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Korea Jazz Band, Okeh Jazz Band & Columbia Jazz Band

September 29, 2019

ARTICLE​  1:

The Influence of Shanghai jazz in Korea:

 

 

From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479

 

1930년대 상하이서 불어온 재즈열풍...조선의 청춘을 사로잡다

Posted June. 05, 2019 07:42,   Updated June. 05, 2019 07:42

 

 ‘상하이 릴’(1935년), ‘상하이 블루스’(1937년)….

 1930년대 경성의 모던보이, 모던걸들에게 가장 인기 있던 재즈 음악에서는 공통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화려함과 낭만,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 ‘상하이’가 등장한다는 것. “어여쁜 엔젤들의 윙크가 그리워라 상하이/상하이는 청춘의 락원∼” 1935년 발표된 ‘꽃피는 상하이’의 가사 속에는 당대 젊은이들의 인식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식민지 조선의 청춘들은 왜 상하이에 열광했을까.

 1928년 1월 조선축구단의 상하이 원정 경기가 결정적 계기였다. 당시 호남의 대부호였던 백명곤이 이끌던 조선축구단은 영국 육군 축구팀과의 원정 경기를 위해 중국 상하이로 떠났다. 축구 경기를 위해 떠났지만 백만장자이자 화려한 사치를 즐기던 백명곤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 ‘재즈’였다. 상하이의 조계 지역을 중심으로 재즈 클럽이 크게 번성하면서 미국, 필리핀, 러시아 등 세계 각국에서 온 밴드들이 활동하고 있던 때였다.

 백명곤은 재즈 악보와 색소폰, 피아노 등 악기를 대거 구입해 귀국한다. 이후 당대 최고 음악가들을 한 명씩 불러 모아 색소폰에 백명곤, 트럼펫 한욱동, 피아노 홍난파, 드럼 이상준, 노래 이인선 등으로 구성된 8인조 재즈 악단을 결성한다. 한국 최초의 재즈 밴드인 ‘코리아재즈밴드’가 탄생한 것이다.

 경성의 YMCA 회관에서 첫 공연을 연 밴드의 인기는 대단했다. 세련된 음색에 젊은이들은 매료됐고, 전국을 순회하는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1929년 9월호 개벽 잡지에는 “코리아재즈밴드의 공연이 있을 때마다 젊은 피에 끓는 남녀들에게 큰 환호를 받았다. 한 가지 즐김에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도록 뛰고 놀아버릴 뿐”이라며 재즈 열풍에 빠진 당대의 세태를 비판하는 지식인이 등장할 정도였다.

 지난달 24일 중국 상하이 푸단대에서 열린 한중 공동 국제학술대회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상하이’에서는 한국 대중음악의 뿌리를 추적한 이색적인 연구가 공개됐다. 장유정 단국대 교수의 ‘중국 상하이와 한국 근대 대중음악의 몇 가지 국면’이다. 장 교수는 “1930년대까지 재즈는 최고의 인기를 누렸지만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이후 일제의 검열이 강화되면서 명맥이 끊기고, 잊힌 역사가 됐다”며 “1950년대를 ‘재즈 1세대’로 규정하고 있는데 1920, 30년대에 이미 재즈 열풍이 불었다는 점에서 당시를 ‘재즈 0세대’로 부를 만하다”고 했다.

 한편 단국대 동양학연구원과 푸단대 한국연구센터가 주최한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한국과 중국의 공동 항일투쟁 역사가 집중 조명됐다.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최근 인도를 방문한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는 인도의 무장 독립 투쟁을 이끌던 수바스 찬드라 보스(1897∼1945)의 후손을 직접 찾아가 인도의 민심을 얻기도 했다”며 “한국과 중국은 함께 독립을 위해 투쟁한 공통의 역사가 있다는 점에서 ‘항일’을 매개로 한 공동 역사 연구는 경색된 한중 관계 개선을 위한 해법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유원모 onemor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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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lation: 

The Influence of Shanghai in Korea:

 

“Shanghai Reel” (1935), “Shanghai Blues” (1937)… .

 

Jazz music was most popular among modern boys and modern girls in Kyungsung's 1930s and can be easily found to be in common to other areas. The “Shanghai” association had appeared, that was standing for the creation of a glamorous, romantic and dreamy atmosphere. “I miss the winks of the beautiful angels. Shanghai / Shanghai is the Lakwon of Youth.” In the lyrics of “Flowing Shanghai,” published in 1935, young people's perceptions are intact. Why did the youth of colonial Chosun get excited about Shanghai?

