인가 어딘가에 판권이 팔려 나갔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나 어떡해”를 싣고 싶었지만 실을 수가 없었던 것이죠.

Q: “나 어떡해”가 최초의 창작곡을 연주한 것이라면 이 음반의 수록곡들은 1977년 하반기 이후 1978년에 작곡된 곡으로 추정됩니다. 멤버 대부분이 한두 곡을 작곡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 맞습니다. 앨범을 만들어 보자고 결정한 다음 각자가 곡을 만들어서 가져와 보자고 말했죠. 작사나 작곡을 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Q: 곡이 만들어진 뒤 연습은 어떻게 하셨는지요? – 아까 말한 것처럼 저희가 업소에서 유일하게 연주한 것이 이때입니다. 곡을 만든 다음 연습을 겸해서 성남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딱 3일 동안 연주한 것이죠. 그런데 저희가 처음 가니까 다른 대학교 출신의 그룹은 세 달 동안 연주하고 있더군요. 처음 몇 번은 주인한테 타박을 들었습니다. 손님들이 춤을 추게 음악을 연주해야 하는데 영 춤추기 힘든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3일이 지나니까 나중에는 ‘더 있어줄 수 없느냐’고 요청하더군요.

Q: 녹음은 어디서 했습니까. 음질이 그리 좋지 않은 것으로 보아 매우 짧게 한 것 같습니다. – 녹음은 저희가 3학년 겨울방학을 보낼 때, 그러니까 1978년 12월과 1979년 1월 쯤에 했습니다. 이촌동에 있던 서울 스튜디오에서 이틀 동안 녹음을 끝냈죠. 그때는 그룹의 음반이라면 한번에 합주하는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반주(악기 연주)는 한꺼번에 녹음을 끝마치고 노래만 더빙을 하는 식이었죠. 그래서 무대에서 직접 연주할 때는 참 좋았던 곡이 막상 음반으로 들어 보니 그다지 성에 차지 않더군요.

Members on the back of Sand Pebble's debut album


Q: After taking the grand prize at the University Song Festival in 1977, the sixth Sand Pebbles said they had officially suspended. But sometimes I could see him in a place like broadcast. In particular, when the college song festival was held every year, I often watched the performance on the 'celebration stage'. It seems to be because we got on celebrity because we got broadcast electric wave by all means…


- Yes. Once we got the grand prize, we often were requested on the air. Once this happened. Our next seventh generation was officially active, and we sang our sixth and seventh episodes together on KBS-TV. So I recorded what I was playing, and the PD said, 'I only have to send you what you play (6) and broadcast what you have to play. That's why we're never. To do this, don't let both go away. ' Even so, in the end we only broadcast the scenes we played. So the juniors protested us a lot. By the way, President Park Chung-hee's president watched the broadcast and said, “What are they doing? That's why the station PD was disciplined. The so-called Long Hair Incident is a famous episode in our Sand Pebbles.


Q: If there's another episode about the show, please introduce it.


– Oh, it's time I went to graduate school. First of all, I gave up all my music activities and went to graduate school with 'Kae-Gwa-Seon-Seon'. I was reminded of what 'Tangtara' came to graduate school to study. But in the fall of that year, the college song festival was held again and we were contacted to see our riders. What do you think? I have to go out. So I went out wearing sunglass because I could see that I was on the air (laugh). Fortunately nothing happened… That's probably 1980.


Q: In 1980, it sounds like you had abandoned all your unofficial activities and abandoned your plan to become a musician. If so, when you released the album in March 1979 under the name of 'Hwarang', did you still talk about it?


- Yes. For reference, in 1978, while I was in the third year, I took the position of (President Kim) Chang Hoon and “President” of Sand Pebble. I didn't listen to music so my body was sick. At that time, I became foolish and greedy. I, however, had a stronger desire to continue music than me in the case of our jockey members Yeo Byung-seop and Kim. A friend who attended the Agriculture Education Department had to be a teacher of a farm (agricultural high school) after graduation, but as a group sounder, it was not fun and boring, and he had a strong desire to walk the other way. That's why I was looking for a way and released a record.


Q: I have one thing to check. Is "Hwarang" a group name or album title? I guess it's a group name, but I'm confused because there's also a subtitle called Sand Sixth. When I participated in the celebration of the University Song Festival in 1978, it was introduced as 'sand and gravel'.


– Gallery is the name of a group. We made a new name because we couldn't use the name Sand Pebbles because we were already done. But the name Hwarang is unfamiliar, so I wrote down 'Sand Pebbles 6th Generation'. It's a shortcut.


Q: Who has planned and arranged the album release? There is a production name of 'Art Planning' and a record label of Daedo Record.


– The person who designed the album is Yeo Byung-seop's brother-in-law who is the vocal of our jockey. I don't know if he was in Daedo Record or had a relationship with Daedo Record, but he planned and arranged everything.


Q: The gallery's album was released at about the same time as the runway of the Aviation University and the Black Tetra of Hongik University, which won the Beach and College Music Festival in 1978. It seems rather late. Can you think of it in a similar context to the runway or the Black Tetra record?


– I don't think so. I think the runway and the Black Tetra, Bae Cheol-soo and Koo Chang-mo, wanted to enter the entertainment industry when they participated in the University Song Festival and the Beach Song Festival. So I think the album was released immediately after winning the prize. On the other hand, we had pure amateurism, and we could see if we could continue to play music.


