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설 / Lee Kyung-Soo / Lee Kyung-seol

January 11, 2020

 

 

유성기로 듣던 가요사 / Songs that I heard during the musical period  from 1925~1945 [Disc 1]

 

15 세기말(世紀末)의 노래 / Song of the end of the century (1932)

 

this above song can be found on the next release as well:

 

 

유성기로 듣던 불멸의 명가수 : 막간 가수들 vol.21: 'singers used for interludes'

 

18 경성(京城)은 조흔 곳 / Gyeongseong is a scary place (POLYDOR 19032)

* 19 세기말(世紀末)의 노래 / Song of the end of the century (1932) (POLYDOR 19032) °

 

° "Song of the End of the Century" (1932), Lyrics written by Park Young-ho, Composed by Kim Tanpo

 

Tracks with * I consider essential listens or classics, or tracks to check out for sure. It are tracks that makes them also very suitable for western radioshow airplay. Tracks that are only underlined can be considered fine tracks you might better check out as well, but I am not sure how essential they are.

 

On the first track we hear rhythmic piano, some jazz-like, slow and faster brass arrangements, and picked and bowed violin played into longer instrumental parts, with a high voice singing in cabaret style. The second track is acoustic rhythm guitar and violin led, and is a bit more sad with its voice, complaint-like with a Japanese influence in the melody despite its contrasts of an up-tempo hum-papa rhythm. Between two sung parts there’s an accordion led solo in it too. Two very nice, original examples of its time. 

 

------------------------------------------------------------------------------

 

BIOGRAPHIES (AND TRANSLATED LYRICS):

 

I assume the lyrics are close to romantic poetry in the style of what reminds me off Müller / Schubert's romantic tradition. It is in that way I translated the texts with help of Google Translate only and a assumption what the context could express here. If it is too different from reality, please mail me and guide me. Thanks.

 

------------------------------------------------------------------------------

https://pub.chosun.com/client/news/print.asp?cate=C06&mcate=M1001&nNewsNumb=2013107103

 

국내 최초의 ‘눈물의 여왕’ 이었던 이 가수

당대 최고 인기 스타 이경설, 22세에 결핵으로 숨져

글 | 이동순

한국영화사에서 관객들로 하여금 줄줄 눈물을 쏟게 만들었던 가장 대표적인 비극배우는 누구였을까요? 사람들은 입을 모아 함경도 함흥 출신의 배우 전옥(全玉, 본명 전덕례)이라 대답할 것입니다. 

 

전옥도 <항구의 일야(一夜)>, <눈 나리는 밤> 등 비롯한 여러 악극과 영화에서 최루성 연기를 펼쳐 ‘눈물의 여왕’이라 일컫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전옥 이전에 이미 원조 눈물의 여왕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경설(李景雪, 1912∼1934)입니다. 그러니까 전옥은 이경설 사후에 그녀의 역할을 대신해서 ‘눈물의 여왕’ 자리를 이어받은 것이지요.

 

이경설의 사망을 알리는 당시의 신문기사


이경설은 불과 열다섯의 나이에 은막에 데뷔해서 각종 영화와 악극에 출연하며 대중들의 최고인기를 한 몸에 모으고 활동하다가 갑자기 얻게 된 몹쓸 병으로 방년 22세의 한창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기막힌 사연을 갖고 있지요. 이경설의 이런 안타까운 생애를 생각하면 벌써 가슴이 슬픔으로 꽉 메어져옵니다.

 

이경설은 일찍이 1912년 강원도에서 출생한 뒤 곧 아버지를 따라 함경북도 청진으로 옮겨가서 살았습니다. 거기서 보통학교를 다녔고, 배우가 되기 위해 집을 떠날 때까지 살았습니다. 나중에 병이 들어 1934년 서울에서 낙향해 세상을 떠난 곳도 청진의 신암동이었으니 청진은 이경설의 진정한 고향이라 하겠습니다. 부친은 그곳 청년회 회장을 맡아했고, 어려서 아버지의 인도로 아동들의 무대에 출연했던 경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소녀시절, 이경설의 이웃에는 아주 단짝으로 지내던 친구가 있었는데 일찍 시집을 갔다가 한 해만에 친정으로 쫓겨 와 고독하게 살다가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이경설은 친구의 죽음을 지켜보며 마음속으로 큰 충격을 느꼈고, 여성에게 극히 불리한 혼인제도에 대해 부정적 관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이 영향을 주었던지 배우가 되고난 뒤에도 이경설의 표정과 연기는 슬픔으로 가득한 얼굴에다 가녀린 인상, 거기다 처연한 액션까지 보여주어서 부녀자 관객들은 이경설의 연기에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걸핏하면 소외된 처지에서 마구 희생당하는 조선여성의 삶에 대하여 이경설은 그 누구보다도 연민과 애정을 갖고 그것을 연기에 쏟아 부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경설의 연기를 떠올리면 오로지 ‘눈물과 한탄’ 두 가지입니다. 

 

이경설은 청진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와서 예술학교에 들어갔으나 곧 문을 닫았고, 고려영화제작소에 입사했지만 그 회사마저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현철이 문을 열었던 조선배우학교란 곳을 들어가서 대중문화전문가 왕평(王平 이응호)과 동기생이 되었고, 이후 막역한 친구가 되었지요. 이경설은 여러 악극단에 단원으로 들어가 전국을 떠돌았습니다. 

 

이 무렵에 굶기를 밥 먹듯이 했고, 아파도 돌보는 이 없이 무대에 올라야만 했던 슬픈 시절이 있었지요. 1924년 이경설이 참가했던 동반예술단도 흩어진 악극단 중의 하나입니다. 당시 악극단 공연은 신파극을 중심으로 무술, 기계체조를 곁들여서 공연을 했는데 이경설은 여기서 가수이자 배우였던 신일선(申一仙)과 함께 노래와 연기를 계속하며 대중예술가로서의 경력을 쌓아갔습니다. 

 

이경설의 나이 16세 되던 1928년 그 예술단도 해체되어버렸고, 이후 정착하게 된 곳은 김소랑(金小浪)이 이끌던 극단 취성좌(聚星座)입니다. 여기서 이애리수(李愛利秀), 신은봉(申銀鳳) 등과 함께 당대 최고의 여배우 트리오로 연기와 가창 두 분야에서 눈부신 활동을 펼쳤습니다. 