 

In January 1928, the Korean soccer team's away game in Shanghai was a decisive factor. The Korean soccer team led by Baek Myung-gon, the great Honam leader at the time, left for Shanghai, China, to play with the British army football team. After the game, it was jazz that caught the eyes of Baek Myung-gon, who was a millionaire and enjoyed luxury. It was a time when jazz clubs flourished around Shanghai's ancestry, and bands from all over the world, including the United States, the Philippines and Russia, were active there.

 

Baek Myung-gon returns home with a large collection of musical instruments such as jazz sheet music, saxophone and piano. After that, he gathered one of the best musicians of the time and formed an eight-member jazz band consisting of Baek Myung-Kon, Trumpet Han Uk-Dong, Piano Hong-Nan, Drum Sang-Joon and Song In-Seon. Korea's first jazz band, The Korea Jazz Band, was born.

 

The band's first performance at the YMCA Hall in Kyungsung was incredible. Young people were fascinated by the refined tone and even performed the tour around the country. In the September 1929 issue of Opening Magazine, “Whenever there was a performance of the Korea Jazz Band, I was greatly cheered by young and bloody men and women. I just fell in love and ran and played with my mind. ”There was an intellectual who criticized the contemporary situation of the jazz craze.

 

An unusual study that traced the roots of Korean popular music was unveiled at the Korea-China joint international conference “Presidential Government of Korea and Shanghai” held at Fudan University in Shanghai, China on the 24th of last month. It is a few aspects of the popular music of Shanghai and China of Dankook University. Professor Jang said, "Jazz was the most popular until the 1930s, but after the outbreak of the Pacific War in 1941, the censorship of Japan was strengthened and it became a forgotten history." In the 1920s and '30s, the jazz fever had already blown up, so it was worth calling it 'the jazz generation.'

 

The conference, hosted by Dankook University Institute of Oriental Studies and Fudan University Korean Studies Center, highlights the history of joint anti-Japanese struggle between Korea and China to mark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interim government of Korea. Han Si-joon, a professor at Dankook University, said, “The Japanese Prime Minister Shinzo Abe recently visited India and visited the descendants of Subas Chandra Bose (1897-1945), who led the armed independence struggle in India.” "As a common history that we struggled for independence together, the joint history study through the" anti-Japanese "could be a solution to the stiffening relations between Korea and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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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hiphople.com/index.php?mid=kboard&document_srl=3803106&sort_index=title&order_type=desc

 

[The Roots of Korean Jazz] - 제 1편 - 1930년대 한반도에 상륙했던 재즈

 

1월에 1일에 우리나라 1930~1940년대 스윙 재즈에 민요(民謠)적인 요소를 접목시킨 만요(漫謠)에대한글이랑 1960~70년대 미8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재즈 1세대 뮤지션들에대한 글 두 편을 2월안으로 올리겠다고했었는데 벌써 4월 11일이네요 만요(漫謠)에대한 글을 쓰려고 자료들을 모으다보니 생각 이상으로 자료가 너무 방대하였고

그 모아놓은 자료들을 정리하려는데 크로스 체크하던 도중 자료들중에 사실과 다른 자료들도 상당했고 구전으로만 전해져온 자료들도 조금있었고

또 당시 뮤지션들의 친일 행적에대해 그들이 음악사에 세운 공을 앞에두고 일종의 쉴드를 치려는 뉘앙스를 풍기는 자료들도 조금있어서

커트해야할 부분들은 커트하고 다시 정리하는 과정을 거치고 작성하느라 오래걸리게되었습니다

솔직히 제가 재즈 이론적인 부분에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있는게 아닌데다가

부족한 필력에 너무 거대한 주제를 택한게 아닌가하는 걱정이 컸던게 사실이지만

대신에 철저하게 감상자 입장에서 쓴글이고

글 쓸때 포커스도 디테일적인 부분보다는 전체적인 부분에 맞췄기때문에 글 읽으시는분들 입장에서도 어렵게 느껴지시지는 않을거라고 생각됩니다.

