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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연 / Kang, Seok-Yeon

November 3, 2019

 Tracks can be found here:

 

유성기로 듣던 불멸의 명가수 : 막간 가수들 Interlude singers (vol 21)

 

7 방랑가(放浪歌) / Wanderer (COLUMBIA 40138) 1931)

8 오동나무 / Paulownia (COLUMBIA 40138) (1931)

9 애닯은 밤 / A sad night (COLUMBIA 40265)

10 고도의 밤 / Night Altitude (COLUMBIA)

13 부활(復活) / Resurrection (COLUMBIA 40162)

 

"Wanderer" has a beautiful arrangement mix of brass with strings pushing its impulses of music forward, while singer Kang Seok Yeon with its girlish but powerful singing voice clearly is trying to put power into this pushed forward move. Not only this is a classic for its content. This voice which is almost like that of an ordinary people's voice makes it effect of a true honest expression. "Paulownia" is a new folk song into a jazz setting, a combination, which again with the singer's voice succeeds to add the same power to the almost heartbeat rhythm of the song. Also this one is a classic if you ask me. "A Sad Night" is old time music with a touch of jazz. It has a great slide guitar solo part with honky tonk background. These little sorts of arrangements alone makes it a sure succes once more. This is the kind of night club music  one would love to hear. "Night Altitude" is a bit slower in its waltzing but still varying rhythm. It has jazzy improvised parts.

 

A shame I only found these 4 tracks from this singer, because for me they represent the kind of music I prefer o find from the thirties everywhere.

 

"Resurection" sounds more like a military greeting song or other kind of hymn. The (great sound of the) jazz band is still present and Kind Seok Yun's voice adds power where it is desired but this time a bit for a different (almost politicized) purpose.

 

 

유성기로 듣던 가요사 /

Songs that I heard during the musical period  from 1925~1945 [Disc 1]

 

오동(梧桐)나무 / Paulownia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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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GRAPHIES:

 

만능 엔터테이너 강석연을 아시나요 (2017)

 

감정 흔드는 고운 목소리…최초 멜로의 여왕

 

1930년대 제주에서 서구 근대극을 태동시킨 김진문의 처(妻)인 강석연도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배우이자 가수였다.

 

그는 1914년 제주에서 출생했지만 부모님을 따라 서울에서 생활했다. ‘토월회’ 회원으로 배우 활동을 먼저 시작한 언니 강석제와 오빠 강석우의 영향을 받은 그는 일찍이 연극·라디오 드라마에 출연하며 천부적 재능을 드러냈다. 특히 최초 ‘멜로의 여왕’으로 기록돼 있다.

 

그의 외모는 다소 통통하고 모든 행동에 당찬 구석이 많았으며 특히 창법이 야무졌다고 전해진다. 1931년 한 신문에 따르면 ‘귀염성이 있는 강석연은 감정을 흔드는 고운 목소리를 가졌다’고 기록했을 정도다.

 

그는 ‘강남달’을 대중화시키면서 인기를 얻었다. 당시 서울에 진출·성업 중이던 일본 컬럼비아레코드사 서울지점은 강석연의 재능을 알아보고 전속으로 편입했다.

 

이후 ‘방랑가’, ‘오동나무’ 등 두 곡을 레코드사에서 발표한 그는 1935년까지 대략 130여 곡을 발표했다.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 주제곡을 부른 주인공도 바로 고(故) 강석연이다.

 

고현영 기자  hy0622@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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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lated with help of Google Translate:

 

"Do you know all-round entertainer Kang Suk-yeon?

 

A fine voice with shaking emotions… the Queen of the First ??? (?)

 

Kang Seok-yeon, the wife of Kim Jin-moon who gave birth to Western modern drama in Jeju in the 1930s, was an actor and singer who worked at the same time.

 

She was born in Jeju in 1914 and lived with her parents in Seoul. Influenced by her older sister Kang Suk-je and her brother Kang Suk-woo, who started the actor's career as a member of the ”Towolhoe,” she appeared in theater and radio dramas, showing her natural talent. In particular, she is remembered as the first Queen of ???.

 

Her appearance is rather plump but that didn't matter. According to a newspaper in 1931, 'Cute Kang Seok-yeon has a fine voice that shakes her emotions'.

 

She gained popularity by popularizing Gangnamdal. The Seoul branch of Columbia Records, a Japanese company that had been entering and succeeding in Seoul at that time, recognized Kang's talent and transferred to Seoul.

 

Later, she released two songs, 'Wanderer' and 'Tung Paul', and she has released about 130 songs until 1935. The main character who sang the theme song of Na Un-gyu's movie “Arirang” is also Kang Suk-yeon."

 

By Hyun-young Ko,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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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교수의 가요 이야기

식민지 시대의 아이돌(idol) 강석연을 아십니까

 

피가 뜨거워야 할 젊은이의 몸에서 피는 식었습니다.