1929년 이경설은 조선연극사, 연극시장, 신무대 등으로 활동의 터전을 옮겨 다녔습니다. 이경설이 세상을 하직하던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는 신무대 소속의 단원이었지요. 1920년대 후반 공연장 무대에는 연극의 막과 막 사이의 시간적 공백을 메워주던 막간가수가 있었습니다. 무대장치를 변경시키기 위해 일단 막을 내리고 나면 그 빈 시간을 메우기 위해 커튼 앞에 나와서 노래를 들려주던 가수가 바로 막간가수입니다. 그 막간가수는 가창력이 뛰어난 배우를 골라서 관객 앞에 내보냈던 것입니다. 이애리수, 이경설, 강석연, 신은봉, 김선초 등은 모두 막간가수 출신들입니다. 

 

'눈물의 여왕' 이경설


1928년 무렵, 언론은 이경설을 이미 주목받는 배우로 지면에 널리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화차생활(火車生活)>, <무언의 회오(悔悟)>, <가거라 아버지에게로>, <신 칼멘>, <카추샤>, <청춘의 반생>, <짠발짠>, <눈 오는 밤> 등의 연극에서 이경설의 명성은 드높아만 갔습니다. 이경설의 연기가 지닌 특징은 매우 똑똑한 세리프와 박력이 느껴지는 연기였다고 합니다. 

 

함경도 출신의 억양이 느껴지는 독특한 화법이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연극시장 시절, 이경설은 그녀 한 몸에게만 집중되는 극단에서의 과도한 출연요청을 단 하나도 거절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여 무대에 오르느라 온몸이 파김치가 되었고, 이 누적된 피로 때문에 결국 폐결핵에 걸린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배우 이경설이 정식으로 가수가 되어서 음반을 발표한 것은 1931년 봄입니다. 그녀의 생애를 통틀어 도합 44종의 음반을 내었는데, 돔보레코드에서 10편, 시에론레코드에서 6편, 포리도루레코드에서 28편을 발표했습니다. 종류로는 유행소곡, 유행가, 유행소패, 서정소곡, 민요 등의 이름을 달고 있는 가요작품이 33편으로 가장 많으며, 기타 넌센스, 스켓취, 극 등이 11편입니다. 

 

돔보와 시에론에서는 가요만 발표했고, 포리도루레코드사 전속이 되어서는 가요와 극을 함께 발표했습니다. 돔보에서 발표한 음반은 <그리운 그대여(강남제비)>, <아 요것이 사랑이란다>, <아리랑>, <온양온천 노래>, <울지를 마서요>, <콘도라>, <피식은 젊은이(방랑가)>, <허영의 꿈>, <무정한 세상>, <양춘가> 등입니다. 시에론에서 발표한 음반은 <봄의 혼>, <강남제비>, <방랑가>, <온양온천 노래>, <인생은 초로같다>, <하리우드 행진곡> 등입니다. 


포리도루에서 발표한 음반은 <국경의 애곡(哀曲)>, <방아타령>, <세기말의 노래>, <그대여 그리워>, <얼간망둥이>, <조선행진곡>, <경성은 좋은 곳>, <천리원정>,<서울가두풍경>, <이역정조곡>, <사막의 옛 자취>, <오로라의 처녀>, <월야>, <고성의 밤>, <옛 고향터>, <도회의 밤거리>, <패수비가>, <폐허에서>, <옛터를 찾아서>, <아리랑 한숨고개>, <울고 웃는 인생>, <청춘일기>, <멍텅구리 학창생활>, <춘희>, <고도에 지는 꽃>, <망향비곡>, <피식은 젊은이> 등입니다. 

 

이 가운데 출연진들의 연기로 엮어가는 극 음반이나 스켓취, 넌센스 등은 주로 동료였던 왕평, 김용환, 신은봉, 심영 등이 함께 활동하고 있습니다. 가요의 경우는 왕평, 박영호, 추야월, 김광 등의 노랫말에 김탄포(김용환), 강구야시(江口夜詩) 등이 곡을 붙인 작품들이 대부분입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경설이 배우로서 한창 인기가 드높던 시절에 포리도루레코드사에서 그녀에게 문예부장직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해왔습니다. 이때 이경설은 친구 왕평과 함께 일할 수 있다면 기꺼이 맡겠노라고 했고 이에 대하여 포리도루 측에서는 내부적 논의를 거쳐 결국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대중문화계의 걸출한 두 젊은 스타가 레코드회사의 문예부장 업무를 공동으로 맡아보는 초유의 일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 이경설의 건강이 점차 나빠지면서 모든 업무는 주로 왕평 혼자서 보게 되었지요. 

 

배우 이경설이 가수로서 발표한 최고의 히트작은 단연 <세기말의 노래>를 손꼽을 수 있습니다. 1932년 10월에 발표된 이 가요작품은 박영호 작사, 김탄포(김용환) 작곡으로 만들었는데 식민통치에 시달리는 국토와 민족의 아픔과 불안감을 매우 상징적으로 다루고 있는 과감한 표현들이 오늘의 우리들로 하여금 깜짝깜짝 생경한 놀라움마저 느끼게 합니다. 이러한 정황은 일제가 축음기음반에 대한 본격적 감시와 단속에 들어가기 직전이라 가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거미줄로 한허리를 얽고 거문고에 오르니
일만 설움 푸른 궁창아래 궂은비만 나려라
시들퍼라 거문고야 내 사랑 거문고
까다로운 이 거리가 언제나 밝아지려 하는가

 

가랑잎이 동남풍을 실어 술렁술렁 떠나면
달 떨어진 만경창파위에 가마귀만 우짖어
괴로워라 이 바다야 내 사랑 바다야
뒤숭숭한 이 바다가 언제나 밝아지려 하는가

 

청산벽계 저문 날을 찾아 목탁을 울리면서
돌아가신 어버이들 앞에 무릎을 꿇고 비오니
답답해라 이 마을아 내 사랑 마을아
어두워진 이 마을이 언제나 밝아지려 하는가

 

-<세기말의 노래> 전문 

 

이경설의 대표곡 '세기말의 노래' 가사지

각 소절의 마무리 부분에서 표현하고 있는 ‘까다로운 이 거리’, ‘뒤숭숭한 이 바다’, ‘어두워진 이 마을’ 등은 모두 일제의 식민통치 때문에 빚어진 우리 국토의 고통스런 현실을 빗대어 말하는 표현들입니다. 작가는 이 가요시를 통해서 진심에 찬 어조로 고통과 불안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갈망을 ‘언제나 밝아지려 하는가’라는 대목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같은 해 12월에는 유행가 <경성은 좋은 곳>을 발표합니다.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경영하면서 서울의 명칭을 먼저 경성으로 고쳤습니다. 도시계획을 모두 일제의 기획에 의도 하에 정리했습니다. 거리이름도 명치정, 장곡천정, 죽첨정, 고시정, 대도정 등 그들의 침략전쟁에서 공을 세운 장군들의 이름을 딴 일본식 지명과 번지로 바꾸고, 서울을 일본의 변방도시로 정비하려는 뜻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이경설의 노래 <경성은 좋은 곳> 가사에는 식민지시대 서울시내 곳곳에서 요란하게 들려오던 일본군경들의 불안한 사이렌 경보음이 실감나게 들려옵니다. 어둡고 우울한 시대였지만 청년기 세대들은 제한된 공간속에서나마 청춘의 밝은 감성을 구가하려는 모습이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들에게 노래와 웃음이 마음껏 펼쳐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심의 분위기는 쓸쓸한 비애와 삶의 긴장이 감돌았을 테지요. 