 

Le premier chapitre : 1920년대 한반도내 jazz의 존재에 대하여

 

본문은 원래 1930년대에서 1940년대 만요(漫謠)에대한 글을 쓰려고했으나

글을 쓰려고 자료를 모으던 도중 1920년대 활동하던 최초의 재즈밴드 Korean Jazz Band의 존재에 대하여 알게되었고

눈앞에있는 수가 왜 놓여졌는지를 이해하려면 그 전에있는 수를 봐야하는것이 당연한것이기때문에 본문에 1920년대 재즈에 대한 내용을 포함시키게 되었습니다

한반도에 재즈(당시 표현 : 쨔스 혹은 짜스)에 대한 기록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언제이고

한반도에 재즈가 처음 연주된 시기는 언제일까요?

  한국 재즈역사서라고 볼수있는 "한국 재즈 100년사(박성건 저)"에 따르면 한반도에 재즈에 대한 기록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1926년이라고합니다

다만 여기서 확실하게 아셔야할게 뭐냐면

미국 본토에서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많은 재즈 뮤지션들이 여러 유럽 국가들에서 순회 공연을하며 스윙 재즈의 세계화의 문을 서서히 열고있었고

한반도내에서는 호남의 부호집안 아들로

 (조선축구단)

  (맨 왼쪽이 백명곤 선생)

조선축구단의 구단주셨던 백명곤선생이 상해 원정경기를 하고 상해에서 재즈 악기들과 재즈 악보들을 가지고 귀국하신후

  대한제국 시절 황실 군악대였던 이왕직 양악대 출신에

그럼에도 근대화 시대에 맞게 굉장히 리버럴한 태도를 보이셨고

 

조선일보에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재즈 비평을 기고하기도하셨으며

오늘날에와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대중음악 작곡가 불리는 홍난파 선생과 몇몇분들과 함꼐 의기투합하신후

한반도에 재즈에 대한 기록이 처음 등장했던 같은 해 조선일보에서 후원한 첫 공연을 시작으로

 

다음해 우리나라 첫 재즈 콘서트도 성황리에 마친 Korean Jazz Band가 방송국의 개국과 유성기(축음기) 보급의 바람을 타고 전국 순회 공연을 하였으며

 

일본 회사였던 콜럼비아 레코드 경성지사에서 최초의 재즈 수입 음반인 Paul Whiteman의 앨범이 수입되었던 1920년대 후반을 제외해놓고는

 (덧붙여 설명드리자면 콜럼비아 레코드 경성지사도 세계적인 스윙 열풍이 불던 1930년대 재즈 밴드를 꾸리게 됩니다.)

한반도에 유입된 모든 서양음악을 재즈라고 불렀던 시기였기때문에 1920년대 초중반에 기록된 재즈는 기록만으로 온전한 재즈라고 볼수 없다는겁니다

간단하게 설명 드리자면 "우리나라 역사상 재즈에대한 기록이 처음 등장하고 공연이 열린 시기는 1926년이고

스윙 재즈 세계화 시대의 문이 서서히 열리고있던 1920년대 후반을 제외하고

1920년대 초중반은 한반도에 유입된 모든 서양음악을 재즈라고 불렀던 시기였기때문에 기록만으로 온전한 재즈라고 볼수없다"

↑↑↑ 이렇게만 알고계셔도 1920년대 우리나라 재즈에대해서는 반은 알고있는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TIP! 

01.자료들에 의하면 백명곤 선생님의 재력은 일제강점기 당시에 스포츠카와 오토바이를 끌고다닐정도로 엄청났던것으로 보이고요 조선축구단에서 하셨던 구단주의 역할을 Korean Jazz Band에서도 했던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02.Korean Jazz Band의 첫 공연 당시 멤버 구성입니다

 

이인선(Vocal)

백명곤(1st Saxophone)

이철(2nd Saxophone)

홍재유(Banjo,Violin)

홍난파(Piano)

이상준(Drum)

박건원(Slight Trombone)

한욱동(Trumpet)

사진에는 이인선 선생님이 안계신데 자료에의하면 Korean Jazz Band 첫공연부터 함께하셨다고합니다.

