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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혜숙 / Bok, Hae-Ok

유성기로 듣던 불멸의 명가수 : 막간 가수들 "Interlude singers" (vol 21) 복혜숙 / Bok, Hae-Ok:

1 종로행진곡(鐘路行進曲) (Jogno March)

2 그대 그립다 / You Miss You (COLUMBIA 40071) (1930)

11 애(愛)의 광(光) Light of love

12 목장(牧場)의 노래 / Song of the ranch” (COLUMBIA) (1930)

The first record reveals already a rather bad intonation of singing on these two songs, not the best example of Japanese-like songs with accompaniment on this first Columbia single, and it only gets slightly better on the second. I am afraid I need to say that this is rather to avoid, except when you like that charm of what is going slightly wrong. The jazz-like last track however has something grotesque that I still would love to pick out. In combination with the B-side it shows what music was building up at that time very well.

Bok Hae Ok was in fact the very first Korean jazz singer. She was mainly an actor. The clumsy singing therefore did not disturb the people.

Knowing also the music that was made in Tokyo in the 30s, and how singers were regarded (as lowlife), I understand that the earliest singers in Korea were no different yet from circumstances, there has been actors or theatre people who sang as well. It might have been great entertainment, but the singing itself more fed the prejudice of a lowlife expression than was able to lift itself to a vocal art expression. The actors involved often were not the best singers. Never the less the totality of expression, with the brass gang accompaniment is all there very present to the senses.



Wikipedia 본명은 복마리(卜馬利)이며, 충청남도 보령군에서 태어났다. 감리교 목회자의 딸로서 남달리 개화한 신여성이었던 복혜숙은 1919년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수예를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1] 그러나 일본에 머무는 동안 영화와 연극을 본격적으로 접하고 배우의 꿈을 꾸게 되었다.

귀국하여 한때 아버지가 세운 강원도의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으나, 배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단성사에서 허드렛일부터 시작했다. 결국 극단 신극좌의 《오! 천명》을 통해 신파극 배우가 되어 연기자로 데뷔했다. 한국 최초의 여자 배우로 꼽히는 이월화와 거의 같은 시기에 배우가 되었다. 당시는 여자 역할을 남자 배우가 연기하던 시절이라 여자 배우라는 길 자체를 새로 개척한 셈이었다.[2]

한국 최초의 연기자 교육기관인 조선배우학교에 입학하여 연기를 배운 뒤, 토월회를 거쳐 여러 극단에서 활동했다. 이때 출연한 토월회의 작품은 《장화홍련전》, 《춘향전》, 《카추샤》, 《인형의 집》 등이 있었는데, 특히 《카츄샤》에서의 연기가 호평을 받으며 훗날 "조선의 카츄샤"로 불리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의 평에 따르면 복혜숙은 잘 울고 잘 웃으면서 풍부한 감정 표현으로 카츄샤 역을 훌륭히 소화한 것으로 되어 있다.

1926년에는 조선키네마의 창립 작품인 《농중조》에 주연을 맡아 영화 배우로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 영화는 자유연애를 다루어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복혜숙은 양반집 처녀 역을 맡아 다리를 노출하고 감독이자 남자 주인공인 이규설과 손목을 잡는 장면도 연기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한국 영화 최초의 "신여성"으로서 전국적으로 인지도를 높이게 된 복혜숙은 이후 의사인 김성진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영화배우로서는 위기가 찾아왔다. 여성 연기자라는 존재 자체가 드문 상태에서 연기력을 갖추었기에 1920년대 후반까지 활발한 활동을 펼칠 수 있었으나, 김정숙과 신일선처럼 외모가 더 뛰어난 배우들이 등장하면서 좋은 역할을 맡을 수 없었다. 1931년의 한 기사는 얼굴 윤곽이 선명하지 못하고 눈도 가늘어 영화배우로서의 장점이 없는 외모라고 혹평한 바 있다. 복혜숙은 비너스다방을 운영해 생계를 유지하면서 라디오 방송국에서 성우로 활동했다.

1930년대 들어 영화계에 복귀해 박기채의 《춘풍》(1935), 최인규의 《수업료》(1940) 등에 출연했다. 이때부터는 중년 여인이나 노역을 맡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감격의 일기(일본어: 感激の日記)》(1945)와 같은 다수의 어용 영화에 출연한 행적이 있다. 이 때문에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

태평양 전쟁 종전 이후 처음 나온 한국 영화인 《자유만세》(1946)를 시작으로 많은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에 출연했다. 37세에 찍은 《수업료》에서 할머니 역할로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이후 주로 노역을 맡아 연기했다. 대한영화배우협회를 창설해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으며, 인기와 연기력을 두루 갖춘 배우로서 연기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마지막 작품은 유작이 된 이장호의 《낮은데로 임하소서》(1982)이다.



Her real name is Bokmari (卜馬利) and she was born in Boryeong-gun, Chungcheongnam-do. Bok Hye-sook, a daughter of Methodist pastors who had been enlightened newly, graduated from Ewha Womans High School in 1919 and went to Japan to study handicraft. [1] However, during my stay in Japan, I became acquainted with movies and plays and dreamed of becoming an actor.

After returning to Korea, he worked as a teacher at a school in Gangwon-do, where he was founded by his father, but he did not give up the remorse for the actor. After all, "Oh!" She made her debut as an actress in a thousand dramas. At about the same time as Lee Wol-hwa, one of the first female actors in Korea, she became an actress. At that time, female actors were playing the role of the actors, so it was a new way to pioneer women. [2]

After attending Chosun Actress School, Korea's first actor education institution, he learned acting, and then worked at various theater companies through Towol society. The works of Towol society appeared at the time were "Janghua Hongryun Exhibition", "Chunhyangjeon", "Kachusha", and "House of Dolls". It became. According to the comments of the time, Bok Hye Sook was able to play the Kachusha Station with abundant expressions of expression while crying well and laughing well.

In 1926, he starred in Chosun Kinema's founding work, “Dongjoongjo,” and began his full-fledged activity as a movie star. This film dealt with free love and was an exceptional work at the time. Bok Hye-sook acted as a girl in a half-family house, exposing her legs and acting as a director and male hero, Lee Kyu-seol, as well as holding a wrist. Bok Hye-sook, who became the nation's first "new woman" and raised national awareness, later married Kim Sung-jin, a doctor.

But as a movie star a crisis came. She was able to perform active activities until the late 1920's because she was a rare actor. An article in 1931 criticized his face as lacking in sharp outlines and narrow eyes, which seemed to have no merit as a movie star. Bok Hye-sook ran a Venus coffee shop and made a living as a voice actor on a radio station.

In the 1930s, he returned to the film industry and appeared in Park Ki-chae's Chun-pung (1935) and Choi In-gyu's Tuition (1940). From this point on, she became a middle-aged woman or a laborer. In the late Japanese colonial period, there were many appearances in many movies, such as The Diary of Emotion (Japanese: 感激 の 日記) (1945). For this reason, they were included in the drama / movie section of the prospective list of pro-Japanese personal dictionaries published in 2008.