 

서울의 새벽 요란히 들리는 저 사이렌
힘 있는 젊은이 씩씩한 걸음 굳세인 팔
서울은 좋아요 힘으로 밝히며
해 지면 한양은 청춘의 밤

 

종로네거리 밤이면 피는 꽃 처녀의 얼굴
청춘아 서로서로 손을 잡고 뛰어라
불러라 마음대로 씩씩하게
노래와 웃음의 서울거리로

 

고요한 밤 멀리서 들리는 바람도 잠든
한강물 위에 들리는 소리 구슬픈 뱃노래
서울은 좋은 곳 언제든지요
밤이나 낮이나 노래의 서울


-<경성은 좋은 곳> 전문

 

이듬해에는 안색이 표시가 나도록 창백해지고 기침과 각혈도 횟수가 심해지기만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이애리수가 불러서 히트를 했던 <황성의 적>을 가사와 제목만 바꾸어서 <고성(古城)의 밤>이란 음반을 취입하기도 했습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었던 이경설의 처연한 목소리로 들어보는 이 노래는 특히 가을비가 처마 끝에 또드락또드락 소리를 내는 깊은 밤 자정 무렵에 들을 때 삶의 황혼녘에 다다른 이경설의 슬픔을 머금은 목소리는 명치끝을 따갑게 도려내는 듯 사뭇 가슴을 저밉니다. 극작가 이서구 선생은 1930년대 중반, 이경설이 평양에서 잠시 결혼생활을 했었다고 증언하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33년 이경설은 지병이었던 결핵이 점점 악화되어 일본 오사카, 북간도 용정 등지로 요양을 다녀왔으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결국 1934년 8월28일 청진의 신암동 자택으로 돌아가서 불과 22년의 짧았던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그녀가 사망한 다음 달 포리도루레코드사에서는 이응호 극본 <춘희>를 ‘일대 여배우 이경설양 추모발매’ 유작음반으로 발표했습니다. 이 음반에는 동료 왕평, 신은봉 등과 함께 또랑또랑한 발음으로 연기하는 이경설의 생생한 목소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감동적인 연기를 펼치며 배우와 가수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당대 최고의 스타 이경설! 

 

말 그대로 ‘눈물의 여왕’ 원조였던 이경설의 애처로운 영혼은 지금도 전체 한국인들의 가슴속으로 가을비처럼 스며들어 슬픈 목소리로 여전히 우리를 적시고 있을 것입니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Google Translation (with mistakes) :

 

This singer was known as the first queen of tears in Korea, Lee Kyung-sul, who the most popular star of its time, has died of tuberculosis at age 22.

 

Who was the most typical tragic actor in Korean film history that made viewers cry? 

 

Jeon-ok is known for evoking tear in various dramas and movies, including <Day of the Harbor> and <Night of the Snow>. However, there was already a queen of tears before this, and her name is Lee Kyung-seol (李景 雪, 1912-1934). So Jeon-ok took over her role as the Queen of Tears after Lee Kyung-seol's death.

 

 

Newspaper article at the time of Lee's death

 

Lee Kyung-seul made his debut at the age of fifteen and appeared in various films and dramas. My heart is already filled with sorrow when I think of this sad life of Lee Kyung-Soo.

 

Lee Kyung-seol was born in Gangwon-do in 1912 and soon moved with her father to Chongjin, North Hamgyong Province. There she went to ordinary school and lived until she left home to become an actor. Later, when she fell sick and left the world in Seoul in 1934, it was in Sinam-dong of Chongjin, so Chongjin is the true home of Lee Kyung-seol. My father was the president of the youth conference there and remembers his childhood experience as a child on the children's stage.

 

When I was a girl, I had a friend who was very close to Lee's neighbor. She went to marry early and was driven to her family in a year and lived alone and committed suicide. Lee Kyung-seol had a great shock in his heart as he watched his friend's death and had a negative view of the marriage system that was extremely unfavorable for women.

 

Even after becoming an actor, Lee's facial expressions and acting showed a sorrowful face, a delicate impression, and a dignified action, and the women's audience became crying all over Lee's acting. In a nutshell, it can be said that Lee Kyung-sul poured out his pity on acting with compassion and affection more than any other about the life of a Korean woman who is being victimized in isolation. Recalling Lee's acting, there are only two kinds of tears and laments.

 

Lee Kyung-seol came to Seoul after finishing his regular school in Cheongjin and entered the art school, but soon closed and joined the Korea Film Institute, but the company was disbanded. After entering the Chosun actress school where Hyuncheol opened, she became a fellow student with Wangpyeong (王平 이응호), a popular culture expert, and later became a great friend. Lee Kyung-seol wandered across the country as a member of various troupes.

 

There was a sad time when she was starving, and sick, she still had to get on stage without proper care. The accompanied art troupe, which Lee Kyung-seol participated in 1924, is one of the scattered troupes. At the time, the troupe performed with martial arts and gymnastics, centered on the new wave drama, and Lee Kyung-seol continued his career as a public artist by continuing singing and acting with singer and actress Shin Il-sun.

 

In 1928, when Lee Kyung-seol was 16 years old, the art troupe was dismantled, and the place where he later settled was the extreme brittle seat led by Kim So-Rang. Here, along with Lee Ae-soo and Lee Eun-bong, she was the best actress trio of his time, performing brilliant activities in both acting and singing.

 

In 1929, Lee Kyeong-seol moved to the Korean theater, the theater market, and the new stage. She was a member of the new stage until the last moment Lee left the world. In the late 1920s, there was an interlude singer who filled the time gap between acts. Once the curtain was closed to change the stage, the singer who came out in front of the curtain and sang the song to fill the void was the interlude singer. The interlude singer picked an actor with great singing power and sent it to the audience. Lee Ari-su, Lee Kyung-seol, Kang Seok-yeon, Shin Eun-bong, Kim Sun-cho are all from interlude singers.