 

Le deuxieme chapitre : 두 얼굴의 도시 경성(京城)

 

바로 일명 1930~40년대 "조선 쨔스" 만요(漫謠)에 내용으로 들어가려고했으나

60~70년대 국내 음악계에 대하여 논할때 미8군쇼를 빼놓고 논할수없듯

1930~40년대 만요(漫謠)에 대하여 설명할때 한성과 서울 사이의 도시 경성을 얘기하지 않고 설명이 되지않기에 본문에 짧게라도 포함시키는게 맞다고 생각하여 포함시키게 되었습니다

경성(京城), 일제강점기 문화 예술에대하여 논할때 가장 많이 거론되는 도시

길 한복판 선로를 타고 움직이는 전차, 그리고 인력거와 자전거를탄 사람들이 생각나는 도시

창가 구석에서 소설을 쓰는 작가, 술에 취한 연인의 다툼, 친구들과 시를 읊으며 나누는 대화

바에서 독한 위스키를 들이키며 생각에 잠긴 사람

그리고 작은 무대 한 켠에서 연주가 흐르고춤을 추며 서로에게 호감을 발산하는 남녀가 생각나는 도시

실제로도 다섯개의 백화점과 라디오 방송국이있었고

한반도내 5대 레코드사였던

 

오케 레코드

콜럼비아 레코드

태평 레코드

시애론 레코드

리갈 레코드가있었으며

일제 말기에는 인구 100만에 육박하는 거대도시였습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있는게 당연하듯이 위에서 설명했던 일본인들이 많던 남촌과 조선인들이 많던 북촌을 놓고봤을때 일본의 민족차별은 노골적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경성의 남촌 거리의 휘황찬란한 분위기와 북촌 거리의 비참하고 남루한 분위기는

일제 강점기의 슬픈 역사와 근대화의 새로운 물결이라는 두 얼굴을 보여줌과 동시에

한반도를 침탈한 일본의 찌질하고 유치하고 쪼잔하기 짝이없는 Lil Bitch적 민낯을 보여주고있다고 생각합니다.

 

Le troisieme chapitre : 조선 jazz 귀재 김해송

 

Duke Ellington & His Famous Orchestra - It Don't Mean A Thing (If It Ain't Got That Swing) (1932)

Benny Goodman - Sing, Sing, Sing (1935)

  Buster Bailey And His Rhythm Busters - Light Up (1938)

  Billie Holiday - Swing, Brother Swing (1939)

1920년 미국 본토를 들여다 보면 금주법이 시행되자 반작용으로 불법 술집들이 많이 생겨나기 시작하였고

불법 술집들이 손님을 끌기위해 화려한 쇼를 많이들 보여주었습니다

이때 쇼에 올렸던게 재즈 밴드였는데 불법 술집들끼리 경쟁적으로 재즈 밴드의 수를 늘렸고

이러한 현상이 빅밴드 형성에 많은 기여를 하였고

재즈의 즉흥적인 성향에 빅밴드의 다채로운 요소가 더해졌고 이 조화가 스윙 음악의 탄생에 시발점이되었고

거기다가 1장에서 설명해드렸듯이 세계 대공황으로 많은 재즈 뮤지션들의 유럽 순회 공연을 하게되었고 스윙 재즈의 세계화의 문이 서서히 열리고있었습니다

1930년대를 보면 1933년에는 금주법이 해제되었고 그로인해 음지에서 활동하던 재즈 뮤지션들이 양지로 올라오기 시작하였으며

중반에는 침체되있던 경기가 살아나기 시작하며, 눌려있던 용수철이 튀어오르듯 억눌려있던 대중들은 마음을 펴듯 밝고 경쾌한 멜로디의 스윙 재즈를 찾기 시작합니다

 

한반도내에서는 충남 공주 출신으로 신문 배달등 지금으로 따지면 아르바이트같은 일들을 하시며 색소폰을 배우시고 1장에서 설명해드렸던 Korean Jazz Band에서 제 2 색소폰을 맡고계셨던 이철 선생님께서

같은 시기 일본과 중국을 통해 한반도내에 스윙 재즈가 물밀듯이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무수히 많은 스윙밴드들이 등장하였고 스윙 재즈가 우리 가락인 민요(民謠)와 결합하여 만요(漫謠)를 만들어내었던 당시

우리 음악시장을 장악하고있던 일본 레코드사들에 대항하여 훗날 1930년대 일명 "조선 쨔스"를 이끌게되는 오케 레코드사를 설립하셨습니다(2장에서 설명드렸듯이 당시 오케 레코드,콜럼비아 레코드,태평 레코드,시애론 레코드,리갈 레코드가있었는데 이철 선생님께서 설립하신 오케레코드 제외 모두 일본 회사였습니다.)