He appeared in many film and television dramas, beginning with the Korean film Freedom Live (1946), which first appeared after the end of the Pacific War. In the 37-year-old `` Tuition '', I made a strong impression as a grandmother and acted mainly as a laborer. He founded the Korean Film Actor Association and served as the first chairman, and received acclaim for his unwavering passion for acting as an actor with great popularity and performance. The final work is Lee Jang-ho's `` Let's go low '' (1982).


최초의 재즈가수였던 배우, 복혜숙[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 승인 2018.02.22 10:19

[논객닷컴=이동순] 한국의 대중문화사 초창기에 활동했던 분들은 대개 연극, 영화, 음악, 무용 등 적어도 두 세 개 이상의 장르에 참가했던 경력들이 보입니다. 그 까닭은 당시 대중예술에 참가했던 인원이 적었던 탓도 있겠지만 장르 간 분할과 독립이 확고하게 갖추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저기 일손이 필요해서 부르면 즉시 달려가야 했을 것입니다. 연극배우가 영화에 자연스럽게 출연했었고, 또 배우 출신 가수로서 음반제작에 동원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김서정, 강홍식, 전옥, 신카나리아, 최승희, 강석연, 김선초, 이경설, 이애리수, 왕평 등이 바로 그러한 표본적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전문분야가 뚜렷하게 있었지만 가수로서 음반을 발매하기도 했고, 또 영화와 만담, 스켓취, 넌센스 등에 출연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우리가 오늘 가요이야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복혜숙(卜惠淑, 1904∼1982)에 관한 내용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누가 뭐래도 그녀의 활동영역은 영화배우가 중심이었지요. 그녀는 개척기 한국근대영화사에서 빛나는 공적을 쌓았던 대중문화계의 선구자였습니다.

복혜숙이 배우가 된 과정은 가히 운명적이라 할 만합니다. 1904년 충남 보령에서 기독교 전도사를 하던 복기업(卜箕業)의 딸로 출생한 복혜숙은 어머니가 전도사업 때문에 오해를 받고 체포되어 옥중에서 고생을 할 때 어머니의 뱃속에서 함께 고생을 겪던 끝에 미숙아(未熟兒)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름도 성서에 등장하는 마리아의 이름을 따서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 복마리(卜馬利)였습니다. 나중에 목사가 되었던 아버지는 논산으로 이사를 했고, 병약하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복혜숙은 계모가 차지하게 된 가정이 점점 싫어졌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 그녀는 혼자 서울로 올라가서 이화학당을 다녔는데 재학 중에는 학교공부보다도 뜨개질을 비롯한 수예가 더욱 좋아서 수예학원을 다녔습니다. 그 학원에서 주선을 해준 일본의 요코하마수예학원으로 유학길을 떠나게 되었지요. 이것이 복혜숙의 첫 번째 탈출입니다.

일본에서 복혜숙은 새로 익힌 수예작품을 팔아 그 용돈으로 줄곧 영화관을 찾아서 구경 다녔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연극공연에서부터 뮤지컬공연에 이르기까지 각종 공연이란 공연은 모조리 찾아다니며 관람했는데 이것이 복혜숙으로 하여금 배우의 길을 선택하도록 이끌었던 가장 커다란 힘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한번은 무용공연을 보고 너무 심취한 나머지 무용연구소에서 열심히 수련하고 있던 중 고국에서 딸을 찾아온 아버지가 그 광경을 보고 격노해서 곧장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이후 부친은 강원도 김화교회의 목사가 되어서 임지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딸 혜숙은 아버지 교회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며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강원도 산골에서의 단조롭고 무료한 생활이 너무도 싫었던 복혜숙은 어느 날 아버지 몰래 짐을 챙겨 서울로 무작정 올라오게 됩니다. 이것이 복혜숙의 두 번째 탈출입니다.

서울에서는 당시 대표적인 극장이었던 단성사를 찾아가서 인기변사 김덕경을 만나 배우가 되고 싶었던 자신의 마음 속 포부를 밝혔습니다. 김덕경은 복혜숙을 신극좌(新劇座)의 김도산(金陶山, 1891∼1921)에게 연결시켜 주었고, 거기서 그녀는 여러 편의 신파극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생활이 점점 곤궁해진 복혜숙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 조용히 지내겠다는 뜻을 밝히고 살아갔지만 가슴속 저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무대 활동의 충동을 억제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리하여 또 새로운 목적지를 찾은 곳이 중국의 따롄 항입니다. 이것이 복혜숙의 세 번째 탈출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연락해둔 아버지의 신고로 말미암아 현지경찰에게 붙들려 조선으로 즉시 압송되고 말았습니다.

1921년 복혜숙은 현철(玄哲, 1891∼1965)이 조선배우학교를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찾아가 입학했습니다. 이것이 복혜숙의 네 번째 탈출입니다. 이 무렵 아버지는 배우가 되고 싶은 딸의 끓어오르는 열정을 더 이상 가로막을 방도가 없었습니다. 당시 조선배우학교의 동기생들이 노래 ‘황성옛터’의 작사자이자 배우였던 왕평과 함경북도 청진 출생의 배우 이경설 등입니다. 한번은 극작가 이서구가 찾아와서 토월회의 여배우 자리가 갑자기 비게 되었는데 보충할만한 배우 하나를 급히 찾는다고 말했습니다. 복혜숙은 바로 여기에 지원했고, 토월회의 배우로 열심히 무대 활동을 하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연극배우로서의 복혜숙의 삶과 그 경과입니다.

1926년은 복혜숙이 영화인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기념비적인 해입니다. 감독 이규설(李圭卨)이 제작하고 단성사(團成社)에서 개봉한 영화 ‘농중조(籠中鳥)’에 복혜숙은 배우로서 첫 출연을 했습니다. 이 ‘농중조’는 일본말로 ‘가고노도리(かごのとり)’, 즉 ‘새장 속에 갇힌 새’라는 뜻입니다. 이 영화의 제작자는 충무로에서 모자장수를 하던 ‘요도(よど)’라는 일본인이었습니다. 1927년에는 이구영(李龜永, 1901∼1973) 감독의 ‘낙화유수’, 1928년에는 ‘세 동무’, ‘지나가(支那街)의 비밀’ 등의 작품에 연이어 출연함으로써 영화배우로서의 입지를 단단하게 다졌습니다.

복혜숙의 생애를 돌이켜보노라면 만약 그녀가 완고한 아버지의 반대를 받아들여서 고분고분 순종적 삶으로 평범한 현모양처나 학교교사로서만 살아갔다면 결코 이후에 펼쳐간 배우로서의 삶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집을 나간 딸이 여러 차례 이상 아버지의 강압적인 뜻에 의해 끌려 돌아오게 되지만 복혜숙은 기어이 자신의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 부친의 뜻에 거역하고 과감한 일탈을 감행합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는 선각자 복혜숙의 위대했던 판단과 결연한 선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화배우 복혜숙이 첫 음반을 낸 것은 1929년입니다. 하지만 이 음반은 가요가 아니라 영화극이란 장르를 달고 있는 ‘장한몽(長恨夢)’(1∼4)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신파적(新派的) 성격의 영화대본을 대중적 명성이 높은 배우로 하여금 직접 연기로 녹음하도록 해서 음반을 대중들에게 보급하려는 의도를 가진 전달체계였었지요. 이 음반에 이어서 ‘쌍옥루’(1∼4)를 취입했고, ‘부활’, ‘낙화유수’(상하), ‘숙영낭자전’(1∼4) 등을 발표했습니다. 영화극 음반으로는 이후에도 ‘불여귀’, ‘심청전’(상하)과 ‘하느님 잃은 동리’, 그리고 ‘춘희’(1∼4) 등을 줄기차게 내놓았습니다.

