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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타홍 / Jang Il-Tahong

November 3, 2019

 

 

유성기로 듣던 불멸의 명가수: 얼굴없는 명가수(1) /

Immortal Master Singer: A Faceless Master Singer (1)

 

17 아리랑의 꿈 / Arirang's Dream (REGAL 383)

 

As the title already shows this is an arirang song led by acoustic guitar rhythms, with trot-like arrangements of clarinet and close violin and flute, it also has accents by Hawaiian slide guitar, it's rhythm has more Korean roots.

 

 

유성기로 듣던 가요사 / Songs that I heard during the musical period  from (1925~1945) [Disc 2]

 

옛 님을 그리면서 / Painting the Old (1934)

 

Also this song I assume is rooted I Korean folk rhythms and melody. It is arranged by a waltzing drive with a 30s/old time music flav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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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GRAPHY:

http://blog.daum.net/...

 

인천권번 출신 여가수 장일타홍 

김윤식/ 시인,·인천문협 회장 기호일보ㅣwebmaster@kihoilbo.co.kr 2008년 04월 27일 일요일  제0면 

 

고(故) 신태범(申兌範) 박사의 저서 『개항 후의 인천 풍경』에 흥미를 끄는 내용이 있다. 1920~30년대 경제 활황으로 인천 미두장(米豆場)이 번창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외지인들이 모여든다. 그에 따라 인천 땅에 외식업과 여관업, 그리고 유흥업이 생겨나 특히 호황을 누리게 된다. 그런 인천 사회의 모습 중에 기생조합이었던 권번(券番)의 풍정을 그린 구절이다.

 

“목로주점과 방술집도 늘어났지만 격이 높은 유흥업소가 등장했다. 돈을 벌었다고 마시고, 잃었다고도 마시는 것이 술이고, 술에는 으레 여자가 따르게 마련이다. 씀씀이가 크고 돈 출입이 잦은 미두꾼이 늘면서 요릿집과 기생 권번이 생긴 것이다. 일월관(日月館), 용금루(湧金樓), 조선각(朝鮮閣) 등이 문을 열고 소성권번(邵城券番)이 출현했다. <중략> 장고와 가야금을 가지고 수심가 아니면 남도소리를 하던 연석(宴席)이었는데, 1930년 후반부터는 유행가와 댄스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931년에 있던 소성권번의 일본어 선전 광고를 보니 딴 세상 같기만 하다.

 

‘예도(藝道) 발달의 중임을 맡고 수련을 거듭하기를 몇 성상(星霜)이던가. 이제 예도의 자신이 가슴에 가득 찬 꽃 같은 기생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다.’라는 본문과 함께 초일기(草日記)가 실려 있다. 50여 명의 명단인데 희한한 화명(花名)을 몇 개 골라 적어 본다. 신화중선(申花中仙), 방초선(方楚仙), 이일지연(李一支蓮), 조비봉(趙飛鳳), 조비연(趙飛燕), 장일타홍(張一朶紅), 김경패(金瓊?), 김일점홍(金一点紅), 민금선(閔錦仙), 이채운(李彩雲)”

 

권번에 대해 다소 길게 인용이 되었는데, 여기서 흥미롭게도 가수 장일타홍의 전직과 함께 당시 서울과 평양, 인천 등지에 생긴 유흥업소의 실태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1930년대 후반부터 유행가와 댄스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는 신 박사의 기록을 뒷받침하듯, 1935년 8월 1일에 발간된 잡지 『삼천리』의 ‘三千里 機密室’(삼천리 기밀실)이라는 가십 기사에 이미 인천권번의 장일타홍이 서울 콜럼비아 레코드회사 소속 유행가수로 나와 있는 것이다.  

 

이 잡지 기사는 비록 각 레코드사 소속 가수들이 기혼인지 미혼인지 일반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흥미 위주의 내용이지만, 장일타홍이 당시 콜롬비아 소속 가수 강홍식(姜弘植), 채규엽(蔡奎燁), 조금자(趙錦子) 등과 함께 나란히 기사 대상이 되고 있다. 물론 여기 기사를 통해 이 무렵 장일타홍이 이미 기혼자로서 가수 활동을 하고 있었던 사실도 알 수가 있다. 또 그해 10월호 『삼천리』에는 가수들에 대한 인기투표를 실시해 발표한 기사도 있는데, 장일타홍은 5위까지 입상자에도, 또 아깝게 10위까지의 차점(次點)에도 들지는 못한 채 16명의 등외(等外)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그녀가 ‘별 볼 일 없는’ 가수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톱클래스 가수 중의 한 명이었다. 조선일보 1935년 2월 14일, 15일자 기사를 보면 “콜롬비아 秘藏(비장) 가수 총출동, 유행가 민요 무용의 밤”에 조금자, 황재경(黃材景), 강홍식 등과 출연하는가 하면, 1938년 3월 1일~2일에는 모리나가제과(森永製菓) 주최 “봄의 봐리에테”에 당시 다른 일류 가수들과 나란히 출연하고 있으며, 이어 5월 3일~4일에도 “전조선향토연예대회 古樂歌舞(고락가무) 대 페젠트 8도여류명창대회”에 출연하고 있다. 그만큼 인기가 있었다는 증거인 것이다. 다만 그녀의 이런 활동에 관련한 기사는 1940년 3월 “방송예술가 實演(실연)의 밤” 출연 이후 돌연 종적을 감추고 만다는 사실이다. 신병이 있었는지, 가정 문제였는지, 아니면 또 다른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그래서 그것이 은퇴로 이어진 것인지, 아무튼 어디에서고 그녀의 동정(動靜)은 확인되지 않는다. 