Q: Doesn't this song contain the song "What Do I Do?" Kim Chang-hoon did not want to give a song?


– No, the song that appeared in the MBC College Song Festival was sold out somewhere. That's why we wanted to put on "What should I do?"


Q: If “What I Do” was the first original song, these songs are presumed to have been written in 1978 since the second half of 1977. Most of the members seem to have composed one or two songs.


- Yes. I decided to make an album, and each of them told me to make a song and get it. It didn't take long to write or compose a song.


Q: How did you practice after the song was made?


– As I said before, this is the only time we played at the store. I made a song and then practiced it and played for three days in a Seongnam nightclub. But when we first went, a group from another university had been playing for three months. The first few times I heard a bruise from the owner. They had to play music so that they could dance, but they were playing music that was hard to dance. Then three days later, she asked, 'Can you stay longer?'


Q: Where did you record? The sound quality is not so good, so it seems to be very short.


– Recording was done when we were in the third grade winter break, so in December 1978 and around January 1979. I finished recording for two days at Seoul studio in Ichon-dong. At that time, I knew that all the records of the group would join together at once. Accompaniment (musical instrument) was to finish the recording all at once and only dubbing songs. So when I played directly on the stage, I heard a really good song on the record, so it didn't take much to effort.

Q: 상업적으로 어떤 결과를 얻었는지요? 산울림이 한참 인기를 높일 때라서 다소 ‘기대감’을 가지고 제작했을 것 같은데 어떠셨는지요? 불행히도 음반에서 ‘히트곡’이 나오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 예, 히트곡이 나오지 못했죠. 하지만 “달빛 속에서(저 새)”같은 경우 나름대로 구성을 복잡하게 만들어 보려고 한 곡이고, 제가 작곡한 곡인 “달려라”도 애착이 많았던 곡입니다. “넌 영원한 소녀”는 후배들이 좋아해서 뒤에도 많이 연주한 곡이고, 13기가 1985년 유니세프 가요제에서 연주해서 금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Q: 앨범을 발표한 뒤 방송이나 공연 등의 활동도 그리 많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 예,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순수 아마추어라는 샌드 페블스의 취지에 맞추어 본다면 음반을 낸 것이 잘 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새로 만든 곡들은 후배들에게 주어서 연주하게 하는 것으로 끝냈어야 하는데 저희가 욕심을 부린 것이죠.

“원 없이 놀았다는 점에서 학창 생활을 참 잘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연예계’를 떠나 ‘학계’로

Q: 그렇다면 샌드 페블스 6기의 활동은 이 앨범을 내는 것으로 모두 그친 셈인데, 멤버들 가운데 드럼을 치던 김영국 님은 뒤에도 산울림의 김창완 님의 공연이나 음반에서 함께 활동한 것이 있다고 들었는데요?(주: 1980년대 초 김창훈, 김창익이 군에 입대했을 때 김창완은 박동률, 유지연, 김영국 등과 함께 고장난 우주선이라는 그룹을 잠시 만든 일이 있다). – 그건 아마도 찬조(게스트)로 참여한 것일 겁니다. 산울림의 막내 김창익이 드럼을 잘 못 쳤거든요(웃음). 그래서 (김)영국이를 불러서 드럼을 치게 한 적이 있는 정도일 겁니다. 사실 (김)영국이는 샌드 페블스 6기 멤버이지만 1학년 때부터 (김)창훈 형이 있는 5기 때부터 드럼을 쳤어요. 그때 5기에서 드럼을 맞던 사람이 어떤 사정으로 빵꾸를 내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김)영국이는 샌드 페블스 공식 활동을 1년 반 정도 한 셈이고, (김)창훈 형이나 산울림 멤버들과도 절친한 사이였죠.

Q: 지금 시점에서 회고할 때 당시 샌드 페블스에서 활동했던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 샌드 페블스로 공식 활동하던 2학년 때 제가 과(科)에서 꼴찌를 했습니다. 하하. 3학년 때도 샌드 페블스 대표를 맡느라 성적이 그리 좋지 못했구요. 그렇지만 원 없이 놀았다는 점에서 학창 생활을 참 잘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Q: 그때의 활동이 현재 하고 계신 대학교 교수로서의 업무에 도움이 된다면 어떤 점일까요? – 대학교 다닐 때 놀고 다니던 사람도 ‘개과천선’하면 나중에 잘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이겠죠(웃음). 그런 게 있습니다. 공부 안 하는 학생들에게 다른 교수가 공부하라고 그러면 잘 듣지 않지만 제가 말하면 귀를 기울입니다. 한때 ‘연예계’에서 놀았던 것을 젊은 학생들이 아니까 오히려 말이 통하는 것이겠죠.

Q: 한번 ‘연예계 생활’을 한 사람이 ‘개과천선’하고 조용히 살다 보면 가끔씩 몸이 근질근질하다고 합니다. 마치 ‘마약 같다’고 하던데요?(웃음) 게다가 대상까지 차지하고 음반까지 발매한 분이라면 이런 증상이 남다를 것 같습니다. 어떠신지요? – 지금도 가끔은 그렇지만 예전 같지는 않습니다. 사실 교수가 되는 일이 매우 힘들었습니다.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유학 다녀오고… 바쁘게 살다 보니까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고사하고 음악 듣는 일도 예전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 다시 음악에 대한 관심이 생깁니다. 학교 연구실과 집에 꽤 고급 오디오를 구비하고 음악을 듣고 있는데, 단 종목이 바뀌었습니다. 재즈나 클래식 쪽으로. 요즘의 록 음악은 몇 개 들어보기는 했지만 제가 젊었을 때 들은 록 음악처럼 멜로디가 좋거나 신선하지는 않더군요.