당시 한반도내 5대 레코드사간의 경쟁은 굉장히 치열하였는데

이 치열한 경쟁속에서 다른 레코드사와 차별화로 자체적으로 악단 꾸려 녹음을하는 방식을 선택한 오케 레코드사는 태평 레코드사와 1~2위를 다툴 정도로 성공을 하게됩니다(정말 오글거리기는 하지만;; 본문에대한 자료를 모을때 이 부분에대한 자료를 읽으며 오케 레코드사 자체가 우리 음악시장을 장악하고있던 일본 레코드사에 대항하려고 만들어진 회사이고 더군다나 일본이 노골적으로 민족 차별을 하던 당시를 생각하니 오케 레코드사의 쾌거가 괜히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TIP!

본문을 다시 읽어보며 뭔가 찝찝한 느낌이 들길래 모아놓은 자료를 다시 헤집어보니

오케 레코드사에서 먼저 녹음을위한 자체 악단을 꾸리고

이에 자극을 받은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도 똑같이 녹음을 위한 자체 악단을 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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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lation with help of Google Translate (with still some mistakes):

ARTICLE​  2:

 

[The Roots of Korean Jazz]-

Part 1-Jazz Landed on the Korean Peninsula in the 1930s

 

On January 1st, we already wrote about Manyo, which combined folk songs with swing jazz in Korea's 1930s and 1940s, and the first generation of jazz musicians who were active around the US Army in the 1960s and 1970s. I was going to post two posts in February, but it's already April 11th.

 

In order to organize the collected data, during the cross check, there were a lot of facts and other data, and there were a few documents that were transmitted only by word of mouth.

 

In addition, there are some materials that give a nuance to the musicians' profession to put a kind of shield in front of the ball they set up in music history. The parts that need to be cut take a long time to cut and reorganize. Honestly, I don't have much knowledge in jazz theory. It was true that I was worried that I chose too big a subject for insufficient writing. Instead, I wrote it thoroughly from the viewer's perspective. When writing, the focus is on the overall part rather than the detail part, so it will not be difficult for the readers.

 

1: the existence of jazz in the 1920s

 

The text originally was intended to write about Manyo in the 1930s and 1940s.

 

While collecting data for writing, I learned about the existence of the first Korean Jazz Band in the 1920s. It's only natural to see the numbers before them to understand why the numbers in front of them are laid out, so I've included the 1920s jazz in the text.

 

When did the first records of jazz (formerly Higgs or Jas) appear on the Korean Peninsula? When was the first time jazz was played on the Korean peninsula?

  

According to "100 Years of Korean Jazz History" by Park Sung-Gun, a Korean jazz history book, the first record of jazz appeared on the Korean Peninsula in 1926.

 

But what you need to know for sure: Due to the Great Depression in the United States, many jazz musicians were slowly opening the door to the globalization of swing jazz with tours in various European countries.

 

 

Mr. Baek Myung-gon, the head of the Korean soccer team, returned to Shanghai with jazz instruments and jazz scores. 

 

Lee Wang-jik, was an imperial military band during the Korean Empire. Nevertheless, he was very liberal in the age of modernization. He wrote the first jazz criticism in Korea's history for the Chosun Ilbo.

 

Today, after joining Hong Nan-fa, the first popular music composer in Korea's history, with some of you. The first performance was sponsored by the Chosun Ilbo in the same year.

  

The following year, the Korean Jazz Band, which finished the first jazz concert in Korea, performed a tour around the country, riding on the wind of the broadcasting station's country and the phonograph.

  

Except in the late 1920's when the album of the first Japanese jazz album Paul Whiteman was imported at Columbia Records, a Japanese company, (In addition, the Columbia Records Hardy will also have a jazz band in the 1930s, when the world's swinging craze hit.)

 

Jazz recorded in the early 1920's is not a complete jazz by itself because it was a time when all Western music flowed into the Korean peninsula was called jazz.

 

 

In a nutshell, "The record of jazz first appeared in our history and the concert was held in 1926. (see picture above from 2-6-1926).