 

그리고 두 눈에는 흥건한 눈물이 괴어 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젊은이의 마음은 낙망과 설움으로 가득 차 있고, 온몸에는 병도 깊었군요. 이런 몸으로 과연 어디를 어떻게 여행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데도 가수 강석연(姜石燕, 본명 姜福亨, 1914∼2001)이 불렀던 노래 <방랑가>의 한 대목은 차디찬 북국 눈보라 퍼붓는 광막한 벌판을 혼자 떠나갑니다. 이 노래 가사에 담겨 있는 내용은 그야말로 비극적 세계관의 절정입니다. 그 어떤 곳에서도 희망의 싹을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실제로 1920년대 초반 당시 우리 민족의 마음속 풍경은 이 <방랑가>의 극단적 측면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좌절과 낙담 속에서 우리는 기어이 1919년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펼쳤고, 죽음을 무릅쓴 채 불렀던 만세소리는 한반도 전역에 울려 퍼졌습니다. 그러나 이도 잠시 우리의 주권회복 운동은 잔인무도한 일본군경의 총칼에 진압이 되고 말았지요. 그 후의 처절 참담한 심경은 말로 형언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1920년대의 시작품도 몽롱함, 까닭모를 슬픔, 허무와 퇴폐성 따위의 국적을 알 수 없는 부정적 기류가 들어와 대부분의 식민지 지식인들은 그 독한 마약과도 같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런데 1931년 이런 시대적 분위기를 잘 담아낸 노래 한 편이 발표되어 식민지 청년들의 울분과 애환을 대변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방랑가>였습니다. 이 노래는 이규송(李圭松)이 노랫말을 만들고 강윤석(姜潤石)이 편곡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잔 술에 취하여 이 노래를 부르면 그나마 답답하던 숨통이 조금이나마 트이는 듯했습니다. 줄곧 명치끝을 조여오던 해묵은 체증 같은 것이 다소나마 씻겨 내려가는 듯했습니다.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발매된'방랑가'의 가사지


피식은 젊은이 눈물에 젖어 

낙망과 설음에 병든 몸으로 

북국한설 오로라로 끝없이 가는 

애달픈 이내 가슴 뉘가 알거나  


돋는 달 지는 해 바라보면서 

산 곱고 물 맑은 고향 그리며 

외로운 나그네 홀로 눈물 지울 새 

방랑의 하루해도 저물어가네  


춘풍추우 덧없이 가는 세월 

그동안 나의 마음 늙어 가고요 

가약 굳은 내 사랑도 시들었으니 

몸도 늙어 맘도 늙어 절로 시드네 

 

-<방랑가> 전문 

 

1930년대 초반의 강석연

(左) 일본에서 취입후에 한복을 입고 찍은  강석연. (右) 일본 옷을 입고 찍은 강석연(맨 오른쪽)과 김복희(가운데), 이애리수(맨왼쪽)의 모습. 이들은 모두 빅타레코드 전속가수였다.  

 

강석연은 1914년 제주도 제주면 삼도리(三徒里)에서 출생했지만, 일찍부터 부모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자랐습니다. 언니 강석제는 토월회에서 활동하는 배우였고, 이 언니의 영향을 받아서 무대 활동을 펼쳤습니다. 예능방면으로 천부적 재능이 있어서 연극, 라디오 드라마 출연, 노래 등으로 이름이 차츰 알려지기 시작했지요. 제주도 출신가수로는 한림읍 명월리에서 태어난 백난아보다 강석연이 훨씬 먼저였고, 또 최초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서울에 진출해 있던 일본 콜럼비아레코드사 서울지점에서 노래 잘 부르는 강석연을 뽑아서 전속으로 편입했습니다. 그만큼 당시로서는 가수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던 시절이었지요. 기생, 영화배우, 연극배우 등이 가장 만만한 가수발탁의 대상이었습니다. 소설가이자 유명작사가였던 박노홍(朴魯洪, 1914∼1982)의 증언에 의하면 강석연의 외모는 ‘다소 통통하게 생겼으며 모든 행동에 야무진 구석이 많았고, 노래 부르는 모습과 창법도 야무졌다’고 말합니다. 드디어 1931년 2월 강석연은 <방랑가>와 <오동나무> 등 두 곡을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 발표하였는데, 이 작품은 강석연의 위상을 가수로 심어주는 일에 크나큰 기여를 했지요.   