Q: 샌드 페블스의 다른 분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간략히 말씀해 주십시오. – 보컬을 맡았던 여병섭은 L모 대기업 계열의 광고 회사에 입사했다가 퇴사해서 자기 사업체를 차렸습니다. (여)병섭이가 저곳에 들어간 것은 샌드 페블스 2기의 김영민 선배가 미리 그곳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죠. 다른 멤버들도 직장 생활 잘 하고 있습니다.

Q: 요즘도 가끔 모여서 연주할 기회는 없으신지요? – 샌드 페블스가 5년 혹은 10년마다 기념 공연을 하는데 그때 무대에 섭니다. 2001년 10월 6일에는 남대문 메사 팝콘 홀에서 샌드 페블스 창립 30주년 기념 콘서트를 했고, 1991년 1991년 9월 10일에는 롯데호텔 크리스탈 볼룸 20주년 기념 공연을 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샌드 페블스 홈페이지에 가면 나와 있을 겁니다. 일종의 ‘동문회’같은 행사인데 그렇다고 꼭 샌드 페블스 출신들만 보러 오는 것은 아니고 비교적 자유롭게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행사입니다. 기념 콘서트를 열 때마다 저희 6기한테는 꼭 무대에 서라고 부탁을 해서 연주를 하게 됩니다.

Q: 예, 앞으로 무대에 선 모습을 직접 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활동하는 샌드 페블스의 후배들도 이영득 님 때같은 영광스러운 순간을 다시 한번 맞이하기 바랍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20030926 | 신현준 homey@orgio.net


Q: What did you get commercially? It was a time when the forest (San Ul Lim) was very popular, so I thought it was produced with a sense of expectation. Unfortunately, it doesn't seem to be a hit song.


– Yes, no hits. However, in the case of “In the Moonlight (that bird)”, I tried to complicate the composition in my own way, and the song I wrote, “Run” was also a song I loved. “You're an Eternal Girl” is a song that many juniors liked and played afterwards, and 13 gigs were awarded at the UNICEF Song Festival in 1985 and won the gold prize.


Q: After the album was released, there wasn't much activity such as broadcasting or performances.


– Yes, not very much. In fact, according to the intention of the sand pebbles of pure amateurs, it seems that it was not a good thing to release a record. The new songs should have been finished by giving juniors to play, and we were greedy.

“I think I spent my school life very well because I played without a circle”: leaving the entertainment world to the academic world


Q: Then, the activities of the sixth Pebble Sands were stopped by the release of this album.I heard that Kim Young-gung, who was playing drums, was also involved in the performances and recordings of Kim Chang-wan in Sanwoolim? (Note: 1980 When Kim Chang-hoon and Kim Chang-ik joined the military in the early 1990s, Kim Chang-wan made a group of broken spaceships with Park Dong-ryul, Yu Ji-yeon and Kim England).


– It's probably a participant. Kim Chang-ik, the youngest of the Sanwoolim, didn't play the drums well (laughs). So (Kim) would have called the British to play the drums. In fact, (Kim) is a 6th member of the Sand Pebbles, but since I was a freshman, I've played drums since I was (Kim) Chang Hoon. At that time, the person who was hit by the drum in the fifth stage did it because of some puncture. So, (Kim) England has been doing Sand Pebbles official activities for about a year and a half, and he was close to (Kim) Chang Hoon and his members.


Q: What do you think of your time at Sand Pebbles at that time?


– When I was in my second year at Sand Pebble, I was last in the department. haha. When I was in the third grade, I wasn't very good at representing Sand Pebbles. However, I think that I spent my school life well because I played without a circle.


Q: What would you do if your activities helped you as a university professor?


– Someone who used to play when they were in college showed that “gaecheoncheon” can be good later (laughs). There is such a thing. If you don't study and ask another professor to study, you won't listen well but I listen. The younger students know what they once played in the entertainment world.


Q: When a person who lived in the entertainment world lived quietly with Gaecheon-seon, he sometimes said that he was sick and tired. It's like 'drug-like'? (Laughter) And if you're the one who got the target and released the record, this symptom would remain. How are you?


– Even now, but sometimes not the same. In fact, being a professor was very difficult. Studying at graduate school and studying abroad… I lived so busy playing music and listening to music was not the same. Then, recently, interest in music has come back. The school lab and home have quite a bit of high-end audio and listening to music, but the sport has changed. To jazz or classical. Although I've heard some rock music these days, it's not as good or fresh as the music I listened to when I was young.


Q: Tell me briefly how other people in Sand Pebbles are doing.


– Yoo Byung-seop, who was a vocal, joined an advertising company of a large conglomerate company and left the company to set up his own business. (Female) Byeongseop went in there because Kim Young-min, a senior of the Pebble Sands, was already there. Other members are doing well at work.


Q: Haven't you had a chance to play together sometimes?