배우로서의 대중적 명성이 제법 알려지기 시작하던 1930년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는 복혜숙의 가요음반 ‘그대 그립다’와 ‘종로행진곡’을 발매했습니다. 이어서 ‘목장의 노래’, ‘애(愛)의 광(光)’ 등을 발표하게 됩니다.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이 음반들을 발매할 때 ‘시대요구의 째즈’란 이채로운 문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실 ‘째즈’란 표현을 쓰고 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식 정통재즈라기보다는 그저 새로운 특성의 가요를 뜻하는 의미로 해석이 됩니다. 복혜숙 노래의 반주를 맡았던 악단도 ‘콜럼비아째즈밴드’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음반의 종류 가운데 ‘째즈쏭’이란 꼬리표가 붙은 것이 이채롭습니다. 다시 말해서 복혜숙은 한국의 대중음악사에서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재즈가수였던 셈이지요.

새벽녘이 되어 오면 이내 번민 끝이 없네 산란해진 마음 속에 비취는 것 뉘 그림자 그대 그립다 입술은 타는구나 눈물은 흘러서 오늘밤도 새어가네

노래 소리 지나가고 발자취 들리지만 어디에서 찾아볼까 마음 속의 그림자를 그대 그립다 이 내 생각 산란하야 괴로운 며칠 밤을 누굴 위해 참으리 -재즈 ‘그대 그립다’ 전문

이 노래를 음반으로 들어보면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이 나는 곡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이냐고요? 그것은 바로 일본가수 후랑크 나가이가 불렀던 ‘기미고이시(君恋し)’입니다. 이 노래는 1929년 일본에서 이미 크게 히트했던 노래입니다. 이것을 번안해서 복혜숙이 불렀는데, 사실 원래는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윤심덕(尹心悳, 1897∼1926)에게 부탁을 했었지만 거절당하고 이어서 복혜숙에게 취입제의를 해서 성사가 된 것이라고 합니다.

복혜숙이 부른 노래를 들어보면 미숙한 아마추어 가수의 느낌이 물씬 풍겨납니다. 음정도 불안하고 박자도 갈팡질팡 불안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복혜숙이 생존했을 때 가요평론가 황문평에게 증언했던 내용에 의하면 그녀는 이화학당 시절, 합창단에서 알토파트를 맡았다고 하네요. 그런데 가창의 수준은 매우 어설프고 불안정한 느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콜럼비아레코드사는 어찌하여 이런 복혜숙에게 재즈음반 취입을 제의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그녀가 이름난 배우로서 진작 일정한 대중적 명성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레코드회사는 복혜숙이 비록 가창능력은 부족하지만 배우로서의 대중적 명성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거기에 의탁해서 일본레코드자본의 식민지조선 연착륙(軟着陸)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같은 음반의 다른 면에 수록된 ‘종로행진곡’도 앞의 곡과 마찬가지로 일본번안곡입니다.

붉은 등불 파란 등불 사월 파일 밤에 거리거리 흩어진 사랑의 붉은 등 등불 타는 등불 좀이나 좋으냐

마음대로 주정해라 고운 이 만나면 음전한 맵시 보소 선술집 각시 종로 네거리를 어떻다 이르료

안타깝다 우리 님이 거의 오실 이 때 흐늘거려 놀잔다 노래도 부르고 서울 밤 그리운 밤 종로의 네거리 -‘종로행진곡’ 전문

이 노래의 원래제목은 ‘도톤보리 행진곡(道頓堀行進曲)’입니다. 일본 오사카 중심가에 있는 명소 도톤보리와 그 일대를 예찬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 노래는 이후 도쿄의 번화가 아사쿠사를 예찬하는 ‘아사쿠사행진곡’으로 개사되어 불렸는데, 식민지조선에서 음반을 낼 때 ‘종로행진곡’으로 바뀐 것입니다. 악곡의 전개방식도 전형적인 일본음계 미야코부시(都節)였습니다. 가요평론가 황문평도 이 음반에 대해서 1930년대 초기 레코드를 통한 왜색가요(倭色歌謠) 침투의 첫 번째 희생양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음반을 발매한 뒤에 복혜숙은 경성방송국 조선어방송이 본격화되었을 때 방송드라마에 연속으로 출연해서 여주인공 역할을 담당합니다.

복혜숙이 출연한 영화극 ‘쌍옥루’ 신보광고 ©이동순

또 다른 가요음반 ‘목장의 노래’는 전형적 세 박자 왈츠풍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도 틀림없이 일본가요 번안곡으로 추정이 됩니다. 자연친화적이고 건강한 생태환경 묘사가 배경으로 깔려 있습니다.

보리나무 숲 그림 그늘 푸르고 찔레꽃 봉오리에 이슬 맺힐 때에 아가씨의 노니는 사랑을 따라 오늘에도 어느 뉘 찾아오려나

뽀풀나무 숲 그늘 끝없는 저쪽 불그레한 저녁놀 넘어갈 때에 아가씨의 즐기는 바다 푸르니 오늘에도 어느 뉘 찾아오려나 -‘목장의 노래’ 전문

보령 문화의전당 마당에 세워진 복혜숙 동상 ©이동순

복혜숙의 활동과 관련해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1928년 그녀가 서울의 종로 인사동 입구에 ‘비너스(VENUS)’라는 다방을 열어서 8년 동안이나 직접 운영했다는 사실입니다. 드나드는 손님들은 대부분 영화인 중심이었는데, 연극인, 언론인, 문단 인사들까지도 단골로 출입했다고 합니다. 다방운영으로 얻은 수입은 모조리 영화인들을 위한 일에 썼다고 하니 복혜숙의 포부와 과단성은 대단한 바가 있습니다.