 

흔히들 <방랑가>를 평가하면서 이 노래가 식민지 시대에 많이도 발표되었던 유성기음반 중 이른바 ‘방랑물(放浪物)’ 가요의 기점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대중들의 반응이 워낙 드높아서 여러 레코드회사에서는 여타 인기곡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노래를 이애리수를 비롯한 다른 가수의 버전으로 취입하여 발매하기도 했었던 것입니다. 광복 후에는 고운봉, 명국환 등이 재취입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유독 강석연이 부른 노래는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는 우뚝한 창법으로 시대적 분위기와 색깔을 잘 담아서 들려줍니다. 강석연의 <방랑가>를 다시금 귀 기울여 들어보면 넋을 놓고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아득한 눈보라 벌판을 걸어가는 한 사내의 모습이 보입니다. 하지만 이 노래는 가파른 세월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살아가는 한 지식인의 반성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렇게 대책 없이 살아서는 안 된다는 강렬한 경고와 메시지를 작품의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지요. 

 

유투브(http://www.youtube.com)에서 <방랑가>를 검색해보면 뜻밖에도 일본과 타이완에서 이 노래가 지금도 여전히 활발하게 연주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放浪の唄>란 제목으로 1932년 고가마사오(古賀政男) 작곡, 사토우보노스케(佐藤惣之助) 작사 표시가 된 음반이 콜롬비아레코드사에서 발매가 되었습니다. 고가마사오 작곡이라고 하지만 실은 그가 조선에서 전래해오던 옛 가락을 다시 다듬어서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설명합니다. 가사는 원곡의 분위기와 전혀 다릅니다. 노래는 1932년 하세가와 이치로(長谷川一郞)가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하세가와가 누구냐 하면 바로 일본에서도 데뷔했던 가수 채규엽(蔡奎燁)으로 그가 일본에서 가수생활을 할 때 쓰던 이름입니다. 1962년 일본에서는 가수 고바야시 아키라(小林旭)가 다시 이 노래를 편곡해서 부르기도 했습니다. 


 船は港に 日は西に いつも日暮れにゃ 帰るのに  

 枯れた我が身は 野に山に 何が恋しうて 寢るのやら 


 捨てた故鄉は 惜しまねど 風にさらされ 雨にぬれ  

 泣けどかえらぬ 青春の 熱い淚を 何としよう


 路もあるけば 南北 いつも太陽は あるけれど 

 春は束の間 秋がくる 若い命の 悲しさよ

 

-<방랑가>의 일본버전 <放浪の唄> 전문 


 

한편 타이완에서는 <유랑지가(流浪之歌)>란 제목으로 진분란(陳芬蘭)이란 가수가 부르는 노래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 노래는 대만에서 <우야화(雨夜花)>란 제목의 본토민요로 아예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유랑가>의 일본버전이나 대만버전이 모두 뱃노래를 방불케 하는 쓸쓸한 울림의 내용입니다. 


船也要回反來 日落黃昏時 

去處也無定時 阮要叨位去 

拖磨的阮身命 有時在山野 

爲何來流目屎 爲何會悲傷 

 

-<방랑가>의 대만버전 <流浪之歌>의 1절 


식민지조선에서 시작된 노래 <방랑가>는 이렇게 일본과 중국에서 여전히 청년세대들에 의해 즐겨 불려왔고 기타 연주곡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동북아시아 일대의 음악적 영향관계는 이처럼 결코 간단하게 규정할 수 없는 긴밀한 상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옛 노래는 가사의 표면에 나타난 내용을 문맥 그대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 주변에 서려있는 울림과 내적인 반향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제대로 된 맛을 읽어낼 수가 있습니다. <방랑가>와 같은 음반의 앞뒷면에 수록된 신민요 <오동나무>는 또 어떠합니까?

 

당시에도 검열(檢閱)의 매서운 눈초리는 삼엄했을 터이지만 이 노래의 효과는 전반적으로 눈물, 이별, 설움, 원한 따위에 대하여 그 원인을 따져서 묻고 비통한 현실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노래가사를 한번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특히 마지막 5절 가사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금수강산은 다 어데 가고요/ 황막한 황야가 웬일인가’란 대목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부분을 읽으며 우리의 억장은 당시 일제가 저질렀던 온갖 수탈과 유린에 대해 새삼스레 끓어오르는 분노와 서러움으로 무너지는 듯합니다.

 

그 아름답고 평화롭던 금수강산의 현실이 이제는 황막한 황야로 변모해버린 정황에 대하여 개탄을 표시합니다. 1절에서 4절까지는 평범한 내용으로 전개되다가 꼭 하고 싶은 가슴속의 말을 5절 가사에 감추어놓았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노래가사가 아니라 민족의 가슴을 세차게 후려치는 웅변적 효과와 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뜻이 담긴 대목을 가수 강석연은 처연하게도 불러냅니다. 후렴구에서의 여운은 이런 비통한 심정을 한층 고조시킵니다.