– Sand Pebbles performs a commemorative show every 5 or 10 years, then stands on stage. On October 6, 2001, the concert was held at Namdaemun Mesa Popcorn Hall to commemorate the 30th anniversary of Sand Pebble's founding. Details can be found on the Sand Pebbles homepage. It's a kind of event called Alumni Association, but it's not just for people coming from Sand Pebbles, but it's an event that anyone can come in relatively freely. Every time we hold a commemorative concert, we're asking the sixth stage to be on stage.


Q: Yes, I would like to have a chance to see myself on stage. We hope that the current activists of Sand Pebbles will once again face the same glorious moment as Lee Young Deuk.


Hyunhyunjun homey@orgio.net


http://blog.daum.net/1413/3128

샌드페블즈의 순수한 음악정신을 이어가고자 대학생활 중 2학년 한해만 활동하고 이듬해에 신입회원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으며 그들이 지향하던 음악정신은 이후 30년간 샌드페블즈의 근간이 되었고 김창완, 김창훈, 김창익 삼형제로 구성된 산울림의 음악에도 그 영향을 미쳤다.


In order to continue Sand Pebbles' pure spirit of music, the college has been active only in the second year of college life, and has inherited the tradition of handing over to new members in the following year. It also influenced the music of Sanwoolim, which consists of three brothers.

바로 '대마초 파동'과 '가요정화운동'이다. 이 말들이 지금까지의 글들에 거의 모두 등장했다는 건 그만큼 큰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일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1970년대 대중음악계에 가장 크고 강력한 영향을 끼친 건, 음악인이 아니라 이 나라의 대통령이었고 이 나라의 어처구니없는 정책이었다.

그 어처구니없는 정책은 1970년대 중후반의 대중음악계를 공백으로 만들어 놓았다. 남아있는 음악인은 몇 없었고, 그나마 발표되는 노래들은 심의에 의해 난도질되기 일쑤였다.

그런 상황에서 1977년 처음 열린 대학가요제는 정부와 대중음악계 모두의 필요에 만들어진 행사였다.

정부의 입장에서는 대학생들의 건강한 이미지를 이용해 대중들의 관심을 돌릴 필요가 있었고, 대중음악계의 입장에서는 공백 안에 집어넣을 새로운 얼굴들이 필요했다. 대학가요제는 그렇게 '관제행사'라는 오명 속에서 실제로 젊고 재능 있는 음악인들을 배출해낸 희비극의 현장이 되었다.

1977년 9월, 정동에 있던 문화체육관에서 대중들의 관심을 모으며 첫 대학가요제가 열렸다.

그날의 주인공은 샌드 페블즈(Sand Pebbles)였다.

샌드 페블즈는 1970년 처음 결성돼 이수만(2기)과 산울림의 김창훈(5기) 같은 음악인을 배출해낸 서울대학교 농대의 캠퍼스 밴드였다. 김창훈은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후배인 6기 샌드 페블즈에게 대학가요제 참여를 권유한 이도, 또 대상 수상곡인 '나 어떡해'를 만들어준 이도 김창훈이었다(김창훈 역시 형 김창완과 함께 '문 좀 열어줘'로 참여했지만 졸업생이었던 김창완의 신분 때문에, 혹은 '문 좀 열어줘'를 이해하지 못한 심사위원들 때문에 떨어졌다는 뒷얘기가 있다).

대학가요제라는 행사 자체도 그랬지만, 샌드 페블즈의 대상 수상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각 대학마다 하나씩은 있었던 캠퍼스 밴드의 존재를 대중들에게 처음 알린 의미가 가장 컸다. 그 전까지 대중들이 알고 있던 그룹사운드는 야간업소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프로페셔널한 집단이었다.

그렇기에 캠퍼스 밴드들은 대중들이 알고 있던 그룹사운드의 능숙한 연주력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미숙했고 지극히 아마추어적이었다. 가요제가 배출한 최고의 스타 밴드 송골매가 음악생활 내내 가졌던 연주력에 대한 열등감이 이를 잘 증명해준다.

하지만 샌드 페블즈라는 캠퍼스 밴드에겐 아마추어리즘이 주는 풋풋함과 순수함이 있었고 대학생 특유의 건강함이 있었다. 거기에 김창훈이 만들어준 곡 자체의 매력이 있었다. 첫 행사에 김창훈 같은 뛰어난 음악인의 노래가 제출되고 또 대상까지 받게 된 건 '신의 한 수'였다. 대학가요제와 샌드 페블즈, 그리고 '나 어떡해'는 대회 다음날부터 대중들의 입과 귀에서 계속해서 오르내렸다.

이 놀라운 반응은 이후 일반 대학생들뿐 아니라 각 대학의 캠퍼스 밴드들이 각 가요제에 앞다퉈 참여하게끔 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이듬해 항공대학교 밴드인 활주로로 해변가요제에 참여하며 음악인의 길을 걷게 되는 배철수의 이 증언은 그래서 중요하다.

샌드 페블즈는 의도치 않게 캠퍼스 밴드 출신들의 그룹사운드 전성시대를 열게 하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더 넓게는 각 대학에 있던 재능 있는 청년들을 가요제 무대로 이끌었다.

한번 뒤집어진 청년문화의 또 다른 시작이었던 셈이다. 가요제를 통해 등장한 음악인들의 이름과 노래들을 일일이 거론하진 않겠다. 그들은, 그리고 그 노래들은 그렇게 대중가요계의 공백을 하나둘 메워갔다.