복혜숙의 비너스다방을 자주 찾아오던 경성의과대학 출신의 김성진이 복혜숙을 몹시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처자가 있는 몸이었던 지라 두 사람의 사랑은 불륜으로 무려 5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뜨거운 밀회는 기어이 비밀스러운 신접살림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세월이 흘러서 두 사람은 여러 곡절 끝에 정식 부부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1962년 영화계의 원로가 된 복혜숙은 사단법인 한국영화인협회 연기분과 위원장직에 선출되어 10년 동안 한국영화발전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일했습니다. 일평생 300여 편이 훨씬 넘는 영화에 출연했던 한국영화사의 개척자 복혜숙! 그녀가 배우로서 출연했던 마지막 작품은 1973년 ‘서울의 연가’란 제목의 영화입니다. 복혜숙의 나이 고희가 되던 그해에 방송인, 영화인들은 정성을 모아서 조촐한 칠순잔치를 차려주었습니다. 복혜숙은 말년에 자신이 살아온 삶을 회고하면서 후배들이 차려준 이날의 잔치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시절, 복혜숙의 노년기 삶에서 가장 즐겁고 흐뭇한 일은 영친왕비 이방자(李方子) 여사가 기거하던 낙선재(樂善齋)로 가서 칠보장식으로 공예품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두 할머니는 각자 살아온 삶을 흐뭇하게 회고하며 친구처럼 다정하게 지냈습니다. 1982년 배우 복혜숙은 서울에서 78세를 일기로 이승에서의 장엄했던 삶을 마감했습니다.

2013년 12월, 복혜숙의 고향 충남 보령시에는 ‘보령문화의 전당’이 건립 개관되었습니다. 이곳은 보령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온갖 유물들이 보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전당 앞마당에는 이곳 출신 대중예술인 복혜숙 여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보령을 찾는 나그네들은 꼭 복혜숙 여사의 동상을 찾아가서 발을 쓰다듬어 보시기 바랍니다. 장엄하고도 신산했던 삶, 가슴 속에 간직한 내밀한 꿈을 반드시 성취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던 여사의 선구적(先驅的) 발자취를 더듬어 추억해보는 것도 무척 뜻 깊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시인. 문학평론가.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1973),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1989).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등 15권 발간. 분단 이후 최초로 백석 시인의 작품을 정리하여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 1987)을 발간하고 민족문학사에 복원시킴. 평론집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등 각종 저서 53권 발간. 신동엽창작기금,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받음.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계명문화대학교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The actor who was the first jazz singer, Bok Hye-sook

by Lee Dong-soon President of Korean Music Healing Center

In the early days of Korean pop culture history, people who participated in at least two or three genres, such as drama, film, music, and dance, were seen. This may be due to the small number of people who participated in popular art at the time, but the division and independence between genres were not firmly established. Theater actors appeared in movies naturally, and as actors were singers, they were often used to make records.

Such examples are Kim Seo-jung, Kang Hong-sik, Jeon-ok, Shin Canaria, Choi Seung-hee, Kang Seok-yeon, Kim Sun-cho, Lee Kyung-seol, Lee Ari Su, and Wangpyeong. Although she had a clear background in his specialty, she released a record as a singer, and also appeared in movies, talks, sketches and nonsense. The same is true of Bok Hye-sook (卜惠淑, 1904 ~ 1982) that we want to discuss in today's song story. Whoever said that, her field of activity was centered on movie stars. She was a pioneer in the pop culture world that had a brilliant achievement in pioneering Korean modern film history.

The process of becoming an actor is very fateful. Born in 1904 as a daughter of a Bok company leader who was a Christian evangelist in Boryeong, Chungcheong Province, Bok Hye-sook was a premature baby after her mother was misunderstood and arrested and suffered in prison. It is said to have been born there. The name of his father was named after the name of Mary in the Bible. Her father, who later became a pastor, moved to Nonsan, and after his sick mother passed away, Bok Hye-sook disliked her family. Against this backdrop, she went up to Seoul alone to attend the Chemistry Hall. During her studies, she attended a handicraft school because she had better knitting and other handicrafts than school studies. She went to study at Yokohama Handicraft Academy in Japan, which was arranged by the school. This is Bok Hye Sook's first escape.

In Japan, Bok Hye-suk sold new handicrafts and went to the theater all the time with that allowance. Even theatrical performances, from theatrical performances to musical performances, were all visited and watched, which would have been the greatest force that led Bok Hye Sook to choose the path of the actor. One time, I was so drowsy after seeing a dance performance that my father, who was looking for her daughter from her home country, was furious at her and took her home.

Later, my father left the office as a pastor of Kim Hwa Church in Gangwon-do. My daughter, Hye-suk, spent her years teaching Japanese at her father's church. Bok Hye-sook, who was so tired of the monotonous and free life in the mountains of Gangwon-do, came to Seoul one day without his father's luggage. This is Bok Hye Sook's second escape.

In Seoul, he visited Danseongsa, a representative theater at that time, and met his favorite attorney, Kim Deok-gyeong, to express his aspirations. Kim Duk-kyung connected Bok Hye-sook to Kim Do-san (金 91 山, 1891 ~ 1921) in Shingeuk-seon, where she appeared in several Shinpa dramas. However, Buk Hye-sook, who became increasingly in need of life, went back home and lived quietly, but it was difficult to suppress the impulse of the stage activities boiling from the bottom of his heart. Thus, the new destination is Talian Port, China. This is Bok Hye Sook's third escape. But as soon as she arrived in China, she was captured by her father, who had been contacted in advance, and was immediately taken to Chosun by local police.

In 1921, Bok Hye-sook was happy to hear that Hyun-chul (1891-1965) had established a Korean actor school. This is Bok Hye Sook's fourth escape. At this time, my father no longer stopped his daughter's boiling passion to become an actress. At the time, the actors and actresses of Chosun Actor School were Wang Pyeong, who was the writer and actor of the song “Hwangseong Ancient Site,” and Lee Kyung-seol, who was born in Chongjin, North Hamgyong Province. Once a playwright, Lee Seo-gu, came and told me that the position of the actress was suddenly empty. Bok Hae-sook applied for this right here, and she will be working hard as a actor. Up to this point, Bok Hye Sook's life as a theater actor and its progress.

1926 is a monumental year when Bok Hye Sook began her new life as a filmmaker. Bok Hye-suk made her first appearance as an actor in the film “Nong Joong-jo” produced by director Lee Kyu-seol (李 圭 卨) and released at Danseongsa. The word 'nongjojo' in Japanese means 'gago nodori' (ka ご の と り), or 'bird trapped in a cage'. The creator of the film was a Japanese named Yodo (よ ど) who used to be a mother-in-law in Chungmuro. In 1927, she starred in films such as Lee Gu-young (1901-1973), Director of the Falling of the Fall, and in 1928, his three comrades, and the Secret of Jinaga. I'm fine.

Looking back on the life of Bok Hye-sook, if she had accepted her stubborn father's opposition and lived as an obedient and obedient life as an ordinary present wife or school teacher, her life as an actor would never have been possible. Although the daughter who leaves the house is taken back by the coercive will of his father more than once, Bok Hye-sook disobeys his father's will and makes a drastic departure to realize his aspirations. This is where we can see the great judgment and the choices made by the pioneer Bok Hye Sook.

Actress Bok Hye Sook released her first album in 1929. However, this album was not a song, but a movie drama "Jang Han Mong" (長恨 夢)" (1-4). In other words, it was a delivery system with the intention of distributing the record to the masses by directing the actors with the popular fame to record the act directly. Following this album, he introduced the "Ssangokru" (1-4), and published "The Resurrection", "The Fall of the Fall" (up and down), and "The Sleeping Bag Exhibition" (1-4). Afterwards, the film also released 'Fire Devil', 'Shimcheongjeon' (up and down), 'God's Lost Activity', and 'Chun Hee' (1 ~ 4).