오동나무 열두 대 속에 

신선선녀가 하강을 하네 

에라 이것이 이별 이란다 

에라 이것이 설움이라오


산신령 까마귀는 까욱까욱 하는데 

정든 님 병환은 점점 깊어가네 

에라 이것이 눈물이란다 

에라 이것이 설움이라오


홍도 백도 우거진 곳에 

처녀총각이 넘나드네 

에라 이것이 사랑이란다 

에라 이것이 서러움이라오


아가 가자 우지를 마라 

백두산 허리에 해 저물어 가네 

에라 이것이 이별이란다 

에라 이것이 설움이라오 


금수강산은 다 어데 가고요 

황막한 황야가 웬일인가 

에라 이것이 원한이란다 

에라 이것이 설움이라오

 

-신민요 <오동나무> 전문 

 

강석연의 대표곡은 위의 두 곡을 비롯해서 <황금광조선(黃金狂朝鮮)>, <에로와 구로>, <젊은이의 노래>, <패수(浿水)의 애상곡>, <인생은 초로(草露)같다>, <서울행진곡>, <남대문타령> 등 다수가 있습니다. 

 

강석연이 생전에 남긴 대중문화작품만 하더라도 무려 160여종이 넘습니다. 거기엔 유행가를 비롯해서 영화설명, 영화노래, 스켓취, 동요, 신민요, 코미디, 속요, 넌센스, 만요, 만극 등 실로 다양한 장르의 활동들이 총망라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만큼 강석연의 활동영역이 광범했고, 또 적극적이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들입니다. 하지만 가수 강석연과 관련된 자료들은 SP음반이나 가사지 이외에는 별로 이렇다 할 게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강석연 노래에 대한 글을 어느 지면에 발표한 뒤 이를 보게 된 유족과 극적으로 연결이 되어서 당시의 귀한 사진자료를 비롯한 여러 가지 새로운 사실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사진 가운데는 빅타레코드사 전속가수 강석연이 같은 소속 이애리수, 김선초, 김복희 등과 함께 일본 빅타레코드사로 초청을 받아서 스튜디오에서 취입을 하는 광경, 도쿄의 히비야(日比谷) 공회당에서 치마저고리를 입고 마이크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광경, 새해를 맞아 빅타레코드사 옥상에서 조선의 여가수들과 함께 각각 ‘근하신년’이란 글자판을 각각 들고 찍은 사진, 이애리수와 단둘이 다정하게 찍은 귀한 사진들을 볼 수 있습니다. 강석연은 요즘 말로 하자면 식민지 초반의 아이돌(idol) 가수에 해당된다고 할 것입니다.

 

가수 강석연(1932)


강석연의 가수활동은 1939년까지 이어지다가 이후 결혼과 더불어 가요계를 아주 떠나게 됩니다. 당시 언론계와 금융 쪽에서 활동하던 방태영(方台榮, 1885∼?)과 결혼하여 신혼살림을 차리고 오로지 가정생활에만 충실했습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남편은 인민군에게 납치되어 북으로 끌려가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고, 강석연은 홀로 아들 넷을 키우며 고생스럽게 살아갔습니다. 미용기술을 배워서 미장원을 운영하며 꿋꿋하게 가정을 꾸려갔습니다. 강석연 여사의 네 아들 가운데서 둘째가 현재 대한농구협회 회장으로 있는 방열(方烈)입니다. 그는 지난날 유명한 국가대표농구선수이자 감독을 지내기도 했었지요. 

 

(左) 강석연-오빠 강석우와 함께

(右) 강석연-토월회 시절 언니와 함께


강석연은 가수가 되기 전 언니 강석제(姜石齊)의 권유로 토월회에 가입하여 언니와 함께 무대 활동을 펼쳤습니다. 많은 연극작품과 영화작품에 출연했습니다. 오빠 강석우(姜石雨)도 두 누이동생을 보살피면서 함께 무대 활동에도 참가했지요. 대중예술의 피와 재능이 갖추어져 있었던 형제자매들이라 하겠습니다. 가수 강석연은 분단 이후 그 어떤 대중매체에도 얼굴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아들 방열의 회고에 의하면 중학교 재학시절, 다락방에서 붉은 비단보자기로 싼 보퉁이를 발견하고 이를 끌러보았는데 거기에는 뜻밖에도 무대의 마이크 앞에 서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어머니사진이 있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어머니는 몹시 노기 띤 표정으로 거기엔 관심을 두지 말라며 황급히 보따리를 어딘가로 깊이 감추어버렸다고 합니다. 혹시라도 아들의 학업에 혼란을 줄까봐 자신의 무대경력을 철저히 감추었던 것이지요. 강석연은 2001년 87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대중들 앞에 전혀 그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有情千里)>(연락처 010-4538-8700)에서는 강석연의 귀한 음원을 수집정리하고 이를 ‘강석연대표곡집’이란 타이틀의 CD 두 장으로 발간해서 세간의 화제를 모은 적이 있습니다. 강석연 관련 자료들을 모두 수합해서 잘 간추린 평전(評傳)을 발간하는 것도 해볼 만한 일입니다. 한 가수의 전기적 삶을 정리함으로써 그 시대의 역사성과 의미를 함께 정리해내는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한국대중음악사의 귀한 자료들이 하나둘씩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는 일은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릅니다. 음반, 사진, 가사지, 포스터, 편지, 메모, 유품, 의상 등등 여러 가지가 이에 해당될 터인즉 아직도 많은 보물들이 무관심속에 버려져 있거나 아예 방치된 사례가 많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특히 유성기음반자료는 식민지시대 주민들의 구체적 삶과 내면풍경을 고스란히 알게 해주는 매우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입니다. 많은 음반자료들이 여전히 먼지를 덮어쓴 채 우리 앞에 그 전체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동안 험한 세월의 파도가 휘몰아쳐가는 과정에서 많은 음반들이 파괴되어 사라졌을 터이지요. 하지만 남아있는 음반이라도 더욱 소중하게 여기고 수집하며 갈무리하는 자세가 갖추어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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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lated with help of Google Translate:

 

Do you know the colonial idol Kang Suk Yeon?

by Lee, Dong-Soon Professor, Yeungnam University

2013

 

"The Blood had cooled in the body of a young man while he should be warm. There are big tears in their eyes. The heart of the young man was filled with discouragement and despondency, and the whole body was deeply ill. Where and how can you travel with such a body?"

 

Such a part of the song Wanderer, sung by singer Kang Seok-yeon (real name 姜福燕, 1914-2001), show someone left alone in a vast field of cold northern snowstorms. The lyrics of this song are the pinnacle of a tragic worldview. There is no way to find the sprout of hope anywhere. Indeed, in the early 1920s, the landscape of our people was no different from the extremes of this Wanderer.

 

In the midst of this frustration and discouragement, we carried out an independence protest in 1919. But for a moment, our sovereignty recovery campaign was put down by the brutal Japanese sword. Later on, the terrible heart would have no way of speaking. The prototypes of the 1920s also had a negative current of unknown nationality, such as dimness, sorrow, sorrow and decay, and most colonial intellectuals fell into the labyrinth of such narcotics.

 

However, in 1931, a song that reflected the atmosphere of the times was released to represent the crying and mourning of the colonial youth. That was Wanderer. The song is written by Lee Kyu-Song and lyrics by Kang Yun-seok. When I was drunk and sang this song, it seemed like a little stuffy breath. The old jams that had been tightening all the time seemed to be washed away.

 

 

The Wanderer

 

Lyrics for Wanderers released by Columbia Records

 

The food is soaked by the young man's tears

Sick with discouragement and persuasion

a Endless journey towards the Northern Korean snow aurora

My heart feels sad

 

Looking at the rising moon,

at the Mountains and the clear water

a lonely Lonely wayfarer erases a tear

The day of wandering fades away

 

Spring wind

My heart grows old

My strong love has withered

My body grows old, my heart grows old

 

Photo- (左) Kang Seok-yeon was wearing Hanbok after singing in Japan. (右) Kang Suk-yeon (far right), Kim Bok-hee (center), and Lee Ae-soo (far left), were also dressed in Japanese clothes. They were all singers of the Victa Records.

 

Kang Suk-yeon was born in Samdori-ri, Jeju-myeon, Jeju Island in 1914, but grew up in Seoul with her parents. Her sister Kang Suk-je was an actor in the Towolhoe, and she was staged under the influence of her sister. Because of his talent in entertainment, her name began to become known for her dramas, radio dramas, and songs. The singer from Jeju Island clearly confirmed that Kang Seok-yeon started much earlier than Baek Nan-ah, who was born in Myeongwol-ri, Hallim-eup.

 

Kang Seok-yeon, who sings at the Seoul Columbia Record Company, which was in Seoul at the time, was selected and transferred to it. At that time, finding a singer was more difficult than picking stars in the sky. The outlaw entertainers, movie stars, and theatrical actors were the most popular singers. According to the testimony of novelist and well-known writer Park No-hong (朴魯洪, 1914-1982), Kang Seok-yeon's appearance was 'slightly plump, with a lot of movement in all her actions, singing and creation.' Finally, in February 1931, Kang Suk-yeon released two songs, "Wanderers" and "Paulownia", which contributed to the planting of Kang Suk-yeon's status as a singer.

 

It is often said that "Wanderer" was the starting point for the so-called “Wandering Water” song, which was released during colonial times. The reaction of the public was so high that many record companies used it as a popular version of Lee Ari Su and other singers. After independence, Gounbong and Myeonggukhwan did remakes of it.

 

Among them, the song sung by Kang Suk-yeon plays with the ambience and color of the times with a spear-winding method that does not allow others to follow. If you listen to Kang Seok-yeon's "Wanderer" once again, you will see a man walking through a vast blizzard in the snow. But this song draws on the reflection of an intellectual who lives helplessly in the face of steep years. In other words, it is laying a strong warning and a message on the basis of his work that he should not live without such measures.