보다 | 김학선 (보다 월간 [보다] 편집장)

It is the cannabis wave and the song of the purification movement.


The biggest and most powerful influence on the popular music scene in the 1970s was not the musicians, but the president of this country and its ridiculous policies.


That ridiculous policy left the pop music industry in the mid-1970s empty. There were only a few musicians left, and the songs released were often overwhelmed by deliberations.


Under these circumstances, the first university song festival in 1977 was an event created for the needs of both the government and the pop music community.


From the government's point of view, it was necessary to turn the public's attention to the healthy image of college students, and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pop music world, new faces were needed to fit into the blanks. The university song festival became a scene of a play that produced young talented musicians in the name of a 'controlled event'.


In September 1977, the first university song festival was held, attracting the public's attention at the Cultural Gymnasium in Jeong-dong.


The main character of the day was Sand Pebbles.


Sand Pebbles was formed in 1970 and was a campus band of Seoul National University's Nongdae which produced musicians such as Lee Soo-man (2nd) and Kim Chang-hoon (5th) of Sanwoolim. Kim Chang-Hoon played an important role here: Lee Do-Hyun, who invited his junior 6th Sand Pebbles to participate in the college song festival, and Kim Do-Hoon, who created the Grand Prize Winner, 'What Do I Do'. But I fell behind because of Kim Chang Wan's status as a graduate, or because of the judges who didn't understand 'Open the door'.


The event itself was a college song, but Sand Pebbles' grand prize was an event. The most important thing was to first inform the public about the existence of a campus band, one for each university. Until now, the group's sound, known to the masses, was a professional group centered around night businesses.


As a result, the campus bands were immature and extremely amateur, incomparably comparable to the proficient performance of group sound that the public knew. The inferiority of the performance that the best star band Falcon Hawk had produced throughout the musical life proves this well.


The campus band Sand Sands, however, had the freshness and innocence of amateurism and the health of college students. There was a charm of the song itself made by Kim Chang-hoon. At the first event, songs of outstanding musicians such as Kim Chang-hoon were submitted and the grand prize was 'one of the gods'. The College Song Festival, Sand Pebbles, and 'What Do I Do' continued to rise and fall from the mouth and ears of the public from the day after the competition.


This incredible response has since resulted in campus bands from colleges as well as college students getting involved in each song. The testimony of Bae Chul-soo, who walks the path of musicians at the beach runway on the runway, the aviation university band, is important this year.


Sand Pebbles unintentionally served as the driving force behind group bands of campus bands. More broadly, talented young people from each university were brought to the music festival.


It was another beginning of youth culture that was once upside down. I will not discuss the names and songs of musicians who appeared through the song festival. They, and the songs, so filled the void of the pop song.


Than | Kim Hak-sun


태어나게 된 계기

Sand Pebbles가 만들어지게 된 계기를 나의 기억으로 되살려 보면, 1970년 가을 장세권과 함께 기타를 치며 노래를 연습하던 때로 거슬러 간다. 당시 우리는 서울대학교 신입생들로서 교양과정부의 같은 반에 속해 있었는데, 세권은 취미로 통기타를 연습하고 있었다. 그 당시 국내 가요계에는 아직 통기타 붐이 일기 이전으로 송창식씨와 윤형주씨의 Twin Folio가 활동하고 있을때였다. 내가 노래를 좋아한다는 것을 들은 세권이 제안하여 우리는 매일 세권의 하숙방에서 함께 기타연습과 함께 노래를 연습하곤 했다. 우리의 계획은 장차 수원에 있는 서울대학교 농과 대학으로 가게되면 그곳에서 통기타 듀엣으로 활동 하는 것이었다.

해가 바뀌고 새 학기가 되어 수원으로 가게 되었다. 농대 학생회에서는 서울에서 온 후배들을 환영하는 행사를 배풀었다. 행사중 인기를 끈 것이 장기자랑이었는데 이를 위해 세권과 나는 기숙사에서 Simon 과 Garfunkel의노래로 많이 알려진 "Bye Bye Love"를 열심히 연습하였다. 그러던 중 우리의 노래소리를 들은 윤장배가 우리 방으로 찾아와 자연스럽게 합류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장기자랑에서 최우수상을 받았고, 장배는 이러한 성과를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절호의 기회로 생각했다. 장배는 이미 group sound를 한 경험을 가지고 있어 대학생활중 그룹사운드를 조직하여 연주활동을 하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함께 그룹사운드를 조직하자는 장배의 제안에 시끄러운 소리, 퇴폐적인 행색등 group sound에 부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던 세권과 나는 한마디로 거절 하였다. 그러나 매일 우리방으로 찾아와 설득 하는 장배의 열의와 한편으로 새로운 음악에 대한 호기심에 의해 우리는 장배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 그것이 옳은 결정이었는지 아직도 자신있게 말 할 수는 없다. 다만 그 결정의 결과로 나를 비롯한 여러 Sand Pebbles를 거쳐간 회원들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했으나 한편 우리는 Sand Pebbles를 통하여 형제와도 같은 동기들과 선후배간의 강한 유대감을 경험 하였고, 제1회 MBC대학가요제 대상 수상등 그 동안의 업적과 함께 국내 어느 대학에서도 볼 수 없는 20년을 꾸준히 이어온 전통의 대학 group sound를 가지게 된것이다.