In 1930, when Columbia's public reputation became known for its popularity, Bok Hye-sook's music albums `You Miss You'' and ``Jongno March'' were released. Subsequently, we will announce “song of the ranch” and “light of love.” When Columbia releases these albums, it uses the phrase "the jazz of the times". In fact, it uses the expression 'jazz', but it is interpreted to mean a new characteristic of song rather than the American orthodox jazz we know. The orchestra that accompanies the song “Bok Hye Sook” also uses the name “Columbia Jazz Band”. Among these recordings, the one with the label “Jezzu 쏭” is unique. In other words, Bok Hye Sook was the first jazz singer to be found in Korean popular music history.

When it comes to dawn, there is no end

Shining in my scattered heart

I miss you. Your lips are burning.

Tears flow and leak tonight

I can hear the sound of the song passing by

Where do I look? The shadow in my heart

I miss you

I'll be patient for a few nights

(This is) (The) Jazz (of) ‘I miss you’

When you listen to this song, you can see that it is a song that I remember listening to somewhere. What is it? It is called Kimi Goishi (君 恋 し), by Japanese singer Flanck Nagai. This song was a big hit in Japan in 1929. This was called Bok Hye Sook, and in fact, it was originally requested by Yoon Record Deok (1897 ~ 1926) from Columbia Records, but was rejected and subsequently made a sacrament with Buk Hye Sook.

Listening to the song sung by Bok Hye-sook gives the impression of an inexperienced amateur singer. It's so nervous and the beat is uneasy. According to the testimony to the music critic Hwang Moon-pyeong when Bok Hye-sook survived, she was the Alto Part in the Choir. By the way, the level of singing is filled with a very clumsy and unstable feeling. Why did Columbia Record offer such a jazz record to Bok Hye Sook? It was because she had a certain public reputation as a famous actor. The record company had a popular reputation as an actor, although Bok Hye-sook lacked in singing ability, so he would have expected to have a colonial ship landing of Japanese record capital.

“Jongno March” on the other side of the same album is the same as the previous song.

-'Jongno March'

Red lanterns blue lanterns april fill at night

Red lights scattered around the street

Do you like such burning lanterns?

If you meet the better

the dark Nippon Boso Pub

How about Jongno four streets

Unfortunately, when we are almost coming (down)

I'm playing lightly, singing a song

Seoul night, in the nostalgic night street

The original title of this song is ‘Dotonbori March. (道 頓 堀 行進 曲)’. This work celebrates Dotonbori and its surroundings in central Osaka, Japan. The song was later called "Asakusa March," which celebrates Tokyo's downtown Asakusa, and it was changed to "Jongno March" when the album was released in Colonial Chosun. The style of music development was also typical of the Japanese scale Miyakobushi. The music critic Hwang Moon-pyeong describes this record as the first victim of the invasion of dwarf songs through early records in the 1930s. After the release of the album, Bok Hye-sook played the lead role in the TV drama series, when the Korean language broadcasting of Kyungsung was in full swing.


복혜숙(卜惠淑)이 과연 인천과 관련이 있었나?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2007년 09월 30일

▲ 복혜숙 기사

“라디오 청취는 서민들의 거의 유일한 오락거리였다. 대부분 라면 박스 만한 일제였는데 진공관이 발갛게 달아올라야 겨우 소리가 났다. 복혜숙, 양주동, 임택근 같은 사람들은 당시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라디오 스타였다. 미 공보원(USIS)에서 배포했던….”

 인용한 글은 복혜숙(1904~1982)의 이름이 등장하는 ‘6·25 전쟁과 인천사회의 변동’이라는 『인천시사』 권5, 제1장 제2절의 일부분인데 그녀나 인천이나 서로 실질적인 관계가 없는 내용만을 전하고 있다. 그밖에 일제 때 인천 모습을 그린 전 언론인 고일(高逸) 선생의 『인천석금』 기록에서나 향토사가 신태범(愼兌範) 박사의 『개항 후의 인천 풍경』에서나 그녀의 이름이 전하는 구절을 볼 수가 없다.

 인명(人名) 사전류에도 혹 그녀가 교육을 받았던 성장지로서든 아니면 잠시 활동하던 무대로서든 그 어느 방향에서도 인천에 관련한 것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복혜숙이 인천 출신이 아니며, 더불어 인천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으로 단정을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다른 여러 기록에는, 복혜숙은 충청남도 보령 출신으로 1919년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요코하마 기예학교에 들어간 것으로 되어 있다. 그 후 복혜숙은 연극과 영화에 더 관심을 가지면서 도쿄에 있는 사와모리노무용연구소로 적을 옮긴다.

 이곳에서 춤을 배웠으나 목사였던 아버지에게 이끌려 귀국하게 되고 아버지가 강원도 김화에 세운 금성학교의 교원으로 강제 근무하게 된다. 그러다가 다시 가출해 그 당시 신파극을 공연하던 단성사에 들어가면서 이월화(李月華)와 함께 한국 최초의 여성 연극배우로 1920년대 신파극을 공연하기 시작한다.

 1923년에는 극단 <토월회>를 결성하고, 이후 <조선극우회> <중앙무대> <배우극장> 등지에서 연기생활을 한다. 1925년에 연기 수업을 위해 현철(玄哲)이 세운 <조선배우학교>에 들어갔다가 1926년 영화계로 옮기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기록들에서도 인천의 지명은 단 한마디도 언급이 되지 않고 있다. 그런 사정인데도 과거 나이 많은 인천사람들은 그녀와 인천과의 관련을 말하곤 했던 것이다. 무슨 이유였을까. 우선 시대 순으로 가장 먼저 보이는 1930년 12월 1일자 잡지 『별건곤』의 기사 「風聞帖(풍문첩)」 내용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一時(일시) 京城(경성)에서 花形女俳優(화형여배우)로 또는 人氣 妓生(인기 기생)으로 이름이 잇던 卜惠淑(복혜숙)은 一金(일금) 8백 원也(야)를 밧고 仁川(인천) 龍洞券番(용동권번)으로 花籍(화적)을 옴기엿다. 滿仁川(만인천) 浮浪遊志靑年(부랑유지청년)! 주머니 끈만 단단이 매여라.”라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1931년 소설가이면서 영화인이었던 심훈(沈熏)이 잡지 『동광』에 쓴「朝鮮映畵人(조선영화인) 언파레드」라는 글에서도 나타난다.

▲ 1959년 제2회 방송문화상 수상 장면

 “卜惠淑 土月會(토월회) 俳優(배우)로 상당히 노숙한 技藝(기예)를 가지고 무대의 여왕 노릇을 하얏다. 飮酒無量(음주무량)하사대 必及亂(필급난)이요 懸河(현하)의 웅변이 여간 사내는 그의 앞에서 머리를 들지 못하얏다. 時不利兮(시불리혜)하야 糊口之策(호구지책)으로 방금 仁川서 기생 영업을 한다고. 그의 주연한 작품은「籠中鳥(용중조)」 「落花流水(낙화유수)」 「세 동무」… 等(등).”