 

If you search for <Wanderers> on YouTube (http://www.youtube.com), you can see that this song is still active in Japan and Taiwan. In Japan, a record titled <放浪 の 唄> was written by Columbia Records in 1932 as a song written by Koga Masao and written by Sato Bonosuke. Although it is said to be composed of Gogamasao, he explains that he made this work by refining the old melodies that had been handed down in Joseon. The lyrics are totally different from the atmosphere of the original. The song is said to have been sung by Ichiro Hasegawa in 1932.

 

Hasegawa is the singer Chae Gyu-yeop, who debuted in Japan. In 1962, singer Kobayashi Akira wrote this song again in Japan.

 

-Japanese version of <Wanderer> <放浪 の 唄>

 

The port is going towards closing and the day goes west.

My dead body will fall in the field and fall in love with the mountains

 

The abandoned deceased will be drowned,

but it will be exposed to the wind and becomes wet in the rain

What should I do for this youthful ecstasy of crying

 

Although there are Kushiro and the north and south, the sun is always there.

Hunchun is the sadness of a young life, where autumn falls for a while.

 

On the other hand, in Taiwan, you can listen to a song by a singer named Jinbun-ran under the title <Rangji-ga-ga>. It is said that the song has been settled in Taiwan as a mainland folk song entitled Uyahua. Both the Japanese and Taiwanese versions of The Wanderers are the loneliness of the song.

 

-Verse 1 of <流 의 之 歌> Taiwan version of <Wanderer>

 

The ship has to go back to the sunset at dusk.

There is no time to go to the place.

The fate of the tow is in the wilderness

Why are you coming to see why you are sad?

 

Song Wanderer, which originated in Colonial Chosun, is still loved by young generations in Japan and China and is loved as a guitar performance. The musical influence relations of Northeast Asia have such close interactivity that they can never be defined simply. In addition, old songs should not be read in context as they appear on the surface of the lyrics. The sound and inner reverberation that surrounds you must be passed before you can read the true taste. What about Shin Min-yo's "Paulownia", recorded on the other side of an album like "Wanderer"?

 

At that time, the bitter eye of censorship would have been fierce, but the effect of this song is lamenting the bitter reality of asking about the cause of tears, farewells, frustrations, and so on. Take a look at the song lyrics.

 

Pay particular attention to the last five verses. That's where the Mt. Geumsugang goes everywhere. As we read this, our accent seems to be broken by the simmering anger and bitterness of all sorts of exploitation and tragedy that Japanese imperialists committed at that time.

 

The beautiful and peaceful reality of Mt. Geumsugang now expresses the sadness of the situation that has now turned into a wilderness. From verse 1 to verse 4, it was developed with ordinary contents, and the words inside the heart that I want to say are hidden in the verse 5 lyrics. This is not just a song lyrics, but it has an eloquent effect and power that smashes the heart of the people. Singer Kang Suk-yeon sang the big words with this meaning. The afterglow of the refueling sphere heightens this bitter feeling.

 

-Shin Min-yo

 

<Tung Tree>

 

At the twelve paulownias

A fresh lady descends

This is a time of parting

 

Mountain Spirit Crows

Jungden's illness is getting worse.

it are tears

 

Hongdo white island

Maiden bachelor.

this Era is love

this Era is sorrow

 

Baby, don't go Uji

The sun goes down in Mt. Baekdusan

This is a time of parting

 

Where is Mt. Geumsugang?

What is a wilderness?

This is what I want

 

Kang Suk-yeon's representative songs include the two songs above, including <Golden Gold Chosun>, <Ero and Guro>, <Song of the Young Man>, <Suspicious Love Songs>, and <Life of the Elderly> There are many such as <Like)>, <Seoul March>, <Namdaemun Tayeong>.

 

There are more than 160 kinds of popular cultural works left by Kang Suk-yeon. There are a wide variety of genres, including fashion songs, movie descriptions, movie songs, skits, nursery rhymes, new folk songs, comedies, tricks, nonsense, many songs, and comics. These are materials that show that Kang's activities were extensive and active. However, the material related to the singer Kang Suk-yeon was not confirmed so much except the SP album or lyrics.

 

However, after I published the article about Kang Seok-yeon's song on a page, I was dramatically connected with my bereaved family, and I could see many new facts including precious photographic material of the time. Among the photographs are singer Lee Suk-yeon, Kim Sun-cho and Kim Bok-hee, who belong to the singer Kang Suk-yeon.