 

 

 'Queen of Tears'

 

By 1928, the press introduced Lee Kyung-sul as an actress who was already attracting attention. <Tea Tea Life>, <Unspoken Truth>, <Go to My Father>, <Shin Carmen>, <Kachusha>, <Youth Half-Life>, <Salt Foot>, <Night of Snow Lee's reputation in the play, etc. has gone high. The characteristic of Lee's acting was that he had a very smart serif and powerful acting.

 

The unique speech with the accent from Hamgyeongdo seems to have given a fresh shock to the audience. During the theater market, Lee Kyong-seol, who refused to accept any excessive appearances from the troupe that was concentrated on her body, accepted all of them and went on stage. It's possible.

 

Actor Lee Kyung-seol officially became a singer and released the album in spring 1931. Throughout her life, she has produced 44 records in total, including 10 in Dombo Record, 6 in Sierra Record and 28 in Poridoru Record. There are 33 music pieces with names such as fashion songs, fashion songs, fashion songs, lyric songs, folk songs, etc., and 11 nonsense, skating, and dramas.

 

Dombo and Sierra announced only the song, and when it became exclusive to Poridoru Records, they released the song and the play together. The album released by Dombo is <Old Love (Gangnam Swallows)>, <Oh That's Love>, <Arirang>, <Oncheon Hot Spring Song>, <Don't Cry>, <Condor>, <Spirited Young Man ( Wanderer)>, Vanity Dreams, Heartless World, Yangchunga, etc. The albums released by Sierra are <Soul of Spring>, <Gangnam Swallow>, <Wanderers>, <Onyang Hot Spring Song>, <Life is Elderly>, and <Hollywood March>.

 

The albums released by Poridoru are <Birds of the Borders>, <Angatling>, <Songs of the Century>, <I Miss You>, <Nicky>, <School March>, <Kyeongseong Good Places>, <Chunri Expedition>, <Seoul Street Street>, <Legendary Valley>, <The Old Traces of the Desert>, <The Virgin of the Aurora>, <Monday>, <Night of Goseong>, <Old Hometown>, <Night Street >, <Pasuga-ga>, <In the Ruins>, <In Search of Old Ruins>, <Ari and Sighs>, <Life of Crying and Laughing>, <Youth Diary>, <Earth School Life>, <Chunhee>, <Flowers at Altitude >, <Hyanghyangbi>, and <Spirit is Young>.

 

Among them, dramas, sketches, and nonsense, which are woven by the actors, are mainly collaborated with Wang Pyeong, Kim Yong-hwan, Shin Eun-bong, and Sim Young. In the case of the song, most of the works are written by songs such as Wangpyeong, Park Youngho, Chuyawol, Kim Kwang and Kim Tanpo (Kim Yong-hwan) and Gangguyashi (江口 夜 詩).

 

It is known that Lee Kyung-seol offered her the position of Literary General at Poridoru Records Inc. at a time when he was very popular as an actor. Lee Gyeong-seol said that if he could work with his friend Wang Pyeong, he would be willing to accept it. In this way, two prominent young stars in the pop culture industry collaborated on the record business of the record company. However, since Lee's health gradually worsened, all the work was mainly seen by Wangpyung alone.

 

 

이경설의 노래 ‘경성은 조흔곳’ 가사지

lyrics for 'Sungseong Streak'

 

The best hit released by actress Lee Kyung-seol as a singer is by far the song of the end of the century. This song, released in October 1932, was composed by Park Young-ho and Kim Tan-po (Kim Yong-hwan). It is a surprise. This situation seems to have been possible because Japan was on the verge of full-scale surveillance and crackdown on phonograph records.

 

Song of the End

(translated with mistakes!)

 

When we entangle a waist with a spider web and climb a lyre

I just wanna work,

get the bad rain under the blue sky

It's a withered lyre, my love lyre.

Will this tricky street always get brighter?

 

If the leaves are loaded with Southeast winds,

Howling on the crows on the moonlight

Suffer, this sea, my dear sea

Will this volatile sea always brighten?

 

In search of the clearing day

On his knees in front of his dead parents,

It's frustrating, my town, my dear town

Will this darkened town always get brighter?

 

 

 Lee Kyung-seol's representative song 'Song of the end of the century' lyrics

 

At the end of each measure, this tricky street, the lofty sea, and the darkened village are all expressions that speak of the painful reality of our homeland caused by Japanese colonial rule. The artist expresses his desire to escape from pain and anxiety in a sincere tone through this song, ‘When do you want to be bright?’.

 

In December of the same year, we will announce the popular song Kyungsung. The Japanese colonial rule of Joseon changed the name of Seoul to Kyungsung first. All city plans were organized with the intention of Japanese-made planning. In the name of the streets, Myeongchijeong, Janggok Ceiling, Jukjeongjeong, Koshijeong, Daedojeong, etc., changed their names to Japanese names and addresses named after the generals who made their mark in their aggression wars, and to revitalize Seoul as a Japanese marginal city. I moved it.

 

Lee Kyung-seol's song, “Gyeongseong is a good place,” contains the unstable siren alarm sounds of Japanese military officers who had been heard in various parts of Seoul during the colonial era. It was a dark and gloomy age, but the younger generation was lovely to see the bright emotions of youth in limited space. Despite their songs and laughter, the city's atmosphere would have been lonely and sad.

 

Jungseong is a good place

(translated with mistakes!)

 

That siren sounds like the dawn of Seoul

Strong young man

Seoul is good with power

When the sun goes down, Hanyang is the night of youth

 

Jongno Street A flower's maiden's face blooming at night

Young people run hand in hand

Call me freely

To Seoul street of song and laughter

 

On a quiet night, the winds heard from far away have fallen asleep

Sounds on the Han River

Seoul is a nice place anytime.

Seoul at night or day

 

The following year, the complexion (of her illness  became pale, and the coughing and bleeding also increased. In the midst of this, she changed the lyrics and titles of "the enemy of Hwang", which was called by Lee Arisu, and imported the album, The Night of the Old City.

 

This song listens to Lee Kyung-seul's violent voice that puts death on his face, especially when she hears the sadness of Lee Kyung-seul in the twilight of life when the autumn rain makes the sound of drac todak at the end of the eaves. I squeeze my chest as if I'm biting. Playwright Lee Seo-gu testified that in the mid-1930s, Lee Kyung-seol had been married for a while in Pyongyang, but it did not last long.