인원구성 새로운 group sound의 결성을 결정한 우리는 교내에서 게시판의 공고나 수소문을 통하여 함께할 사람을 구하였다. 먼저 고등학교 시절부터 리드기타를 연주한 김동만이 합류하였고 이어 drum을 연주하는 이남묵과 서울고등학교 취주악대장을 지낸바 있는 saxophone을 연주 하는 정학상이 들어오게 되었다. 따라서 세권이 리듬기타를 , 장배가 베이스를 맡고 특정한 악기를 다루지 못하는 나는 노래를 하게 되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수원에 떨어져 있고 학생수도 많지 않은 농과 대학에서 악기를 다를 줄 알고 group sound활동을 원하는 사람을 발견하기가 쉬운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짧은 시일 안에 기타와 드럼등 각 부분을 맡을 능력있는 회원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신의 도우심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만들어진 과정 연습할 장소가 따로 없어 저녁마다 우리는 내 기숙사 방에 모여 함께 연습하였다. 비록 일렉기타가 아닌 통기타이고, 드럼도 아직없어 책상 바닥을 두드리며 연습하였지만, 연습시간은 항상 완벽한 음악을 만들어내기 위한 열의에 차있었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밤 늦게 까지 이어지곤 하였다. 한달쯤 뒤 우리는 대학측과 교내 연극반의 배려에 의해 농과대학 강당을 연습장소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밤 늦게 까지 시끄러운 우리들의 연습을 같은 강당을 사용하던 연극반원들, 주위연구실의 교수님이나 학생들, 직원들이 용납해주어 우리는 마음껏 연습에 열중 할 수 있었다. group의 이름은 사흘간의 열띤 경합 끝에 남묵이 내어 놓은 "Sand Pebbles"가 만장 일치로 결정되었다. 이 이름은 발음이 명확 하였을 뿐 아니라 전원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 농과 대학group sound의 이름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하였다. 또 한 이 이름은 스티브 맥퀸과 캔디스 버겐의 "산 파블로"의 영어 이름으로, 그 영화가 가진 낭만적인 분위기를 이름으로 가지고 있어 모두가 찬성하였다. 한편 우리는 악기 구입을 위해 노력하였다. 각자의 악기는 자신이 구입할 것을 원칙으로 하였는데, amplifier등 비싼 부품을 사기 위해 회원각자가 일부 부담하고 또한 경복, 중앙, 경동, 서울고등학교 동문회등과 대학 학생회로 부터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남묵이 가장 먼저 드럼을 사온날 , 우리는 꿈이 이루어지는것을 보고 모두 한마음으로 기뻐하였다.

활동 group이 모아진 후 얼마되지 않아서 우리는 여러 교내 행사와 교외 행사에서공연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대학생 group sound라는 것을 전혀 접할 수 없었던 농과대학과 수원에서 Sand Pebbles가 일으킨 반응은 대단하였다 . 연주장소로 주로 농과대학 강당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객석 1,200의 강당은 연주회때마다 교내외의 관객으로 만원을 이루었고 일부 공연에선 자리가 모자라 공연을 보지 못하고 돌아간 경우도 있었다. 교내 학우들 사이에도 인기가 있어 공연이 아닌 저녁 연습시간에 우리의 연습장소인 강당에 관객(?)들이 여러명 앉아 우리의 연습을 지켜보곤 하였다. 기억에 남는 공연은 수원 적십자사와 함께한 자선공연, 전국 농업고등학교 경진대회 참가자들을 위한 위문공연등이 있다 . 각종 농과대학내 행사와 함께 우리는 서울대학교 전체 행사 및 교외 행사에도 많이 참가하였다 . 서울대학교에는 그 당시 문리대에 Extas, 공대에 Echos등 이미 많이 알려진 group sound들이 있었으나, 활동이 활발치 못하여 태어난 후 돌도 아직 지나지 않은 우리가 서울대 전체 학생회의 행사에 참가하곤 하였다. 이것은 또한 우리 Sand Pebbles가 그만큼 활발하게 연주활동을 한 때문이기도 하였다. 기억에 남는공연은 여름 서울대 ROTC 병영훈련을 위한 위문공연, 겨울 25사단에서의 장병 위문공연, 서울대학교 전체 여학생회 축제에서의 공연들이 있다. 기억에 남는 추억들로는, 우리의 첫번째 debut공연이 있던날 낮에 마침 농대에서 대규모 학생시위가 일어나 공연이 이루어질까 걱정을 한 장배가 우리 Sand Pebbles회원들이 나서서 시위를 막아보자고 해 모두가 실소한 일, 돈이 없어 값싼 중고악기를 산 탓에 연습도중은 물론 공연 중에도 악기가 고장이 나 애를 태우던 일들이 기억난다. 초기의 어떤 공연에서는 리드기타의 줄이 끊어져 급히 수원시내로 나가 줄을 사오느라 공연을 20여분간 중단한 사건도 있었다. 회원중 세권이 전기, 전자제품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 공연중의 악기고장은 물론, 평소 연습시의 고장과 악기에 필요한 부품을 구입하는 데 말로 다 할수 없는 큰 도움을 주었다.