 

Singer Kang (1932)

 

Kang Suk-yeon's sings continued until 1939, after which he left the music industry because of marriage. At that time, she married Bang Tae-young (方 台 ∼, 1885-?), Who was active in the media and financial sectors. When the Korean War broke out, her husband was kidnapped by the People's Army and taken to the north, where destiny of life and death were unknown. Kang Suk-yeon lived alone with her four sons. She learned beauty skills and run a beauty salon to build my family. The second of the four sons of Mrs. Kang Suk-yeon is Mr. Kang, currently the president of the Korean Basketball Association. He was a famous national basketball player and coach last year.

 

Before becoming a singer, Kang Suk-yeon joined the Towol society at the invitation of her sister, Kang Suk-je, and staged a stage with her sister. She has appeared in many theater and film works. Her brother Kang Suk-woo also took part in stage activities while caring for my two sisters. The Brothers and sisters had the blood and talent of popular art. Singer Kang Suk-yeon hasn't seen any media since her division.

 

According to her son's recollection, when she was in middle school, he found a corner wrapped in a red silk cloth in the attic and dragged it. There was a picture of his mother singing in front of a microphone on the stage. The mother, who had learned this, was so eager to hide her baggage somewhere that she would not pay attention to it. Because she was worried about her son's studies, she completely concealed her stage career. Kang Suk-yeon did not appear at all before the masses until she died at the age of 87 in 2001.

 

In the old music love group <Yujeong Cheon-ri> (Contact 010-4538-8700), Kang Seok-yeon's collection of precious music was collected and published on two CDs titled 'Kang Seok Chon-gyo'. There is. It is also worthwhile to gather all the materials related to Kang Seok Yeon and publish a well-prepared peace. This is because by arranging the biographical life of a singer, the effect of arranging the history and meaning of the time together can be obtained.

 

It is so thrilling to see the precious materials of Korean pop music that no one has been able to show up before us one by one. Records, photographs, lyrics, posters, letters, memos, keepsakes, costumes, and so forth will all fall into this category.

 

In particular, the Meteor recordings are our very important cultural heritages that give us a thorough understanding of the specific life and inner landscape of colonial people. It's a pity that many records still cover the dust and don't show us the whole picture before us. In the meantime, many records were destroyed and disappeared in the course of the stormy waves. However, I hope that the remaining albums will be more valued, collected and captu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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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 also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_print.asp?code=1600&key=20101105.22017202610

 

김남석의 연극이야기 <33> 때로는 말보다 음악에 끌리는 이유

1930년대 음악극 흥행서 연극의 활로 해답 찾아야

   

일제 강점기 연극 막간에 음악극이 인기를 누렸다. 사진은 당시 극단 '취성좌' 소속의 무대가수 강석연.

현대에 들어서면서, 연극은 사양 사업이라는 말이 줄기차게 떠돌았다. 주목받는 연극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예전에 비해 연극에 대한 선호도가 급격하게 격감한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한 가지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연극의 하향세와는 반대로, 뮤지컬은 욱일승천하는 기세로 붐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이다. 연극을 보지 않은 이들도 뮤지컬을 보는 것에는 흥미를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연극에 비해 훨씬 고비용임에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생각도 널리 퍼져있다. 도대체 연극과 뮤지컬이 무엇이 달라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1920년대 중반부터 조선의 연극은 '음악극'(뮤지컬)을 상연 예제로 도입하기 시작했다. 1932년 태양극장 창립 공연작으로 선정된 작품 중에도 춘강 편 비극 '애곡'이 포함되어 있었다. 비록 대본은 남아 있지 않지만, 박진이 남긴 회고를 참조하면 관련 논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 슈니츨러 원작의 '애곡'은 1929년 12월 11~12일 조선극장에서 토월회가 이미 공연했던 작품이고, 토월회의 마지막 공연이었던 1930년 1월 23~28일 공연에서도 재공연된 바 있었다. 1920년대 후반 토월회는 당시 대중극단에서 인기를 얻고 있던 막간을 도입했는데, 이 막간의 일환으로 음악극도 시도한 것이다. 훗날 박진은 자신들이 한 음악극을 뮤지컬과 동일 장르로 파악하게 된다. 그러다가 이러한 음악극을 태양극장의 창립 공연작으로 선정하기에 이른다.

태양극장은 토월회와는 달리 대중극('흥행극') 흥행을 공식적으로 표방한 단체였다. 따라서 이러한 단체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선택이 음악극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관객들은 지루한 대사로 이어지는 관념의 연극보다는, 밝고 경쾌하고 때로는 슬프지만 따라 부를 수 있는 음악으로 인해 선명하게 기억되는 연극(음악극)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박진은 음악(극)의 매력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관객을 위한 연극으로 음악극을 추천했다. 흥미로운 것은 작품 속에서 음악의 역할이다. 이 작품의 두 주인공인 누이 에레나와 동생 마리온은 아버지가 전쟁에 나가고 그 뒤를 이어 어머니가 죽자, 고아가 되어 세상을 떠돌게 된다. 눈 먼 누이 에레나가 만돌린을 연주하면, 동생 마리온이 이에 따라 노래를 하면서 구걸을 했던 것이다. 