 

In 1933, Lee Kyung-seol, who had been suffering from terrible tuberculosis, went to nursing homes in Osaka, Japan, and North Yongdo, but her condition did not improve.In August 28, 1934, he returned to his home in Sinam-dong in Chongjin, ending a short life span of only 22 years.

 

The month after her death, Poridor Records released Lee Eung-ho's play Chun Hee as a record album for the release of the remembrance of actress Lee Kyung-seul. This album contains the vivid voices of Lee Kyung-seol, who plays with his pronunciation, along with fellow Wangpyeong and Shin Eun-bong. Lee Kyung-seol, the greatest star of his time who performed an acting act with all his strength and enjoyed an era as an actor and singer!

 

Lee Kyung-seol's pathetic soul, which was literally the "Queen of Tears," will still be soaking in us with a sad voice as the rain rain soaks into the hearts of all Koreans.

 

----------------------------------

 

http://www.nongaek.com/news/articlePrint.html?idxno=36895

 

HOME 칼럼 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 원조 ‘눈물의 여왕’ 이었던 이경설(李景雪)[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승인2018.03.27 09:44

[논객닷컴=이동순] 한국영화사(韓國映畵史)에서 관객들로 하여금 줄줄 눈물을 쏟게 만들었던 가장 대표적인 비극배우는 누구였을까요? 사람들은 입을 모아 함경도 함흥 출신의 배우 전옥(全玉, 본명 전덕례)이라 대답할 것입니다. 전옥도 ‘항구의 일야’, ‘눈 나리는 밤’ 등 비롯한 여러 악극과 영화에서 최루성(催淚性) 연기를 펼쳐 ‘눈물의 여왕’이라 이르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전옥 이전에 이미 원조 격 눈물의 여왕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경설(李景雪, 1912∼1934)입니다. 그러니까 전옥은 이경설 사후에 그녀의 역할을 대신해서 ‘눈물의 여왕’ 자리를 이어받은 것이라 볼 수 있지요.

 

이경설은 불과 열다섯의 나이에 은막(銀幕)에 데뷔해서 각종 영화와 악극에 출연하며 대중들의 최고인기를 한 몸에 모으고 활동하다가 갑자기 얻게 된 몹쓸 병으로 방년 22세의 한창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기막힌 사연을 갖고 있습니다. 이경설의 이런 안타까운 생애를 생각하면 벌써 가슴이 비통한 슬픔으로 꽉 메어져옵니다.

 

이경설은 일찍이 1912년 강원도에서 출생한 뒤 곧 아버지를 따라 함경북도 청진으로 옮겨가서 살았습니다. 거기서 보통학교를 다녔고, 배우가 되기 위해 집을 떠날 때까지 살았습니다. 나중에 병이 들어 1934년 서울에서 낙향해 세상을 떠난 곳도 청진의 신암동이었으니 청진은 이경설의 진정한 고향이라 하겠습니다. 부친은 그곳 청년회 회장을 맡아했고, 이경설은 어려서 아버지의 인도로 아동들의 무대에 출연했던 경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소녀시절, 이경설의 이웃에는 아주 단짝으로 지내던 친구가 있었는데 일찍 시집을 갔다가 한 해만에 친정으로 쫓겨 와 고독하게 살다가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이경설은 친구의 죽음을 지켜보며 마음속으로 큰 충격을 느꼈고, 여성에게 극히 불리한 세상의 혼인제도에 대해 부정적 관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이 영향을 주었던지 배우가 되고난 뒤에도 이경설의 표정과 연기는 항시 슬픔으로 가득한 얼굴에다 가녀린 인상, 여기에 처연한 액션까지 보태어서 부녀자 관객들은 이경설의 연기에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걸핏하면 소외된 처지에서 마구 희생당하는 조선여성의 삶에 대하여 이경설은 그 누구보다도 연민과 애정을 갖고 그것을 연기에 투영시켰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이경설의 연기를 떠올리면 오로지 ‘눈물과 한탄’ 두 가지입니다.

 

이경설은 청진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와서 예술학교에 들어갔으나 곧 문을 닫았고, 고려영화제작소에 입사했지만 그 회사마저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극작가 현철이 운영하던 조선배우학교란 곳을 들어가서 작사가 왕평(王平, 본명 이응호)과 동기생이 되었고, 이후 두 사람은 김용환과 더불어 막역한 친구가 되었지요. 이경설은 여러 악극단에 단원으로 들어가 전국을 떠돌이로 유랑했습니다. 이 무렵에 굶기를 밥 먹듯이 했고, 몸이 아파도 누구 하나 돌보는 이 없이 무대에 올라야만 했던 서럽고 슬픈 시절이었지요.

 

1924년 이경설이 참가했던 동반예술단(東半藝術團)도 흩어진 악극단 중의 하나입니다. 당시 악극단 공연은 신파극을 중심으로 무술, 기계체조를 곁들여서 공연을 했는데 이경설은 여기서 가수이자 배우였던 신일선(申一仙)과 함께 노래, 연기를 계속하며 대중예술가로서의 경력을 조금씩 쌓아갔습니다. 이경설의 나이 16세 되던 1928년 그 예술단도 덧없이 해체되어버렸고, 이후 정착하게 된 곳은 김소랑(金小浪)이 이끌던 극단 취성좌(聚星座)입니다. 여기서 이애리수(李愛利秀), 신은봉(申銀鳳) 등과 함께 당대 최고의 여배우 트리오로 연기와 가창(歌唱) 두 분야에서 눈부신 활동을 펼쳤습니다.

 

1929년 이경설은 조선연극사(朝鮮硏劇舍), 연극시장, 신무대 등으로 대중예술의 활동터전을 빈번히 옮겨 다녔습니다. 이경설이 세상을 하직하던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는 신무대 소속의 단원이었지요. 1920년대 후반 공연장 무대에는 연극의 막과 막 사이의 시간적 공백을 메워주던 막간가수(幕間歌手)가 있었습니다. 무대장치를 변경시키기 위해 일단 막을 내리고 나면 그 빈 시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커튼 앞에 나와서 노래를 들려주던 가수가 바로 막간가수입니다. 그 막간가수는 가창력이 뛰어난 배우를 골라서 관객 앞에 내보냈던 것입니다. 이애리수, 이경설, 강석연, 신은봉, 김선초 등은 모두 초창기 막간가수 출신들입니다.