 “그 후 그는 무엇이 동긔가 되여 몸을 휘날려 仁川 어떤 券番에 籍을 걸고 기생으로 변하고 마럿는가? 그의 『데프류-드』 백작은 누구엿스며 그의 부활제날 밤은 어느 날 밤이엿든지?”

 마지막 인용 글은 1933년 1월 발행 『삼천리』 잡지의 「우리들의 ‘카쥬사’卜惠淑孃」의 일부분이다. 이 글의 뒷부분은 불행한,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어둡고 우울한 복혜숙의 상황을 적고 있지만, 어쨌든 여기서도 그녀가 인천의 한 권번에 적을 두었었던 사실을 말하고는 있다.

 그리고 이 글의 말미가 “昔日(석일)에 무대 여배우로 오직 혼자인처럼 빗나던 卜孃은 지금은 仁川을 뛰여나서 大京城(대경성)의 중심 鐘路(종로)의 『바- 비-너쓰』의 紅燈靑燈(홍등청등)아래서 夜半(야반)의 취객에게 애교를 발산하면서 잇다니 때때로는 그의 붉은 입술에서는 그리운 『컬럼비아』의 『레코-드』에 맞추어 『가츄-사 내사랑』이 흘러나오지나 안는지.”로 맺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에는 다시 서울에 돌아와 <비너스>바를 경영하고 있었음을 비치고 있다.

 결국 복혜숙과 인천과의 관련이라면 그녀가 1920년대 말경 거금 8백 원을 받고 인천으로 내려와 그녀의 말대로 용동권번에 3년간 적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뿐이다. 그러나 그녀가 ‘호구지책’을 위해 기생생활을 하던 인천에서의 3년 동안은 거의 전해지는 바가 없다. 다만 인천 시절에 있었던 재미있는 사실 하나가 「우리들의 ‘카쥬사’卜惠淑孃」에 실려 있기는 하다.

 “사람들은 아지 못할른지도 모르지만은 卜孃은 일즉이 日本(일본)에 건너가서 某(모) 여자기예학교를 마치고 도라온 상당한 『인테리』 여성이다. 뜻이 잇서서 土月會의 무대를 밟기 시작하야서는 天分(천분)을 발휘하야 일약 『가츄-샤』 『春香(춘향)』의 大役(대역)을 마터 가지고 그 一頻一笑(일빈일소)가 능이 長安(장안)의 청춘남녀를 울리고 웃겻다.

▲ 복혜숙씨 가족사진

 土月會가 地方巡業中(지방순업중)에 곤경에 빠젓슬 적마다 卜惠淑孃은 그의 가진 바 옷, 패물은 물론이오 부득이한 때는 자긔의 몸을 인질로 잡히고까지 土月會 일행을 구해준 일이 한두 번이 아니도록 그의 일에 대한 熱(열)과 公憤心(공분심)이 컷다는 것은 아름다운 『에피쏘-드』다. <중략> 仁川에 잇슬 때 일이다. 土月會는 다시 이러낫스나 그 날의 조흔 伴侶(반려) 卜惠淑孃의 존재는 이저버렷든지 다시 부르지도 안엇다.

 그러고는 土月會는 仁川으로 진출해서 3일간 공연을 한 일이 잇스나 관객은 지극히 령성하야 아주 실패하고 도라왓다. 누가 알랴? 土月會의 무정에 분개한 卜孃이 분푸리로 관객을 모조리 매수한 때문이엿든 줄을-.”

 과연 이것이 사실일까. 내용을 보면 복혜숙이 배우로서 크게 명성을 얻었던 극단 <토월회>에 대해 적잖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화풀이 관객 매수 운운하는 것이 풍설이라고 해도, 유명한 극단 <토월회> 공연을 관람하려는 인천 관객을 모조리 매수할 수 있는 복혜숙의 든든한 금력(金力)과 더불어 인천에서 누리던 인기가 말 그대로 대단했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아무튼 다음의 기록을 보면 복혜숙과 <토월회>의 관계를 더욱 용이하게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기록은 1936년 4월 잡지 삼천리에 실린 「女高出身(여고출신)인 인테리 妓生·女優·女給(여급) 座談會(좌담회)」에 참석한 여배우 프로필 중 복혜숙에 대한 소개이다.

 “卜惠淑女史는 東京 유학시대에 朴勝喜(박승희)씨 등과 함께 土月會를 조직하여 가지고 나와서 ‘松井須磨子(송정수마자)’만치 갓쥬샤를 잘하기로 일홈을 떨첫고, 그 뒤 영화배우로 극의 주인공으로서 이 방면의 運動(운동)에 10년 보낸 이다. 그사이 上海(상해), 東京, 奉天(봉천) 등지로 巡業도 나서서 각지로 周遊(주유)하며 이 땅 향토예술 소개에 盡力(진력)하다가 지금은 서울 仁寺洞(인사동)에서 喫茶店(끽다점) 「버-너스」를 경영 중, 그동안 생활에 쪼들너 妓籍(기적)에 몸을 둔 적도 잇는 역사 만흔 女史다.”

 우리에게 알려진 복혜숙과 인천과의 관계는 이상과 같은 내용이 전부이다. 아쉽게도 우리 인천은 이처럼 그녀의 본업인 연기생활과는 관계가 없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삶에 얽힌 3년의 연고가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그녀를 인천의 예술인이라 부를 수도 없는 것이다. 결국 복혜숙의 이 같은 인천 생활 3년이 인천의 고로(古老)들의 입에서 흘러나와 인천과 그녀를 연관 짓게 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초창기 영화배우였던 복혜숙. 한국의 「카츄사」로 불리던 최초의 연극배우 복혜숙. 예명인 혜숙(惠淑)보다 본명인 마리(馬利)가 더 어울렸을 법한, 일세를 풍미했던 대 여배우 복혜숙에 대한 그 당시의 평가를 다시 읽어 본다.

 “토월회가 창립되여 가장 인긔를 끄는 상영작품은 「카쥬샤」인데, 그「카쥬샤」의 역을 복헤숙씨가 마터 하엿다. 복헤숙 양은 무엇보다도 잘 울고, 잘 웃는다. 매소부로서 감옥에 드러가 고민하든 장면 가튼 것은 복헤숙씨 아니고는 그러케 효과를 내지 못하엿슬 것이다. 마쓰이스마꼬(須磨子)가 카쥬샤의 역을 잘 하야 력사적 명녀우의 일홈을 들엇거니와, 일본에 카쥬샤를 마쓰이스마꼬라 하면, 조선의 카쥬샤는 이 복헤숙 양이 아니될가.”

〈※인용문에 처음 나오는 한자는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괄호안에 한글을 병기했습니다. - 편집자 주〉기호일보, KIHOILBO


Google translation (with mistakes):

Was Bok Hye Sook (卜惠淑) related to Incheon?

Kim Yun-sik / Chairman, Chairman of Incheon Munhwa Coop, September 30, 2007

Bok Hye Sook

“Listening to the radio was almost the only entertainment of the common people. Most of the radios were made in Japan. People like Bok Hye-sook, Yang Ju-dong, and Lim Taek-geun were radio stars who were loved by all people at the time. It was distributed by the US GIS.