 

장일타홍의 출생 연대나 가계(家系), 결혼 생활 등 개인 신상에 대해서 지금까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신 박사가 남긴 기록대로 그가 인천권번 기생이었다가 유행가 가수가 되어 활동했다는 것 정도가 전부다. 『한국음반학』제6호(1996)에 실린 노재명(盧載明)의 논문 「장일타홍의 유성기 음반에 관한 연구」에서도 그의 생몰 연대나 출생지, 음악 수업 과정 등등에 대해서는 전혀 미상(未詳)함을 토로하고 있다.

 

그러나 1934년 9월 조선중앙일보 후원으로 열린 삼남지방 수재민 위문 ‘전조선 순례 음악회’ 참가자 프로필에 장일타홍의 출생과 연예계 진출에 대한 약간의 언급이 나와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문에는 장일타홍이 애초 인천의 한 부요(富饒)한 가정 출신이었는데 돌연한 부친의 병사(病死) 때문에 가세가 기울어 급기야 기적(妓籍)에 몸을 두게 된 애화(哀話)의 주인공으로 기술되고 있다. “장양이 몇 살 되지 않아 부친이 뜻하지 않은 병마에 걸리어 세상을 떠난 이후부터 가세가 점점 기울어져 고난과 싸우며 겨우 당시 보통학교를 마치었으나 의지할 한 간의 집조차 없어져 어린 두 자매와 도로에서 방황할 가중(苛重)한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기구한 운명 속에서” 몇 번이고 죽을 생각을 하다가 결국 “수다(數多)한 가족을 위하여 비로소 기생으로 몸을 팔았으나 설상가상으로 몸 판 돈까지 사기를 당하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일타홍은 그러한 고난을 잊고 전심으로 가무에만 힘을 쏟았다고 한다. 결국 타고난 미모와 노래에 대한 재능이 있었던 까닭에 그 얼마 앞서 경성에서 개최된 명창대회에서 영예의 1등을 거머쥐었고, 그것이 곧 가수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장일타홍의 노래로 확인된 곡은 1934~5년에 콜롬비아에서 취입한 20곡으로 음반 10장 분량이다. 특기할 것은 그녀가 부른 노래는 ‘신민요곡’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이 전래 경기민요였다. 아마도 그의 출생지, 성장지가 인천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참고로 그녀가 부른 곡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민요곡으로 「노래가락」 「양산도」 「이별시」「이팔청춘가」 「신고산타령」 「창부타령」이 있고, 신민요곡으로는 2중창곡 「동구랑타령」 외에 독창곡으로 「사랑타령」 「눈물의 배따라기」 「청풍명월」 「이별의 악수」 「청춘의 비문」 「어허야 나루라오」 「봄놀이타령」 「아리랑 울지 마라」 「남모르는 도라지」 「아리랑의 꿈」 「고향생각」이 있다. 가요곡은 「옛 님을 그리면서」와 「첫사랑」 두 곡이 남아 있다. 일타홍(一朶紅). 그 이름과 같이 그녀는 한 송이 붉은 꽃으로서 웃음을 파는 신세이기는 했지만 인천인으로서 분명 우리나라 가요사를 장식한 인물로 우뚝 선다. 

 

◇ 본문 가운데 ‘三千里 機密室’(삼천리 기밀실)처럼 한자는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편집자가 괄호안에 한글을 병기했음을 알려드립니다. - 편집자 주  [출처: 김윤식 시인의 인천문화예술인 考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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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lation (with Google Translate help):

 

Jang Il Tahong from Incheon Kwonbeon

by Kim Yun-sik / Poet, Chairman of Incheon Munhwa Cooperative, Seon Ilbo, April 27, 2008

 

There is something interesting about the book, "Incheon Landscape after Opening", by Dr. Koh, Tae-Bum. With the economic boom of the 1920s and '30s, Incheon's Midujang flourished, attracting foreigners from all over the country with the dream of a succes. As a result, restaurants, inns, and nightlife were created in Incheon. It is a passage that depicts the style of Kwon Beon, who was a lowlife-entertainers association in the face of Incheon society.