 

1928년 무렵, 당시 언론은 이경설을 이미 주목받는 배우로 지면에 널리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화차생활(火車生活)’, ‘무언(無言)의 회오(悔悟)’, ‘가거라 아버지에게로’, ‘신 칼멘’, ‘카추샤’, ‘청춘의 반생(半生)’, ‘짠발짠’, ‘눈 오는 밤’ 등의 연극에서 배우 이경설의 명성은 드높아만 갔습니다. 이경설의 연기가 지닌 특징은 매우 똑똑한 세리프와 박력이 느껴지는 연기였다고 합니다. 함경도 출신의 억양이 느껴지는 독특한 화법이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연극시장 시절, 이경설은 그녀 한 몸에게만 집중되는 극단에서의 과도한 출연요청을 단 하나도 거절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여 무대에 오르느라 온몸이 거의 파김치가 되다시피 했었고, 이렇게 누적된 피로와 제대로 먹지 못한 영양실조 때문에 결국 폐결핵에 걸린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배우 이경설이 정식으로 가수가 되어서 음반을 발표한 것은 1931년 봄입니다. 그녀의 생애를 통틀어 도합 44종의 음반을 내었는데, 돔보레코드에서 10편, 시에론레코드에서 6편, 폴리돌레코드에서 28편을 발표했습니다. 종류로는 유행소곡, 유행가, 유행소패, 서정소곡, 민요 등의 이름을 달고 있는 가요작품이 33편으로 가장 많으며, 기타 넌센스, 스켓취, 극 등이 11편입니다. 돔보와 시에론에서는 가요만 발표했고, 폴리돌레코드사 전속이 되어서는 가요와 극을 함께 발표했습니다. 돔보에서 발표한 음반은 ‘그리운 그대여(강남제비)’, ‘아 요것이 사랑이란다’, ‘아리랑’, ‘온양온천 노래’, ‘울지를 마서요’, ‘콘도라’, ‘피식은 젊은이(방랑가)’, ‘허영의 꿈’, ‘무정한 세상’, ‘양춘가’ 등입니다.

 

시에론에서 발표한 음반은 ‘봄의 혼(魂)’, ‘강남제비’, ‘방랑가’, ‘온양온천 노래’, ‘인생은 초로(草露)같다’, ‘하리우드 행진곡’ 등입니다.

 

포리도루에서 발표한 음반은 ‘국경의 애곡(哀曲)’, ‘방아타령’, ‘세기말의 노래’, ‘그대여 그리워’, ‘얼간망둥이’, ‘조선행진곡’, ‘경성(京城)은 좋은 곳’, ‘천리원정’, ‘서울 가두풍경’, ‘이역정조곡(異域情調曲)’, ‘사막의 옛 자취’, ‘오로라의 처녀’, ‘월야(月夜)’, ‘고성(古城)의 밤’, ‘옛 고향터’, ‘도회의 밤거리’, ‘패수비가(浿水悲歌)’, ‘폐허에서’, ‘옛터를 찾아서’, ‘아리랑 한숨고개’, ‘울고 웃는 인생’, ‘청춘일기’, ‘멍텅구리 학창생활’, ‘춘희(椿姬)’, ‘고도(孤島)에 지는 꽃’, ‘망향비곡’, ‘피식은 젊은이’ 등입니다.

 

위의 취입앨범 가운데 출연진들의 연기로 엮어가는 극 음반이나 스켓취, 넌센스 등은 주로 동료였던 왕평, 김용환, 신은봉, 심영 등이 함께 활동하고 있습니다. 가요의 경우는 왕평, 박영호, 추야월, 김광 등의 노랫말에 김탄포(김용환), 강구야시(江口夜詩, 에구치 요시) 등이 곡을 붙인 작품들이 대부분입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경설이 배우로서 한창 인기가 드높던 시절에 폴리돌레코드사에서는 그녀에게 문예부장직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해왔습니다. 이때 이경설은 친구 왕평과 함께 일할 수 있다면 기꺼이 맡겠노라고 했고 이에 대하여 폴리돌 측에서는 내부논의를 거쳐 결국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당대 대중문화계의 걸출한 두 젊은 스타가 레코드회사의 문예부장 업무를 공동으로 맡아보는 초유(初有)의 일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 이경설의 건강이 점차 나빠지면서 모든 업무는 주로 왕평 혼자서 보았을 테지요.

 

배우 이경설이 가수로서 발표한 최고의 히트작은 단연 ‘세기말의 노래’를 손꼽을 수 있습니다. 1932년 10월에 발표된 이 가요작품은 박영호 작사, 김탄포(김용환) 작곡으로 만들었는데 식민통치에 시달리는 국토와 민족의 아픔과 불안감을 매우 상징적으로 다루고 있는 과감한 표현들이 오늘의 우리들로 하여금 놀라움마저 느끼게 합니다. 이러한 정황은 일제가 축음기음반에 대한 본격적 감시와 취체(取締) 및 단속에 들어가기 직전이라 가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거미줄로 한허리를 얽고 거문고에 오르니

일만 설움 푸른 궁창아래 궂은비만 나려라

시들퍼라 거문고야 내 사랑 거문고

까다로운 이 거리가 언제나 밝아지려 하는가

 

가랑잎이 동남풍을 실어 술렁술렁 떠나면

달 떨어진 만경창파위에 가마귀만 우짖어

괴로워라 이 바다야 내 사랑 바다야

뒤숭숭한 이 바다가 언제나 밝아지려 하는가

 

청산벽계 저문 날을 찾아 목탁을 울리면서

돌아가신 어버이들 앞에 무릎을 꿇고 비오니

답답해라 이 마을아 내 사랑 마을아

어두워진 이 마을이 언제나 밝아지려 하는가

-‘세기말의 노래’ 전문

 

 

이경설의 음반 ‘세기말의노래’ 레코드와 가사지 ©이동순

각 소절의 마무리 부분에서 표현하고 있는 ‘까다로운 이 거리’, ‘뒤숭숭한 이 바다’, ‘어두워진 이 마을’ 등은 모두 일본의 제국주의 식민통치 때문에 빚어진 우리 국토의 고통스런 현실과 환경을 빗대어 말하는 표현들입니다. 작가는 이 가요시를 통해서 진심에 찬 어조로 고통과 불안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갈망을 ‘언제나 밝아지려 하는가’라는 대목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같은 해 12월에 이경설은 유행가 ‘경성은 좋은 곳’을 발표합니다.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경영하면서 서울의 명칭부터 먼저 경성(京城, けいじょう)으로 고쳤습니다. 도시계획조차 모두 일제의 기획과 의도 하에 정리했습니다. 거리이름도 명치정(明治町, 명동), 장곡천정(長谷川町, 소공동), 죽첨정(竹添町, 충정로), 고시정(古市町, 용산구 동자동), 대도정(大島町, 용산구 용문동) 등 그들의 침략전쟁에서 공을 세운 일본의 사무라이, 정치인, 외교관, 장군의 이름을 딴 일본식 지명과 번지로 바꾸고, 서울을 일본