The cited article is part of Chapter 5, Chapter 1, Chapter 2 of the Incheon Poetry History, the June 25 War and Changes of Incheon Society, in which the name of Bok Hye-sook (1904 ~ 1982) appeared. Only content that is missing is conveyed. In addition, in the record of Incheon Seokgeum by former journalist Go Il, who portrayed Incheo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local history cannot be seen in the passage of her name in Dr. Tae-beom Shin's Landscape of Incheon after opening.

In terms of life dictionaries, or as a growth base for which she was educated, or as a stage where she was active for a while, nothing related to Incheon is revealed. If so, it is safe to say that Bok Hye-sook is not from Incheon and that she has nothing to do with Incheon. Other records indicate that Bok Hye-sook was born in Boryeong, Chungcheongnam-do and graduated from Ewha Womans High School in 1919 and entered Yokohama Arts School in Japan. Later, Bok Hye-sook moved to the Sawamorino Dance Institute in Tokyo, paying more attention to theater and film.

She learned to dance here, but he was taken home by his father, who was a pastor, and forced to work as a teacher at the Venus school established in Kimhwa, Gangwon-do. Then, he ran away and went to Danseongsa Temple, where he performed Shinpa-drama at that time, and with Lee Wol-hwa, Lee began performing the 1920s Shinpa-drama as Korea's first female theater actress.

In 1923, he formed the troupe <Solwolhoe> and later acted as a choreographer, <Central Stage>, and <Actor Theater>. It was supposed to enter the Chosun Actress School, founded by Hyun Chul in 1925 for acting classes, and then move to the film world in 1926.

In these records, no word on Incheon is mentioned. Despite this situation, older Incheon people used to talk about her relationship with Incheon. What was the reason? First of all, the answer can be found in the contents of the article `` Wind Doors '' in the first edition of the December 1, 1930 magazine, Kongongon.

“Bi Hye-sook, who was named from 京城 in Gyeongseong to Hwaseong actress or 人氣 妓 生 (popular parasitic), pays a sum of 800 won a week. Incheon (Longdong) No. 花 籍 (hwahwa) was squirted.滿 仁川 (Men Incheon) 浮 浪 遊 志 靑 年 (Bungyuji Youth)! Only tie the straps tightly. ” This can be seen in the article “Unpared,” a novel written by 1931 novelist and filmmaker Shim Hoon in the magazine Dong Kwang.

1959 2nd Broadcast Culture Awards

“卜惠淑 土 月 會 (August) As an actress, I'll be the queen of the stage with a fairly homely technique.飮 酒 無量 I'm a sergeant, and the eloquence of 懸 河 (Hyun-Hwa) is not able to raise his head in front of him.不 不 之 혜 Hayagu 호 口 之 策 (Hugu Policy) I just started a parasitic business in 仁川. His starring works include "Changing Dragons", "Flower Flowing Water" and "Three Comrades". 등 (back). ”

“What then did he become a fellowman, who fled his body, hung in what kind of river, and turned into a parasitic and marath? Who was his Earl of Def-de, and what night was his resurrection night? ”

The final quote is part of our “Kajusa” 의 惠 淑 孃 magazine of Samchully magazine, published in January 1933. The later part of this article describes the unfortunate and gloomy dark and depressing situation of women, but it is also mentioned here that she wrote her book in Incheon.

At the end of this article, 卜 孃, who was a stage actress on Sukil's day, was like a soloist. Now, he ran out of 仁川, and he wrote Ba-Bi-Nuts in Jongno, the center of Daekyo Castle. Under the 의 (Hongdeungcheung, etc.), while releasing loveliness to 취 (Yaban) drunker, sometimes his red lips, according to the `` Reco-de '' of `` Columbia '', missed `` Gachu-sa my love '' This flows out or not. ”By this time, I returned to Seoul and managed to run the Venus Bar.

After all, the only connection between Bok Hye-sook and Incheon was the fact that she received 800 yuan at the end of the 1920s and came down to Incheon and kept her enemy for three years in the Yongdong area. But little has been said about her three years in Incheon, where she lived a parasitic life for the Hogu Liberation. However, one interesting fact from Incheon was published in our Kajusa 卜惠淑 孃.

“People may not know it, but they are quite a lot of“ Interior ”women who came to Japan and went to Japan to finish their mother's art school. In order to begin to step on the stage of 잇 月 을, it is necessary to exercise 天分 (1,000 minutes) with the big name of `` Kachu-sha '' and 春香 (Chunhyang). Posingly laughed at a young man and a young man in Chang'an.

Family Photo of Bok Hye Sook

적 月 會 was in trouble during the local tour, and every time the enemy 卜惠淑 孃 had his clothes, clothes, and other things. It is a beautiful episo de that cutting the fever and the eccentricity of his work, not burn. <Omit> It happens when I am in 仁川.土 月 會 is again the existence of iranus or streak 伴侶 惠 淑 孃 of the day, whether it was dizzy or not called again.

Then, 土 月 진출 went to 仁川 and performed for three days. Who knows? The indignity of the innocence of the 土 月 엿 was the result of the bribery of the audience.

Is this true? The contents show that Bok Hye-sook had a little attachment to the troupe <Towolhoe>, which gained great fame as an actor. Even though it is a snowstorm that Hwa-pool lucks with the audience, indirectly read that Bok Hye-sook's strong financial power to buy the famous theater company 'Towolhoe' was a great opportunity. It is a big tree.

Anyway, the following records may help us to guess the relationship between Bok Hye-sook and Tohwolhoe. This record is an introduction to Bok Hye-sook of the actress profile who attended the 『Interior) 生 ・ 女優 ・ 女 給 (grade class)』 (Women's Meeting), published in the magazine Samchully in April 1936.

In the period of studying abroad in Tokyo, Mr. Yuzheng organized the festival with Mrs. Seung-Hee Park and took him home. As the main character of the play, he spent ten years in this movement. In the meantime, they have been heading to Shanghai, Tokyo, and Bengcheon, where they are chowed to various places, and now they are striving to introduce the local arts of the land. It is a long history of women who have managed to have a miracle in their lives while managing "Burner's."

The relationship between Bok Hye-sook and Incheon as known to us is all the above. Unfortunately, Incheon was not related to her main acting life. There is only a three-year ointment about unknown life. This is why she cannot be called an artist in Incheon. In the end, Bok Hye-sook's three years of living in Incheon flowed out of the mouths of the old blast furnaces in Incheon, and it can be understood that she connected her with Incheon.

Bok Hye-suk was one of the earliest movie stars in Korea. Bok Hye-sook was the first Korean actor to be called Katsusa. Reread the evaluation of the age-old actress, Bok Hye-sook, who might have been more appropriate than her real name, Hye-sook.