 

Mokno taverns and taverns have also increased, while also high-end entertainment venues have emerged. It was all about drinking and spending money often followed by spending it on women. The number of rice hunters with large spending and frequent access to the money led to the creation of the restaurant and the increase of entertainers. Ilwolgwan, Yonggeumru, and Chosun-gak opened. There was a curb that used to play Django and Gayageum, in the depths of Namdo. From the late 1930s, trendy dance trends began to emerge. Seeing the Japanese propaganda advertisements in 1931 seemed like from a different world.

 

How many stars did you take to practice as a master of the development of the Jedo? Now, Jeido's own flower-like lowlife-entertainers await you. 'Cho Il-gi' (草 日記) is included with the text. It is a list of 50 people, and in it a few rare names are mentioned like Shinhwa Joongsun, Bangchosun, Lee Il-yeon, Jobi-bong, Jobi-yeon, Jang Il-tahong, Kim Gyeong-pae ), Kim Il-Jung Hong (金 一点 紅), Min Geum-Seon, and Lee Chae-Woon (李彩雲).

 

It is interesting to see here the present situation of singer Jang Il-tahong, along with the current situation of the nightlife in Seoul, Pyongyang and Incheon. In particular, as being backed by Dr. Shin's record that “the trend of fashion and dance began to blow from the late 1930s,” the “Shimcheon-ri” (samcheon-ri secret chamber) of the magazine Samchul-ri, published on August 1, 1935. In the gossip article, Jang Il-tahong of Incheon Kwon Burn is listed as a fashionable singer of the Seoul Columbia Record Company.

 

Although the magazine's articles focus on the interests that stimulate the public's curiosity, whether singers from each record company are married or unmarried, Jang Il-Taong was Colombian singer Kang Hong-sik (채), Chae Kyu-yeop (蔡 奎 燁), and Da-ja (趙錦子). Side by side is the subject of the article. Of course, this article shows that Jang Il-tahong was already a singer as a married person. Also, in the October issue of Samcheonri, there was an article published by popular voting for singers. Jang Il-tahong, who won the runner-up in the fifth place and the tenth place in the 10th place, did not enter the 16th place. (等外) You can see the name on the list.

 

Nevertheless, she was never a singer who didn't see much. Rather, she was one of the top class singers. In the Chosun Ilbo, February 14, 15, 1935 article appeared in the "Colombia Singer Going Out, Fashion Song Folk Dance Night", in which appeared Hwang Jae-kyung, Kang Hong-sik, etc. On May 1st and 2nd, she appeared in the “Barorie of Spring” hosted by Morinaga Confectionery, alongside other top singers of the time. She appeared at the "Gorak Dance" vs. the Pesant 8 Degree Female Masters Contest. " It is evident to see that she was  popular. However, an article related to her activities mention that she suddenly disappeared after appearing in “The Night of Broadcast Artists” in March 1940. Whether there was a recruit, a family problem, or some other story, and whether it led to retirement, somehow, her true motives were unverified.

 

The personal identity of Jang Il-tahong's birth date, family line, and marriage has not been known so far. Dr. Shin's records say that she was a student of Incheon Kwon-Ban and became a fashion singer. Roh Jae-myung's research on Jang Il-tahong's Meteor Records, published in No. 6 (1996), said that he had no idea of ​​his date of birth, place of birth, music lessons, etc. 

 

However, there is some mention of Jang Il Tahong's birth and entry into the entertainment industry in the participant profile of the Chosun Chosun Pilgrimage Concert in Sanam Province, sponsored by the Chosun Joongang Ilbo in September 1934. Jang Il-tahong was originally from a wealthy family in Incheon, but is described as the main character of a love story, in which she became obsessed by. After the sudden death of her father, a soldier. At the age of ?? year old, her father suffered from an unforeseen illness, and after the death of her father, she was gradually inclined to more hardships. After thinking about dying many times in such a fateful destiny, she eventually sold her body as a lowlife entertainer for a chatty family, but even worse, she was also scammed.

 

However, Il-Tahong has forgotten such hardships and devoted her whole heart to the dance. In the end, she had a natural beauty and a talent for singing, which led her to the first place in honor at the prestigious competition held in Gyeongseong. To date, 20 songs from Janil Tahong has been identified on Colombia in 1934 with about 5 to 10 records. Notably, most of the songs she sang were folk songs except for the “Shinmin Song.” Perhaps because her birth place and growth place is Incheon.