 

------------------------------------------------------------------------------

Google Translate (with mistakes):  

(李景 雪) [the song of Lee Dong-soon],

 

Who was the most typical tragic actor in Korean film history that made viewers cry? People will speak with their mouths and say, Actor Jeon-ok from Hamheung, Hamgyeong-do. Jeonok is not enough to be called the Queen of Tears by performing tear-gas acting in various dramas and movies, including the port's work night and the snowy night. However, there was already a queen of original tears before the prison, and he is Lee Kyung-seol (李景 雪, 1912-1934). So Jeon-ok took over the role of 'Queen of Tears' instead of her role after Lee Kyung-seol's death.

 

Lee Kyung-seul made his debut at the age of fifteen and appeared in various screens and dramas. I have a wonderful story of leaving. When I think about this sad life of Lee Kyung-sul, my heart is already filled with grief.

 

Lee Kyung-seol was born in Gangwon-do in 1912 and soon moved with his father to Chongjin, North Hamgyong Province. There he went to ordinary school and lived until he left home to become an actor. Later, when I fell sick and left the world in Seoul in 1934, it was Sinam-dong of Chongjin, so Chongjin is the true home of Lee Kyung-seol. My father was the chairman of the youth conference there, and Lee Kyung-seol remembers his childhood experience as a child on the children's stage.

 

When she was a girl, I had a friend who was very close to Lee's neighbor. She went to marry early and was driven to her family in a year and lived alone and committed suicide. As he watched the death of a friend, he felt a big shock in his heart and had a negative view of the world's marriage system, which was extremely disadvantageous for women. Even after becoming an actor, Lee's facial expressions and acting were always filled with sadness, a delicate impression, and the action she performed, so the women's audience became crying all over Lee's acting. In a nutshell, it can be said that Lee Kyung-seul had more compassion and affection than any other, and projected it into acting on the lives of Korean women who were victimized in isolation. Recalling Lee's acting, there are only two kinds of tears and laments.

 

Lee Kyung-seol came to Seoul after finishing his regular school in Cheongjin and entered the art school, but soon closed and joined the Korea Film Institute, but the company was disbanded. Entering the Chosun actress school run by the playwright Hyun Chul, the lyricist became a contemporary with Wang Pyeong (王平). After that, they became friends with Kim Yong Hwan. Lee Kyung-seul entered the troupes of various troupes and wandered around the country. It was a sad and sad time when I was starving at this time and had to get on stage without anyone taking care of my body.

 

The accompanied art troupe, where Lee Kyung-seol participated in 1924, is one of the scattered troupes. At the time, the troupe performed with martial arts and gymnastics, focusing on new wave dramas, and Lee Kyung-seol continued to sing and act along with singer and actress Shin Il-sun and continued his career as a public artist. In 1928, when Lee Gyeong-seul was 16 years old, the art troupe was completely dismantled, and the place where he later settled was a troupe of bribery chairs led by Kim So-Rang. Here, along with Lee Ae-soo and Shin Eun-bong, he was the best actress trio of his time, performing brilliant activities in acting and singing.

 

In 1929, Lee Kyung-seol frequently moved the field of popular art to Joseon Drama History, Theater Market, and New Stage. She was a member of the new stage until the last moment Lee left the world. On the stage of the theater in the late 1920s, there was an interlude singer who bridged the time gap between acts. Once the curtain was closed to change the stage equipment, the singer who came out in front of the curtain and sang the song to fill the empty space is the interlude singer. The interlude singer picked an actor with great singing power and sent it to the audience. Lee Ari-su, Lee Kyung-sul, Kang Suk-yeon, Shin Eun-bong, Kim Sun-cho are all from the early interlude singers.

 

By 1928, the media at the time were introducing Lee Kyung-seul to the public as an actress. `` Tea life '', `` Mental twist '', `` Go to my father '', `` Shin Carmen '', `` Kachusha '', `` Youth half-life '' Actor Lee Kyung-seol's reputation in dramas such as 'Snowy Night' went high. The characteristic of Lee's acting was that he had a very smart serif and powerful acting. The unique speech with the accent from Hamgyeongdo seems to have given a fresh shock to the audience. During the theater market, Lee Kyung-seol had almost refused to accept all the appearances from the extremes that were concentrated on her body. It is estimated that the disease eventually leads to pulmonary tuberculosis.

 

Actor Lee Kyung-seol officially became a singer and released the album in spring 1931. Throughout her life, she has produced 44 records in total, including 10 in Dombo Record, 6 in Sierra Record and 28 in Polydolre. There are 33 music pieces with names such as fashion songs, fashion songs, fashion songs, lyric songs, folk songs, etc., and 11 nonsense, skating, and dramas. Dombo and Sierra announced only the song, and when they became exclusive to Polydolrec, they released the song and the play. The album released by Dombo is 'Old Love (Gangnam Swallows)', 'Ah This Is Love', 'Arirang', 'Onyang Hot Spring Song', 'Don't Cry', 'Condora' Wanderers), 'vanity dreams', 'heartless world', 'yangchunga', etc.

 

The albums released by SIRON are 'Spring Soul', 'Gangnam Swallow', 'Wanderer', 'Onyang Hot Spring Song', 'Life is Like an Elderly', 'Hollywood March', etc. .

 

The album released by Poridoru is `` Morning of the Borders '', `` Bang-Ata-Ring '', `` Song of the End of the Century '', `` I Miss You. '' Place, Cheonni expedition, Seoul streetscape, Yeokjeongjeonggok, old traces of the desert, maiden of aurora, moon night, old castle Night ',' Old Hometown ',' Town Street ',' Pasubiga ',' From the Ruins ',' In Search of the Ancient Ruins ',' Ari and Sighs ',' Life Cries and Smiles ',' Youth diary, 'Dong-tung school life', 'Chun-hee', 'Flower on Kodo', 'Mangyangbi-gok', 'Spiritual young man', etc.