“The most popular screening work with the founding of the Towol Society was Kajusha, and Mr. Bok He Sook played the role of Kajusha. Ms. Bok-sook cries best of all and laughs well. Whether it's a matter of being in jail as a messenger, the scene will not be as effective as Mr. Bok He Sook. If Matsusui Makoto plays Kajusha well, she will be able to enter the historic home of a beautiful lady, and if Kajusha is called Matsusui Makoto in Japan, the Kajusha of Joseon will not be a lucky lady. ”

* The first kanji in the quotes is written in parentheses for the convenience of the readers.

Editor's Note Seon Ilbo, KIHOILBO


커피사 정리한 ‘고종 스타벅스에 가다’

100여년전 ‘양탕국’ ‘국민음료’ 되기까지

조연현 기자

▲ 1970년대 다방 모습. 당시 다방에는 뛰어난 미모의 얼굴마담이나 레지가 많았는데, 다방 수입은 이들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다.

전북대 신문방송학과의 강준만 교수와 4학년생 오두진씨가 커피와 다방의 사회사를 추적해 <고종 스타벅스에 가다>(인물과 사상사)를 내놓았다. 커피에 미친 오씨의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사제가 함께 커피사를 정리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커피가 처음 들어온 것은 대략 1890년께. 당시 외국인 선교사나 상인들을 통해 커피가 전해졌는데, 서민들은 ‘양탕국’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커피의 색이 검고 쓴맛이 나는 것이 마치 한약 탕국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1896년 아관파천 때 러시아공사관에서 커피 맛을 안 고종은 환궁한 뒤에도 그 맛을 잊지 못하고 덕수궁에 정관헌이라는 서양식 집을 짓고 그곳에서 커피를 마셨다. 고종은 1898년 커피를 마시다가 죽을 뻔했다. 세도를 부리던 역관 김홍륙이 권력을 잃고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 되자 앙심을 품고 사람을 시켜 고종과 세자가 마실 커피에 독을 넣어 독살을 기도했다고 한다.

1910년대엔 커피를 공짜로 준다는 광고가 상점 앞에 나붙더니 곧이어 일본식 다방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927년 서울 종로 관훈동 벽돌집 1층에 카카듀라는 다방이 문을 열면서 바야흐로 다방 시대가 열렸다. 이어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영화배우 복혜숙이 인사동에 비너스다방을 냈고, 천재 시인 이상은 제비다방을 열었다. 39년엔 자유당 시절 2인자로 군림했던 이기붕이 부인 박마리아와 함께 다방을 하기도 했다.

험악한 시대엔 커피도 수난을 겪었다. 일제 말 태평양 전쟁으로 설탕과 커피의 수입이 막히면서 다방은 폐업하고, 1961년 쿠데타를 일으킨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특정 외래품 판매금지를 통해 커피의 수입을 제한해 커피 애호가들의 목젖과 코를 애타게 했다. 커피의 시대는 모닝커피에 이은 인스턴트 커피, 자판기 커피, 스타벅스 커피로 급류를 탔다.

지은이 강준만 교수는 “무언가 우아하고 고상한 척하는 효용은 있었을지 몰라도 좀 들뜬 분위기가 늘 커피 주변을 맴돌았다”며 “한국이 겪어온 초압축 성장의 한 단면이었다”고 썼다.

조연현 기자


Google Translate (fragment):

"...At the time, many coffee shops had a good looking face and cash register, but their income was often influenced by them. Kang Jun-man, professor of journalism at Chonbuk National University, and Oh Doo-jin, a fourth-year student, published <Go to Starbucks> (People and Thought History) followed the social history of coffee and coffee shops.

On the basis of Mr. Oh's vast data on coffee, he organized the history of coffee companies together.

It was about 1890 when coffee first came to Korea. At that time, coffee was delivered through foreign missionaries and merchants, and the common people called it 'yangtangguk'. The color of the coffee is black and bitter, and it is named after Chinese medicine soup.

In 1896, Gojong, who had tasted coffee at the Russian Pavilion in Awanpacheon, did not forget the taste, and built a Western-style house called Jeong Kwan-heon in Deoksugung Palace and drank coffee there. Gojong almost died in 1898 after drinking coffee. When Kim Hong-nag, the former officer of Seido, lost power and was exiled to Heuksan-do, he was embarrassed and sent a man to poison his coffee. In the 1910s, an advertisement for free coffee appeared in front of shops, and Japanese coffee shops soon began to appear.

In 1927, a cacadula was opened on the first floor of a brick house in Kwanhoon-dong, Jongno, Seoul. The most popular movie star, Bok Hye-sook, then opened a Venus coffee shop in Insa-dong, and the genius poet Sang Sang opened a swallow coffee shop. ..."


Article about actress Jung-Am

The Chosun actress school was composed of a general course of basic theory and a high school centered on practical skills. There were 20 students each. The first students were Yi Geum-ryong, Wangpyeong, Kim Abu, Yang Baek, and Bok Hye-sook. You can't find Jungam's name on the student list at the time, but the best actor from Chosun actress school, Bok Hye-sook, who starred in the film Nakhwa Yusu, is an actor who studied with Jungam


Google Translated fragment:

"Unlike nowadays, most of the old movie actors were theater actors. This is because the theater actors who built up their talents in theatrical version were scouted into the movie world, and the theater was more active than the movie. Kim Seung-ho (father of actor Kim Hee-ra), Kim Dong-won (father of singer Kim Se-hwan), Bok Hye-sook, Kang Hyo-sil and Choi Mu-ryong (mother and father of talent Choi Min-soo), Choi Eun-hee, Hwang Jung-soon, Park No-sik (father of talent Park Joon-kyu), Shin Young-gyun, Kim Jin-gyu (the husband of film actor Kim Bo-ae), and Hwang Hae (the father of singer Jeon Young-rok) were the representative characters and all of them were the actors of the time."

Lee Sang-yong


1920년대까지만 해도 무대 위에서 여성의 역할은 남자 배우의 몫이었다. 하지만 이 여배우의 등장으로 무대의 분위기는 혁명적으로 바뀌었다. 바로 복혜숙(사진)의 이야기다. 1904년생인 복혜숙은 18세 때 신극좌에 입단, ‘오호 천명’으로 데뷔했다. 그는 연극무대에서 ‘진짜 여배우’로서 커다란 화제를 모았다. 그래서 복혜숙은 한국 최초의 여배우로 추앙받고 있다. 1982년 오늘, 복혜숙이 78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최초의 여배우이면서 한국영화사의 산증인으로 불린 이였다. 충남 태생인 복혜숙은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10대 때 일본으로 건너가 요코하마 여자기예학교를 다녔다. 그만큼 예술적 기질을 일찍부터 드러냈다. 하지만 목사인 아버지는 딸이 배우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복혜숙은 기어이 집을 나와 무대에 나섰다. 토월회 등을 거치며 활발한 연기 활동을 벌인 복혜숙의 영화 데뷔작은 1926년 영화 ‘농중조’. 신여성 역할을 맡아 각선미를 드러내며 신선한 충격을 몰고오기도 했다. 17세 때 윤백남 감독의 방역 계몽영화에 가명으로 출연했다는 기록도 있다. 1940년 작품 ‘수업료’의 할머니 역을 계기로 주로 노역을 연기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