공연에서 남매의 구걸 행각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연출가는 심리적 동정심을 더욱 부추기려는 목적으로, '만돌린'이라는 악기를 무대에서 직접 연주하게 하고, 애절한 노래를 부르도록 유도하였다. 무대 위에 '생음악'을 배치하고 비극적 풍경을 강조하는 바람에 관객들은 슬픔에 더 깊이 젖어들 수밖에 없었고, 감정을 어루만지는 음악(극)의 매력에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뮤지컬이 그러하듯 말이다.

당시 에레나 역할을 맡은 김연실은 만돌린을 연주할 줄 몰랐지만, 무대 뒤에서 박진이 대신 연주하고 이를 마치 김연실이 연주하는 것처럼 연기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음악으로 전달해야 할 것은, 음악으로 전달해야 한다는 점을 새삼 상기시킨다고 하겠다. 연출가는 김연실이 음악을 연주할 줄 모른다고 해서, 그녀에게 대사로 연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무대 예술은 말로만 전달되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혹여 현재 연극의 인기가 하락하는 이유 중에, 말에 대한 관습적인 의존 때문은 아닌지 숙고할 필요가 있다. 우리 연극은 아직도 말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고, 다른 표현 형식을 찾는 일에 대해 상대적으로 인색하기 때문이다. 관객이 없다고 말하기 전에, 1930년대 조선의 대중극이 음악극을 선택했던 이유를 음미해보면 어떨까. 그들처럼 '없어진' 관객을 '되찾기'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적극적으로 살피는 일이 될 테니 말이다. 

연극평론가·부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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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lated with help of Google Translate:

 

Kim Nam-seok's Theatrical Story - Reasons to be sometimes rather be attracted to music rather than to the words ; Finding  the answer to the drives of a 1930s musical drama gig, International Newspaper, 2010-11-04

   

Musical dramas became popular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Singer Kang Suk-yeon had been a member of the 'British' troupe.

 

In modern times, the word has been circulating about theatrical business. It was not that there were no plays that were more in the spotlight, but it is clear that the preference for the play was drastically reduced compared to the past. But there is one thing to consider. In contrast to the downward trend of the play, musicals are booming with ascending momentum. Even those who have not seen a play often show interest in watching musicals. Though much more expensive than a play, the willingness to accept it is widespread. What's the difference between drama and musical?

 

Since the mid-1920s, Joseon's plays began to introduce "music plays" (musicals) as performance examples. Among the works selected as the founding works of the Sun Theater in 1932, the Tsun River episode Tragedy was included. Although the script does not remain, references to Park's recollections can lead to relevant discussions. Schnitzer's original song 'The Song' was already performed by Towolhoe at the Chosun Theater on 11-12 December 1929, and was re-performed on January 23-28, 1930, which was the last performance of the Towol society. Towol society in the late 1920s introduced the interlude, which was popular at the time, and one attempted there to play music as part of the interlude. Later, Park Jin captured their music drama in the same genre as the musical. Then he selected this musical drama as the founding performance of the solar theater.

 

Unlike the Towolhoe, the Sun Theater was the group that officially promoted popular dramas. Therefore, it would not be an exaggeration to say that the most obvious choice for these organizations was musical drama. The audience prefers a play that is clearly remembered for its bright, cheerful, and sometimes sad but vocal music, rather than an idea play that leads to boring lines. Park knew the charm of music. So he recommended a musical play as a play for the audience. Interesting is the role of music in the work. The two main characters, sister Erena and younger brother Marion, become orphans when their father goes to war, followed by his mother's death. When her blind sister Elena played the mandolin, her brother Marion sang along and begged.

 

The siblings 'beggings in the performance hurt the viewers' hearts. For the purpose of furthering psychological sympathy, the director encouraged them to play a musical instrument called 'mandolin' on the stage and to sing a sad song. By placing 'live music' on the stage and emphasizing the tragic landscape, the audience was forced to get deeper into sorrow and indulge in the charm of music (the drama) that touched their emotions. A bit like the musical today.

 

Kim Yeon-sil, who played the role of Elena at the time, didn't know how to play mandolin, but she was playing behind the scenes and acting as if Kim was playing. This anecdote reminds us that what must be delivered in music must be delivered in music. The director did not allow her to act as an ambassador because Kim did not know how to play music. This is because stage art is difficult to convey only in words.

 

Perhaps one of the reasons for the current decline in theatrical popularity is whether it is due to the conventional dependence on leads. Our play is still too dependent on words and relatively stingy about finding other forms of expression. Before telling you that there are no audiences, why don't you enjoy the reason why Chosun Drama selected Chosun Drama in the 1930s? It would be to actively look at what is needed to 'recover' the 'missing' audience like them.

 

Theater critic and professor at Pukyong National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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