초기 Sand Pebbles의 특성 지나놓고 보니 Sand Pebbles가 태어난 첫해부터 짧은 기간내에 제 모습을 갖추고 국내 어느 대학의 group sound에 못지 않은 기량을 가지고 활동을 한데는 몇가지 중요한 원인이 있었던 것 같다. 물론 그 원인에 의해 지난 20년간 꾸준히 전통을 이어올 수 있었고 Sand Pebbles가 국내 대학생 가요문화에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첫째의 원인으로는 우리가 가질수 있었던 충분한 연습시간이다. 농과대학은 수원에 있음으로 해서 대부분 회원들이 집을 떠나 대학내의 기숙사나 학교주변에 하숙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저녁시간을 가족이나 다른 친구들과 보내는 대신 온전히 연습에 몰두할 수 있었다. 둘째로 같은 원인에 의해 우리는 동기와 선후배간에 가족과도 같은 짙은 유대감을 가질 수 있었다 . 짐작이 가겠지만 group sound란 함께 연습과 연주를 하는 동안 회원 서로간에 많은 불만을 낳게 한다. 상대방의 연습태도, group의 음악의 방향, 경제적인 문제, 때론 오랜 연습으로 피곤해 진 몸에 감정이 날카로워져 사소한 문제에도 대립이 되곤 하는데, 우리의 경우 함께지내는 시간이 많음으로해서 무난히 극복할 수 있었던 것같다! . 그 밖에 우리는 나름대로 몇가지의 원칙을 세우고 그것을 따르려고 노력하였다. 첫째, 우리는 Sand Pebbles가 대학 group sound로서의 순수함을 지켜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지나치게 기성음악이나 가수의 흉내를 내는 것을 지양하고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대학생의 음악을 연주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시도가 대학가요제나 김창완, 김창훈 형제들의 산울림의 음악으로 이어졌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 둘째 같은 이유에서 우리는 2 학년 1년간만을 Sand Pebbles로서의 활동을 하고 모든 것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기로 결정하였다.따라서 우리가 구입한 악기는 아깝긴해도 후배들에게 모두 무상으로 주기로 하였다. 후배들은 사정이 닿는대로 노후한 악기를 보다 성능이 좋은 악기로 교환하였다. 또한 선배중 한사람은 후배들의 살림살이를 맡고 또 후배들의 연습 및 공연에 선배들이 적극참여함으로 해서 Sand Pebbles의 음악에 대해 선배들이 관여하도록 하였다. 셋째 이러한 Sand Pebbles의 특성때문에 우리는 후배회원의 선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후배회원의 요건으로 연주 능력이나 음악적 감수성들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보다도 우리는 연습을 꾸준히 참가할 수 있는 성실성과 동기나 선후배와 잘 어울릴 수 있는 인간성을 더 중요시 하였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선배의 후배에 대한 일방적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선후배 상호간 많은 토론과 이해함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자부한다. 지나온 20년을 회고할때, 농과대학에서 무슨 퇴폐음악이냐고 천덕꾸러기로 구박을 받던 우리 Sand Pebbles가 이제 서울농대하면 사람들에게 Sand Pebbles를 생각하게 할 만큼 성장한것은, 우리가 우수한 연주자를 가지고 있었다거나 좋은 뒷받침이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실은 Sand Pebbles를 거쳐간 수많은 회원들과, 이들을 도와준 많은 이름없는 학우들의 수고, 그리고 학교당국의 끊임없는 도움의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Sand Pebbles를 사랑해준 모든이와 함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스무번째 생일을 축하하고 싶은 것이다.

-1대 주대명 선배님께서 89년에 써 주신글


" When I remembered how Sand Pebbles was created, I went back to the 1970s when I was playing guitar and singing along with Jang Se-kwon. At the time, we were freshmen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and belonged to the same class as the liberal arts department. Three books were practicing guitar as a hobby. At the time, Song Chang-sik and Yoon Hyung-ju's Twin Folio were active in the Korean music industry before the boom guitar boom. Three books told me that I love singing, so we used to practice singing together with guitar practice in three boarding rooms every day. Our plan was to go to Seoul National University College of Agriculture in Suwon and act as a guitar duet there.


The year changed and the new semester went to Suwon. The Agricultural Student Council welcomed the juniors from Seoul. It was a long-term show that became popular during the event. To this end, three books and I practiced "Bye Bye Love," a popular song by Simon and Garfunkel in the dorms. Meanwhile, Jang Jang-bae, who heard our song, came to our room and joined naturally. As a result, we received the first prize in the long-term pride, and Jang-bae regarded this achievement as a golden opportunity to achieve his will. Jang-bae already had a group sound experience and had a meaning of organizing group sound in college. In the words of Jang-bae's suggestion to organize group sound together, three books and I who had a negative impression on the group sound such as loud noise and decadent behavior were rejected. However, due to Jangbae's enthusiasm for coming to our room and persuasion for new music, we accepted Jangbae's proposal. I can't still say with confidence whether it was the right decision. However, as a result of the decision, the members who went through various sand pebbles, including me, had to spend a lot of time and effort. Meanwhile, through the sand pebbles, we experienced a strong bond between brothers' motives and seniors and juniors. Along with the achievements such as the Grand Prize, we have a traditional group sound that has been consistently seen for over 20 years.