 

Among the albums above, the albums, sketches, and nonsense, which are composed by the performers' acts, are mainly collaborated with Wang Pyeong, Kim Yong-hwan, Shin Eun-bong, and Sim Young. In the case of the song, most of the works are accompanied by songs such as Wangpyeong, Park Youngho, Chuyawol, Kim Kwang, and Kim Tanpo (Kim Yong-hwan) and Gangguyashi (江口 夜 詩).

 

It is known that at the time Lee Kyung-seol was very popular as an actor, Polydolcord Co. has offered her to take the position of Literary General. Lee Kyung-seol said that if he could work with his friend Wangpyeong, he would be willing to take charge. In this way, two prominent young stars of the contemporary pop culture industry collaborated on the record business of the record company. However, since Lee's health gradually worsened, he would have seen all his work mainly by Wangpyeong alone.

 

The best hit released by actor Lee Kyung-seol as a singer is by far the song of the end of the century. The song, released in October 1932, was composed by Park Young-ho and Kim Tan-po (Kim Yong-hwan). The bold expressions that deal with the pain and anxiety of the country and nation under colonial rule symbolize us today. Makes me feel. This situation seems to have been possible because Japan was on the verge of entering into full-scale monitoring, collecting, and crackdown on phonograph records.

 

Song of the End

 

When we entangle a waist with a spider web and climb a lyre

I just wanna work, get the bad rain under the blue sky

It's a withered lyre, my love lyre.

Will this tricky street always get brighter?

 

If the leaves are loaded with Southeast winds,

Howling on the crows on the moonlight

Suffer, this sea, my dear sea

Will this volatile sea always brighten?

 

In search of the clearing day

On his knees in front of his dead parents,

It's frustrating, my town, my dear town

Will this darkened town always get brighter?

-The full song of the end of the century

 

Record and Lyrics © Lee Dong Soon

 

At the end of each section, this difficult street, the sublime sea, and the darkened town all speak of the painful reality and environment of our land, which was created by Japanese imperial colonial rule. is. The artist expresses her desire to escape from pain and anxiety in a sincere tone through this song, ‘When do you want to be bright?’.

 

In December of the same year, Lee Kyung-seol announces the popular song “Gyeongseong is a good place.” The Japanese ruled Joseon as a colony and changed the name of Seoul to Gyeongseong (け い じ ょ う) first. Even city planning was organized under Japanese plan and intention. Street names also include Myeongchijeong (Myeongdong), Jangok Ceiling (Sogong-dong), Jukjeongjeong (Chungjeong-ro), Goshijeong (Dongja-dong, Yongsan-gu), Daedojeong (Dongmun-dong, Yongsan-gu) In their war of aggression, they changed their name to a Japanese name and address named after Japanese samurai, politicians, diplomats and generals, and reorganized Seoul into a Japanese city.

 

Lee Kyung-seol's song “Gyeongseong is a good place” contains the unstable siren alarm sounds of Japanese military officers who had been heard in various parts of Seoul during the colonial era. It was a dark and gloomy age, but the younger generations felt loved to seek the bright emotions of youth in limited space. Despite their songs and laughter, the city's atmosphere would have been lonely and sad. On the surface of the lyrics, Kyung-sung is a good place to live, but the reality hidden in the context is sometimes perceived as a silhouette of anxiety and crisis.

 

-'Gyeongseong is a good place

 

That siren sounds like the dawn of Seoul

Strong young man

Seoul is good with power

When the sun goes down, Hanyang is the night of youth

 

Jongno Street A flower's maiden's face blooming at night

Young people run hand in hand

Call me freely

To Seoul street of song and laughter

 

On a quiet night, the winds heard from far away have fallen asleep

Sounds on the Han River

Seoul is a nice place anytime.

Seoul at night or day

 

In 1933, the next year, Lee's complexion became pale, and the frequency of coughing and blood loss increased. In the midst of this, Lee Arisu's hit "The Enemy of Hwangseong" was released on the album "Goseong Night" by changing the lyrics and title. Thus, 'Goseong Night' is very unusually the version of Lee Song-seol's version of the popular song 'The enemy of Hwang-sung'. Lee Ari-soo and Yun Baek-dan sang this song, but according to what I've heard, it seems that Lee Kyung-seul's record has the wildest sound. This song listens to Lee Kyung-seul's violent voice that puts death on his face, especially when she hears the sadness of Lee Kyung-seul in the twilight of life when the autumn rain makes the sound of drac todak at the end of the eaves. I squeeze my chest as if I'm biting. Perhaps because of this, Japan released the song “Goseong Night” by Lee Kyung-seol as a list of banned songs.

 

Playwright Lee Seo-gu testified that in the mid-1930s, Lee Kyung-seol had been married for a while in Pyongyang, but that did not seem to last long. In 1933, Lee Kyung-seol's disease, which became a chronic disease, became worse and worsened. He traveled to Osaka, Japan, and North Yongdo, but his illness did not improve. Eventually, Lee returned to his home in Sinam-dong, Chongjin on 28 August 1934, ending a short life of only 22 years. No matter how many times you end your life, the 22-year-old's life is too short. How are you born with such a short life?

 

The 90-year-old is close to the actor Lee Kyung-seol, who has left us. Lee Kyung-seol, a popular celebrity who used the stage as a home and a home, endured poverty and hunger as evil, and burned youth. We stare at the expression and appearance of her photographs. As a performer, Lee Kyung-Sul was good at acting as a wife or a bookkeeper for a poor family living a tragic life. In addition, you can find articles that show that all the acts of exaggerated acting are her fault. This may be the actor's motivation and passion. If she had not chosen the path of the public celebrity, she would have been nothing but a woman who died in a plain, buried in Choya. However, because she decided to choose a life that flashes like a fire or a flash, even though it is short, the name of Lee Kyung-Sul still remains as a shining name in Korean modern cultural history.

 

The month after her death, Polydolrec Co. released Lee Eung-ho's play Chun-hee as a record for the release of The Great Actress Lee Kyung-seul's Tribute Release. This album contains the vivid voices of Lee Kyung-seol, who plays with his pronunciation, along with fellow Wangpyeong and Shin Eun-bong. Hamgyong, who feels a bit embarrassed, is also the best star of the time who played an impressive act as an actor and a singer with all his strength.

 

Lee Kyung-seol's sorrowful spirit, which was literally the “Queen of Tears,” will still soak into our hearts with a soothing voice.

 

  

 

VIDEO OF BIOGRAPHY :

 

 

 

Please reload

May 13, 2020

February 29, 2020

February 20, 2020

February 17, 2020

Please reload

© 2018 PSYCHEFOLK PRODUCTIONS  

contact

This site was designed with the
.com
website builder. Create your website today.
Start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