 

Except in the late 1920's, when the doors of the world of swing jazz were opening slowly, the mid-1920s was a time when all Western music on the Korean peninsula was called jazz, so it's hard to say that it's perfect jazz alone. Even when you know this, I think half of you know about Korean jazz in the 1920s.

 

 

 

 concert at YMCA, 1927

 

According to the data, Mr. Baek Myung-Kon's resources seemed to be enormous enough to drag sports cars and motorcycle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Korean Jazz Band's first members were Incal Sun (Vocals) 1st Saxophone, Lee Chul (2nd Saxophone), Jaejo Hong (Violin), Red Nanpa (Piano), Drum, Gun-won Park, Trumpet.

 

In the picture, Mr. In-sun Lee is not there. According to the materials, he has been with us since the first performance of Korean Jazz Band.

 

2. City of two faces

 

In the 1930s and 40s, one tried to enter the contents of "Chosun Hicks"

 

When discussing the Korean music industry in the 1960s and 1970s, we can't discuss anything except the Eighth Army show. 

 

When I talked about Manyo in the 1930s and '40s, I didn't talk about the city between Han and Seoul, and I couldn't explain it.

 

Gyeongseong, the city most talked about when discussing Japanese culture during Japanese colonial rule. It was a city full of streetcars and rickshaws and cyclists. 

 

The city reminds us of men and women who play and dance on a small stage. There were actually five department stores and radio stations. It had the 5th largest record company in Korea. Ok record Columbia records Pacific record Zionron Records . At the end of Japan, it was a huge city with a population of one million.

 

However, when there is light, it is natural to have darkness, so when we look at Namchon, which had many Japanese, and Bukchon, which had many Koreans, as described above, Japanese ethnic discrimination was blatant. We can see the glamorous atmosphere of Gyeongnam's Namchon Street against the miserable and disgusting atmosphere of Bukchon Street. This is showing the two faces of the sad history of the Japanese occupation and the new wave of modernization. I think they are showing the counties unfamiliar, Japanese newcomers, which were  childlike-playful and frivolous people who invaded the Korean peninsula.

 

3: Joseon jazz.

 

Some of the records that were printed in Korea were Duke Ellington & His Famous Orchestra-It Don't Mean A Thing (If It Ain't Got That Swing) (1932), Benny Goodman-Sing, Sing, Sing (1935),  Buster Bailey And His Rhythm Busters-Light Up (1938), Billie Holiday-Swing, Brother Swing (1939)

 

Looking into the US mainland in 1920, when the taboo law was enforced, many illegal bars began to be created as a reaction. Illegal bars showed a lot of colorful shows to attract customers.

 

It were jazz bands that was on show at this time, and illegal pubs competitively increased the number of jazz bands. This phenomenon contributed to the formation of the big band.

The improvisation of jazz adds to the colorful elements of the big band, and this harmony is the starting point for the birth of swing music.

 

In addition, as explained in Chapter 1, the Great Depression led to many tours of European jazz musicians, and the door to globalization of swing jazz was slowly opening.

 

In the 1930s, the taboo law was lifted in 1933, which led jazz musicians to the sunny areas. In the midst of the recession, the game began to come to life, and as the thrust of the spring was springing up, the crowds began to look for a bright and cheerful jazz swing jazz.

 

In the Korean Peninsula, Lee Cheol, who was a princess in Chungcheongnam-do and delivered a newspaper, worked as a part-time job, learned saxophone, and played the second saxophone in Korean Jazz Band, which I explained in Chapter 1.

 

At the same time, swing jazz began to flow in the Korean peninsula through Japan and China.

 

Innumerable swing bands appeared and when swing jazz combined with our folk song folk song

 

Against the Japanese record companies that dominated our music market, we established Oke Records, which later led to the so-called Chosun Hicks (as described in Chapter 2, Oke Records, Columbia Records, Pacific Records, and Sealon Records). There was a legal record, but it was all a Japanese company except for the O'Record, which Mr. Lee founded.)

 

At the time, the competition between the five major record companies in the Korean peninsula was very intense.

 

 

In this fierce competition, Oke Records, which chose to record itself in different ways from other record companies, was able to compete with Taiping Records 1st and 2nd. When I gathered, I read the data on this part, and Okeh Records itself was built to fight against Japanese record companies that dominated our music market.

 

At Oke Records, they first set up their own band for recording. Inspired by this, also Columbia Records set up its own band for recor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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