After deciding to form a new group sound, we sought out people to join in the school through bulletin board announcements and hydrogen doors. First, Kim Dong-man, who played the lead guitar since high school, joined Lee Nam-mook, who plays drums, and a saxophone player who played the saxophone, which was a brass band chief of Seoul High School. So I sang a rhythm guitar, and Jang-bae played the bass and couldn't handle a particular instrument. Even now, it is not easy to find a person who wants a group sound activity by knowing how to play a musical instrument at an agricultural college that is not in Suwon and has few students. Therefore, it is God's help that we were able to find a member who could play the guitar and drums in a short time.


There was no place to practice and every evening we gathered in my dorm room to practice together. Although I practiced on the floor of my desk because it was a guitar, not an electric guitar, and I had no drums yet, the practice was always enthusiasm for making perfect music, and I was late at night. About a month later, we were able to use the College of Agriculture auditorium as a training place, with the consideration of the university and on-campus theater. Our noisy practice until late at night was accepted by the theater class members who used the same auditorium, professors, students and staff in the lab. The group was named "Sand Pebbles" unanimously after three days of intense competition. This name was not only pronounced clearly, but also has a rural atmosphere, so I thought it was a good name for group sound. The name is also the English name of Steve McQueen and Candice Bergen's "San Pablo", and it is all in favor of the romantic atmosphere of the film. Meanwhile, we tried to buy a musical instrument. In principle, each musical instrument should be purchased by its own members. In order to buy expensive parts such as amplifiers, each member bears some expenses and received support from Gyeongbok, Joongang, Kyungdong, Seoul High School Alumni Association, and the university student body. The day that Namuk first bought the drums, we all rejoiced to see the dream come true.


Shortly after the group was gathered, we began to perform at several school and school events. In particular, Sand Pebbles's reactions were enormous in agricultural colleges and Suwon, where university students had no access to group sounds. Most of the auditoriums were used for the performance of the College of Agriculture. The auditorium with 1,200 seats was crowded with audiences both inside and outside the school every time the concert was performed. It was so popular among schoolmates that the audience (?) Sat in the auditorium, our practice venue, and watched our practice during the evening practice session. Memorable performances include charity performances with the Suwon Red Cross and consolation performances for participants of the National Agricultural High School Competition. Along with the various agricultural college events, we also participated in many events of Seoul National University and other suburbs. There were many well-known group sounds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such as Extas at Munhwa University and Echos at Technological University, but we weren't active yet. This was also because our Sand Pebbles were so active. The most memorable performances include the consolation performance for the ROTC barracks training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the consolation performance at the 25th Division in winter, and the performances at the Seoul Women's Association Festival. The most memorable ones are the day when our first debut performance was held during the day, when a large student demonstration in the farmhouse was worried that our performance would be held. Because I bought cheap second-hand instruments because I didn't have enough money, I remember how the instrument broke down and burned out during performances and performances. In some early performances, the strings of the lead guitar were broken, and there was a case where the performance was stopped for about 20 minutes as soon as they went out to Suwon. Three of the members had extensive knowledge of electrical and electronic products, which helped them not only to trouble with the musical instruments during the performance, but also to break down the usual practice and to purchase parts for the musical instruments.


Characteristics of Early Sand Pebbles


In the past, there seemed to be several important reasons for my appearance in the short period of time from the first year of Sand Pebbles, and working with the skills of a group sound of a university in Korea. Of course, it was possible to continue the tradition over the past two decades, and Sand Pebbles could directly and indirectly affect the Korean college students' music culture. The first reason is enough time to practice. Since the College of Agriculture is located in Suwon, most of the members have left their homes and stayed in the dormitories or around the school. So instead of spending the evening with family and other friends, we could concentrate on the practice. Second, because of the same cause, we could have a strong bond like family between motives and seniors. As you might guess, group sound causes a lot of dissatisfaction between members while practicing and playing together. The attitude of the other party, the direction of the music of the group, the economic problems, and sometimes the feelings of the tired body get tired from the long-term practice, and the minor problems are often confronted with each other. I think there was! . In addition, we have established some principles and have tried to follow them. First, we thought that Sand Pebbles should keep its purity as a college group sound. Therefore, we tried to avoid playing too much off-the-shelf music or singer mimicry and playing the music of college students that we can express. We believe that this attempt led to the music of the forest songs of the University Song Festival, Kim Chang Wan, and Kim Chang Hoon. Secondly, for the same reason, we decided to work as a Sand Pebbles for the first year of the second year and leave everything to our juniors, so we decided to give our juniors free of charge. The juniors exchanged older instruments for better performance as soon as they could. In addition, one of the seniors was responsible for the housekeeping of the juniors and the seniors were actively involved in the practice and performance of the juniors to involve them in the music of Sand Pebbles. Third, because of the peculiarities of Sand Pebbles, we put a lot of effort into selecting junior members. The requirements of the junior members did not keep in mind the ability to play or the musical sensibilities, but more importantly, we placed more importance on the integrity and motivation to continually participate in the practice, and on the humanity of the junior. Of course, this process is not done by unilateral coercion of seniors, but by many discussions and understandings. Looking back over the past 20 years, our Sand Pebbles, which was detained at the College of Agriculture for what kind of decadent music, now grew up to make people think of Sand Pebbles when they were in Seoul, we had good performers It is not because there is support. This is in fact the result of the numerous members who have gone through Sand Pebbles, the hard work of many unnamed students who helped them, and the constant help of the school authorities. So go with everyone who loved Sand Pebb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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