 

For reference, the song titles she sang were as follows. The folk songs include `` Singing Songs '', `` Yangsan-do '', `` Parting Time '', `` Ipal Young Adults '', `` Singo-san Ta-Ryeong '', and `` Chang-Buta-Ryeong ''. Tears of Tear, Cheongpung Moon, `` Break of Goodbye, '' Inscription of Youth, `` Huh-ya, Narurao, '' Spring Play Taling, `` Don't Cry Arirang '', `` Unknowing Bellflower '', `` Arirang's Dream '' and `` Homeland Thought ''. There are two songs left in the song, `` Drawing the Old Mother '' and `` First Love. '' Ilta Hong. As the name suggests, she is a red flower and smiles, but as an Incheon man, she stands as a figure who decorated Korea's s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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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YRICS:

(with translations done with help of Google Translate

so with some mistakes)

 

 

(1935) 장일타홍 - 이별의 악수 / 청춘의 비문

C296 콜럼비아 SP 정규

 

장일타홍 - 이별의 악수(離別의 握手)(신민요) (35/11)

 

 

손이나 잡아주오 떠나는 임아
이별이 서러우니 힘 있게 쥐오
눈물에 젖는 소매 느끼는 울음
갈라면 빨리 가소 떠나는 임아

손이나 잡아주오 떠나는 임아
온다는 말을 하니 설움 더 하오
해조차 저 산 넘어 져 가는구려
뒤돌아 보지 마라 떠나는 임아

손이나 잡아주오 떠나는 임아
웃으며 살펴가서 편지나 하오
구름도 흘러 가니 어서 떠나오
잊지나 말고 사오 떠나는 임아 

 

side A 01 이별의 악수(신민요)  장일타홍
side B 01 청춘의 비문(신민요)  장일타홍

 

Parting Handshake

 

Hold my hand, I am leaving

It's sad to say goodbye

the Sleeves are weeping

If you split up, please go away quickly

 

Hold my hand, I am leaving

I'm sorry to say that this time has come.

Even the sun falls over that mountain

Don't look back for I am leaving

 

Hold my hand, I am leaving

I look at you with a smile and promise to write a letter.

the Clouds are flowing, so I leave

Don't forget that I'm leaving Sao

 

side A 01 Parting Handshake (Shin Min Yo) Jang Il Hong

side B 01 Inscription of Youth (Shin Min Yo)

Goodbye Handshake / Inscription of Youth

C296 Columbia SP Regular (1935/11)

 

 

"옛 님을 그리면서" (1934)

金岸曙 作詞/ 劉一 作編曲/ 노래 張一朶紅

(1934년 7월 리갈 레코드사 발매)

 

< 1 >

옛날 찾아 東山을

올라 갔노라

잔디밭에 봄빛은

푸르렀건만

 

님 사시던 마을엔

異蹟도 업고

지는 볕에 살구꽃

그저 하얄 뿐

 

< 2 >

저고리는 軟粉紅

치마는 紺靑

나풀나풀 바람에

나붓기는 樣

 

어제련듯 이 눈에

暗暗하건만

이 날에는 모두가

꿈이란 말가?

 

< 3 >

시집간 지 몇 핸고?

님 볼길 업네

님을 잃고 이 몸은

그저 외로워

 

반듯반듯 하늘에

빗나는 별을

바라보며 끝없이

한숨 지을 뿐

 

* 아적(異蹟) : 별다른 일. 특이한 기

 

 

"Drawing the Old Lord"

 

Looking for the old tokyo

I went up

Spring is on the lawn

It is blue coloured

 

In the village where you lived

I will work

Apricot blossom in the sun

Just Haya

 

Jingori

Skirt trembling

In the wind

brush strokes

 

Like yesterday

No matter what

On this day like every day

What is a dream and what is not?

 

How long have you been married?

I want to see you

I lost you and myself

alone

 

Straight up in the sky

the Missing stars

Endlessly

I just sigh

 

金 岸 曙 作詞 / 劉 一 作 編曲 / Song 張 一朶 紅

(Regal Records July 1934)

 

 

장일타홍 - 아리랑의 꿈 1936년 10월

1)

아리랑 가노라 나는 가요 아리랑 찾어서 나는 떠나가요 

아리랑 고개는 꿈에 넘을지 넘어만 가면은 다시 못오네
2)

아리랑 가노라 나는 가요 아리랑 그리워 길을 떠나가오 

님두고 가는 몸 고이 가련가 잊고서 가오니 잡지 말아요 

3)

아리랑 가노라 나는 가요 아리랑 어데요 누가 갔었나요 

아리랑 부르며 꿈을 찾어서 노래로 고개를 넘고 또 넘네 

<歌詞提供:운수납자님>

 

Arirang's Dream (October 1936)

 

I'm going with Ari. I'm looking for Ari. I'm leaving.

Ari and my head are beyond my dreams but I can't come back

 

Arirang, I'm coming. Miss Arirang.

Don't take the ??? because you're leaving your body

 

I'm with Ari. I'm with Ari. Who went away?

Singing with Ari, finding a dream, crossing the head with a s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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